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 수군기지 ‘고군산진’에는 ‘수군첨절제사(종3품)’ 근무했었다

고군산도란 지명은 1624년 첫 등장… 그전의 역사‧ 지리서 ‘全無’ 두곳의 위상… 재설치된 고군산진, 군산진의 ‘長’ 품계 높다가 동급 고군산진의 당시 소속은 ‘만경현’ vs 군산(진포)진은 ‘옥구현’ 품계상 옥구현감(종6품) 만경 및 임피 현령(종5품) 보다 훨씬↑

2025-08-27     정영욱 기자
선유도를 위시하여 다리로 이어진 섬들/사진=군산시

‘1746년(영조 22년) 편찬된 ‘속대전(続大典)’에는 고군산진에 전선(戦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이 배치되었다.

그런데 1808년(순조 8년) 편찬된 ‘만기 요람(万機要覧)’에서는 고군산진에 전선(戦船) 6척, 병선(兵船) 6척, 방선(防船) 2척, 사후선(伺候船) 10척이 배치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당시 전라우수영이 전선을 2척 보유한 것과 비교할 때 고군산진은 전선이 6척으로서, 우수영보다 무려 3배 이상이나 많은 전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고군산진은 이때 조선 전(全)수군진영을 통틀어 최대의 군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옛 문헌 및 군산시사 등에서 찾아낸 ‘고군산진’의 규모와 위상을 보여준 내용이다)

# ‘최대 수군기지’ 고군산진 vs 군산진의 탄생 비사

조선시대 수군은 외적의 침략을 바다에서 제압함으로써 외침을 막는 국방과 국가의 조세미를 신속히 운반하여 경제를 안정시킬 두 가지 임무가 있었다.

군산의 원도심권에 있었던 당시의 군산진은 이런 임무를 동시에 맡고 있었다.

여말과 조선 초에 군산도에는 수군진이 설치된 곳이었으나 우회 침략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어 오늘날의 군산, 당시 옥구현의 진포(군산포)로 이전했다.

이런 내용을 기록한 사료들을 보면 이렇다.

세종실록지리지(1432년에 편찬된 지리지)와 경국대전에 따르면 군산포에는 종4품의 수군만호가 해상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 시기의 군산포, 또는 군산진은 당연히 옥구현이자 오늘날의 군산 원도심권이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해상방어체제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이 시기 들어 서남해안 지역에는 왜구뿐 아니라 밀무역과 약탈 등을 일삼는 국적을 알 수 없는 황당선(荒唐船)이 자주 출몰, 백성들의 피해가 컸다. 심지어 왜란 이후 군산포의 만호가 해적에게 피살되는 불상사까지 발생하자 조선 조정이 긴장했다.

당시 조정은 서‧남해안 지역 해상방어업무를 국가 중요정책으로 인식, 전라도 일대의 수군진 6곳을 증설해 해상방어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이렇게 탄생한 곳 중 하나가 ‘고군산진’이다.

광해군을 거처 인조는 1624년(인조 2년)에 군산 지역의 해상 방어를 위해 과거의 군산도에 설치한 수군진(鎭)을 설치했는데 기존 군산진과 구분하기 위해 ‘고(古)군산진’이라고 칭했단다.

1895년 갑오개혁 때 고군산진 및 군산진이 폐진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당시 총리 대신 김홍집, 내무대신 박영효에 의해 고군산진은 해체됐다.

# 고군산진(김제의 만경현) vs 군산진(옥구현)은… 오늘날 행정구역 ‘군산시’

왜 군산진과 고군산진은 왜 혼동을 일으켰을까.

조선 초 당시 군산도에 있는 진(鎭)을 옥구현의 진포로 이전했다가, 조선 중기 과거의 군산도에 다시 진(鎭)을 설치하면서 비롯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5년(1530년) 제작된 지리서) ‘옥구현’편과 증보문헌비고(영조 46년(1770년) 제작된 지리서)의 등에서 나온 군산 관련 내용을 찾아보면 명쾌히 정리된다.

군산포는 (옥구현의)북쪽으로 20리이며 진포(鎭浦)가 (그곳에) 있다. 본래 만경현엔 군산도가 있었는데 조선 중기 이후 해방(海防)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이곳에 수군진을 뒀다고 적고 있다.

