[군산을 걷다 #151] ‘금강의 동네’ 나포면 유래와 연원(1)
고군산군도 거쳐 금강권 국제교류의 장 역할… 선사시대 이후 백제 한이 서린 공간… 동북아 최초의 국제戰 ‘백강전투’ 주무대 수많은 문학인들의 작품들에 녹아있는 금강의 이야기 무궁무진
나포면은 임피현의 변방이라 할 수 있지만 젖줄과 같은 금강을 끼고 있어 고대 이후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서해권에 있는 큰강인 금강을 끼고 있는 지역답게 국제교류의 장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선사시대 이후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는 점에서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 신화들은 때로는 고대 유물과 불교 전파, 한일고대사, 근대기의 침탈, 문학인들의 상상력 등에서 수많은 작품들로 재탄생했다.
바다를 통해 들어온 문물 등은 주변의 곡창지대와 어우러져 또 찬란한 백제와 마한 문화를 일궈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이웃 익산 곰개나루(웅포)와 충남 강경읍, 강 건너의 서천 및 부여군, 공주시 등이 함께한 공동의 문화 네트워크로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이들 지역은 과거 역사 속에서도 하나의 문화권이었을 뿐 아니라 빈번한 접촉을 해온 공간이었다.
# 전북과 충남의 평야지대 젖줄 ‘금강’
금강은 본래부터 불린 이름은 아니었다.
당서(唐書)에 금강은 웅진강(熊津江)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금(錦)은 원어 ‘곰’의 사음(寫音: 소리나는 대로 적음)이다. 곰이라는 말은 아직도 공주의 옛 지명 고마나루(熊津: 웅진)와 익산의 웅포(熊浦: 곰개나루) 등의 명칭에 남아 있다.
금강은 장수군 신무산의 뜬봉샘에서 발원해 충남과 전북을 거쳐 군산만으로 흘러드는 우리나라 3대강.
유로 연장은 약 398~ 401km이고 유역면적은 9,885~ 9,812㎢다.
금강은 호수처럼 잔잔하다고 호수 같은 강, 즉 ‘호강(湖江)’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오늘날의 ‘호남(湖南)’이라는 지명 유래의 연원이라 할 수 있다. 실질적인 의미와 다르게 현대기에 대청댐과 용담댐, 금강하굿둑 등 3개의 거대한 담수호를 품고 있다.
이곳의 풍부한 용수는 넓은 평야와 수많은 고을을 풍성하게 했을 뿐 근대기까지 전국적인 도시를 만들어냈다.
금강유역은 옛 백제의 심장부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고 한성백제가 무너지자 국제교류와 군사상 방어가 용이한 공주로 도읍을 옮기는 역할을 했다. 이후 중국과 백제를 잇는 교통로이자 대외 관문으로 유용한 부여로 천도한 이후 백제는 그들만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 나포면의 역사… 6개리의 관할
군산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이다.
관내에 불주사와 불지산 봉수대지(나포면 옥곤리 불지산 정상부에 있는 조선 시대 봉수대 터) 등이 있고 동쪽과 남쪽으로 200m 내외의 망해산과 취성산 등이 분포되어 있다.
서포리, 주곡리, 부곡리, 옥곤리, 장상리, 나포리의 여섯 개 리로 개편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쪽은 익산시 웅포면과 함라면, 남쪽은 서수면과 임피면, 서쪽은 성산면, 북쪽은 금강 건너 서천군 화양면 한산면으로 연결된다.
나포면은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히산현, 고려 시대에는 임피현, 1895년(고종 32년) 임피군 북삼면 지역에 속했다.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옥구군 나포면으로 변경하였고 1995년 1월 1일 군산시와 옥구군의 통합으로 군산시 나포면으로 개칭했다.
본래 임피군의 지역으로서 임피 읍내 북쪽이 되므로 북삼면이라 하여 외곤리, 강정리, 등동리, 나기리, 서지리, 와촌리, 군둔리, 세류리, 장동리, 용산리, 신곡리, 수철리, 세곡리, 나포리, 옥동리의 열다섯 개 동리를 관할했다.
1914년 군면폐합에 따라 하북면의 서포리, 신성리, 외곡리, 진장리, 입점리, 부곡리의 아홉 개 동리와 상북면의 신기리 일부를 병합하고 나포리의 이름을 따서 나포면이라 하여 옥구군에 편입시켰다.
# 나포 지명의 유래와 쇠퇴
‘나포’란 지명은 여지도서 (임피)에 ‘북쪽으로 충청도 한산군과의 경계에 있는 나포(羅浦)까지 가는 길이 관아에서 20리이다. (중략)남쪽으로 산악을 껴안고 북쪽으로 나포진과 서포진을 두르고 있다. (중략)임피현의 나포, 서포를 돌아나가서 옥구현 군산진 앞바다에 닿는다. (중략)나리포창(羅里浦倉)은 나포리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1757년(조선 영조 33)∼1765년(조선 영조 41년)에 편찬한 여지도는 전국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엮은 전국 지리지이다.
이후 ‘나포’란 지명은 해동지도와 대동여지도, 1872년 지방지도 등에서 등장한다. 다만 나리포의 창고기능이 상실되면서 19세기 후반 ‘나리포’라는 지명이 소멸되고 ‘나포’로 통칭되는 과정을 거친다.
‘나리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숙종 46년(1720년) 진휼청에서 공주와 연기의 입구인 나리촌에 설치한 점포에 근원을 두고 있다. 나리촌이 금강 하류인 나포로 옮겨진 것은 2년 뒤의 일이다.
‘나포’는 금강을 가운데 두고 군산시 나포면 원나포와 충남 서천군 화양면 죽산리를 연결하는 나루터로도 이용됐고 도서지역에 가뭄이 들면 내륙의 미곡과 섬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물물교환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공용임시시장으로도 이용됐단다.
당시 금강에서는 강경 하류의 입포와 웅포, 나포 순서로 포구의 규모가 컸으며 객주들의 무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산항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나포를 거쳐 강경으로 올라가던 항로상의 경유지 역할을 했다.
해방 이후 군산동부어판장(째보선창)에 어업조합이 만들어지면서 객주들의 영업 자체가 불법이 되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모두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1991년 금강하굿둑이 완공되면서 바다와 강이 단절되자 어장과 수로의 기능이 사라지면 현재와 같은 한적한 시골로 남아 버린 것이다. 이곳에 나온 내용들은 한국지명유래집과 향토문화전자대전 등을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