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49] '군산정신의 근간’ 옥구농민항쟁 발단(2)

한말 지조 높은 선비 이용휴 지사… 서당 만들어 인재양성 앞장 김영현 선생… 서수 첫 농민운동단체 광명농우회 설립· 항일투쟁 앞장 박상호 선생… 전주고보 재학때 일인 교장 추방운동· 퇴학 후 농민운동 장태성 선생… 박 지사와 학생운동·농민야학· 농민항쟁 핵심 역할 톡톡

2025-06-20     정영욱 기자
옛 임피역 앞 옥구농민항일항쟁비. / 사진=투군

옥구농민항쟁은 1927년 11월 당시 옥구군 서수면 이엽사 농장의 혹독한 착취와 폭압에 항거하고 봉기한 우리나라 농민저항 운동사의 대표적인 항일투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니가타현 출신 일본지주들의 종합공동농장격인 ‘이엽사농장’이 소작료 75%를 현물로 납입할 것을 강요하고 하향조정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서수농민들은 소작료 불납운동과 함께 투쟁과정에 잡혀간 농민조합 지도자 장태성 구출을 위해 임피역전주재소와 서수주재소를 습격했다.

일경은 즉각 탄압에 나섰다. 의거 다음날 새벽 서수농민단체 간부와 소작인 대표를 압송하자 이에 맞선 인근 소작인 500여 명이 군산경찰서 앞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일경은 시위책임 및 주역 등 총 80명 항일지사들을 붙잡아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했다.

이중 34명이 구금자 탈취, 소란죄 등으로 기소돼 전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대구복심원(현재의 고등법원) 판결(1928년 9월) 때까지 항쟁은 계속됐다.

농민항쟁 대표 34명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독립유공자 서훈(포상)을 받았다.

멸실위기에 놓인 이용휴 선생의 옛 집. / 사진=군산시청 제공

이같은 항일농민투쟁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저력은 서수지역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구한말 서수면 출신 선비 이용휴 선생의 의기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용휴 선생(1870~ 1918)은 구한말 국운이 기울어져 일제의 침탈을 온몸으로 맞닥뜨려야 했던 지식인이자 선비로서 일본인 농장주 가와사키의 집요한 협박과 일경의 강요에도 당당히 맞선 우국지사였다.

일본인 농장주가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사병과 일인순사를 앞세우고 이용휴 집에 쳐들어와서 재산을 강탈하려했다는 것을 고발한 공문서 /사진 출처=군산대

국권상실에도 굴하지 않고 일제에 맞서 싸우면서 선비의 의기를 굳건하게 지키며 자신의 집 아래채에 서당을 설립하는 등 인재 양성에 앞장섰다.

옥구농민항쟁의 주역들 다수가 이곳에서 공부했거나 인근에서 살면서 직간접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게 구희진 군산대 교수(역사학과) 등의 추론.

그의 사후인 옥구농민항일투쟁 당시에도 이용휴 선생의 자손들은 그들의 사랑채를 농민야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공했을 뿐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에 옥구농민항쟁의 의거와 투쟁에 앞장선 주요 인물들의 숨은 공로와 공적을 간단히 정리하는 장을 마련했다.

*김영현(1907~ 1944) 선생

서수면 갑부 김용석의 아들인 그는 서수리 청년 및 농민운동단체에 적극 동참한데 이어 지원했다.

이 지역 최초로 만들어진 농민운동단체인 광명농우회는 1927년 1월 그의 집에서 창립총회를 통해 만들어졌고 이 단체의 핵심역할을 했다.

전주고보 등을 졸업한 그는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 전신)에 진학, 비밀결사사건으로 퇴학당한 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했을 뿐 아니라 군자금 조달 등 항일운동에 전력했다. 일본군과의 교전 중에 붙잡혀 중형을 받고 1944년 3월 수감 중에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박상호 선생(미상)

서수면 최고 갑부 박운거의 아들로 1926년 전주고보 2학년 재학 중 일본인 교장추방운동을 벌이다가 퇴학당했다. 10대 후반인데도 학교 1년 선배 장태성과 소작농들의 삶을 개선하고 서수농민조합과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 결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다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그의 삶은 민족분단 등으로 가려져 있어 안타까움이 남는다.

*장태성 선생(1909~ 1987)… 농민야학 만들어 농민항쟁 앞장

옥구읍 옥정리 출신인 장태성은 기존 옥구농민항쟁 지사들과 달리 옥구읍 출신이다.

그는 1926년 전주고보 3학년 재학 중 악질 일본인 교장 배척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후배 박상호와 함께 퇴학당한다. 후배 박상호의 요청을 받고 서수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후 서수청년회를 조직하고 이엽사의 무도한 수탈을 받는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권리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농민야학활동에 투신했다.

이곳에서 서수농민조합과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를 조직,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서수청년회의 집행위원장으로 맹렬히 활동한다. 농민조직 대표로 이엽사 농장과 일인 농장주와 맞서 교섭하려 했지만 철저하게 거부당한다. 이에 이엽사 농장이 교섭 대신 일경을 동원해 농민조합의 소작료 불납동맹을 파괴하기 위해 그를 불법체포하면서 옥구농민항쟁의 서막이 열렸다.

*이용덕(1900~ 1953)· 신문관 선생(미상)

이용덕 선생은 생애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천석군의 아들로서 서수청년회와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유지 청년이었다. 그는 옥구농민항쟁 당시 임피역전 주재소에 불법 구금됐던 집행위원장 장태성을 구출해온 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에 은신시켰다.

이형로와 함께 이용휴의 서당에서 함께 공부한 민족의식이 투철한 신문관 선생은 옥구농민항쟁 당시 40세로 항쟁 중심인물 중 연장자였다.

그는 장태성이 일경에 불법 체포되어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박상호 등과 함께 비상대책회의를 했고 각 마을에 알려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조치를 취했단다. 그는 서수리 농민으로서 농민조합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인사로 주재소로 들어가 장태성을 구출한 뒤 이용덕의 집에 은신시킨 인물 중 하나로 알려졌다. 물론 여기에는 농민 500명과 합세, 압박과 위세를 부리던 일경의 위협을 이겨내고 적극 투쟁했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남달랐다 하겠다.

이밖에 이름없는 주역들의 항일투쟁도 우리가 꼭 기록해야 할 기억물이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에 뿔뿔이 헤어지면서 잊혀진 가족과 후손들도 적지 않아 이름만 남아 있는 사례도 상당하다.

한편 옥구농민항일운동으로 서훈을 받았지만 후손들이 나타나지 않은 애국지사들의 면면은 이렇다.

①김준철(金俊喆: 1920~1928, 당시 27세) ②김택현(金澤顯: 미상, 당시 35세)

③김행규(金杏奎: 1904~미상, 당시 34세) ④복만길(卜萬吉: 1899~미상, 당시 31세) ⑤서가마(徐加馬: 1892~미상, 당시 34세) ⑥서만석(徐萬石:1907~미상, 당시 21세) ⑦신문관(申文官:1887~미상, 당시 41세) ⑧윤경문(尹京文: 1893~미상, 당시 31세) ⑨이보동(李保東: 1898~미상, 당시 30세) ⑩이영출(李英出:1903~미상, 당시 25세) ⑪이원섭(李元燮: 1896~미상, 당시 31세) ⑫이진철(李鎭哲:1896~미상, 당시 37세) ⑬정영운(鄭永云: 1898~1966, 당시 30세) ⑭채판진(蔡判鎭: 1901~1929, 당시 2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