문제는 두 지역의 동일 지명 때문에 하지만 군산포와 군산도에는 있는 ‘진(鎭)의 명칭’을 구분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명확하다.

군산시사 상(2000년 제작)의 294페이지에 인용된 ‘고군산지’에 대한 내용이다. 광해군을 거처 인조 2년(1624년)에 군산지역의 해상 방어를 위해 과거의 군산도에 설치한 수군진(鎭)을 설치했는데 기존 군산진과 구분하기 위해 ‘고(古)군산진’이라고 칭했다는 내용이다.

증보문헌비고 기록에 ‘만경(현)에 군산진이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기고’라는 부분이 있다. 군산진이라 불리던 곳이 두 군데라는 말이다.

이런 혼동을 막기 위해 과거의 군산도에 있는 진(鎭)은 ‘고군산진’이라 불러 옥구의 군산진과 명확히 구분한 것이라고.

한편 해창(海倉)은 군산포(羣(=群)山浦)에 있다. 경암동에 위치한 군산창(群山倉)은 군산진 곁에 있었다는 것이다. 군산창은 1512년(중종 7)부터 19세기 말기까지 운영됐다.

# 고군산진의 ‘절제사’ 관직은 잘못 …‘수군첨절제사가 정식명칭

옛 고군산진의 위용을 나타내는 선유도 비석군들(고군산진 수군 첨절제사비).

절제사란 관직은 조선 초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졌는데, 다수의 언론과 자료 등에서 혼돈하거나 잘못 사용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고려말과 조선 초에 ‘절제사’란 직제가 있었지만 사병혁파로 없어진 직제인데 세조 3년 이후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관직.

조선 중기 이후 고군산진이든, 군산진이든 정식 관직은 ‘수군첨절제사’다. 한마디로 진(鎭)의 군사와 행정의 최고 책임자란 얘기다.

이곳의 수장은 조선시대의 각 진관(鎭管)을 전담하는 ‘종3품의 서반(무반)’이었다.

수군(육군은 병마)절도사(節度使)의 아래로 육군격인 병영(兵營)에는 병마첨절제사라 불렀고 오늘날의 해군이라 할 수 있는 ‘수영(水營)’에는 수군첨절제사(또는 수군첨제사)가 있었다. 수령이 겸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첨사(僉使)로 칭했다.

이런 점에서 각종 언론 등에 나온 ‘고군산진의 절제사비’란 관직 이름은 여러모로 틀린 용어다.

굳이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선유도의 고군산진 ‘수군첨제사’라고 해야 맞다.

# 고군산진 첨사 또는 수군첨절제사… 군산진보다 44년 먼저 승격

첨사 또는 수군첨절제사는 조선시대 절도사에 속한 진(鎭)에서 수군을 거느려 다스리던 군직이다.

이곳의 수장은 ‘종3품의 서반(무반)’이고, 옥구 현감(종6품)이나 이웃 임피 및 만경 현령(종5품)보다 서열이 높았다.

군산진은 세종 때 고군산군도(선유도)에서 옥구현의 이전한 뒤 이곳의 수장은 수군만호(종4품)가 죽 관리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군산창과 군산진을 동시에 관리하는 바람에 숙종 45년(1719년) 만호에서 첨사(종3품)로 승격했다. 이 시기부터 군산진의 수장은 ‘수군첨절제사’다.

반면 고군산진은 인조 2년(1624년) 별장이 파견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고군산진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수군첨절제사(또는 첨사)로 처음 승격된 때는 숙종 원년(1675년)이다.

이런 점에서 고군산진이 조선 최대 수군기지였을 뿐 아니라 첨사 승격도 44년이나 빠른 것은 그 규모 및 해상방위의 중요성을 고려한 조치였을 것이란 해석은 가능하다. 숙종 45년부터 고군산진이나 군산진의 수장은 수군첨절제사란 얘기로 정리된다.

결론적으로 볼때 선유도에 있는 오래된 비석군(群)의 정체는 숙종 이후 수군첨절제사들의 송덕비(?) 등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