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79] ‘옛 문헌 속’ 은파호수와 농어촌공사 효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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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79] ‘옛 문헌 속’ 은파호수와 농어촌공사 효시(6)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07.08 11:33
  • 기사수정 2022-07-08 1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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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때 제작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옥구현 산천조 첫 등장
옥구서부수리조합 설립(1908년 12월8일)… 농어촌공사의 태동
전북농조‧ ㈜ 군산유원지의 임대계약 체결… 은파 개발 본격
2000년대 초반 은파호수공원. / 사진= 군산시 제공
2000년대 초반 은파호수공원. / 사진= 군산시 제공

미제지 축성 연대는 확실치 않다.

축조 연대와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는 없지만 역사성을 언급하거나 참조할만한 내용은 다수 존재한다.

축조와 관련된 것보다는 사실적시에 가까운 내용들은 일부 고문헌에 나온다.

관련 문헌의 내용들을 살펴보자.

# ‘은파의 본래 이름’ 미제지의 문헌적 고찰… 축조 관련 자료 없어

미제지(米堤池)란 지명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제작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이 문헌의 옥구현 산천조는 ‘미제지는 옥구현 북서쪽 10리에 있으며 둘레가 1만910척(尺, 약 3,3km)에 달한다’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여비고와 대동여지도 등에도 관련 자료들이 나와있다.

미제저수지(은파호수공원)의 고문헌. / 사진= 군산시제공
미제저수지(은파호수공원)의 고문헌. / 사진= 군산시제공

광복 후에는 선제뜰 관개용 저수지로 사용됐고, 1950년대 제방을 높이는 확장공사로 인해 둘레가 6.9km로 늘어난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된 시기로 미루어 고려 시대나 그 이전에 축조됐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이에 팔도지지와 전국지지 등을 근거로 백제 시대까지 소급하는 향토사학자도 있으나 조선 중종조의 시기보다는 훨씬 앞섰을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다 동여비고와 대동여지도 등에도 존재한다는 점과 함께 구체적인 축조 관련 내용이 없는 점으로 미뤄 고려 시대 또는 그 이전일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없는 상황이다. 주된 문헌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 이에 ‘신증(新增)’의 두자를 삽입하여 간행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이 책은 더욱 희귀해져 일본 경도대학소장본이 유일하며, 1611년(광해군 3)에 복간한 목판본이 규장각도서 등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동여비고(東輿備考)’

동여비고라는 제목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 따온 말로, ‘동국’의 동(東)자와 ‘여지승람’의 여(輿)자를 취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비고(備考)’라는 명칭은 ‘동국여지승람’을 이용하는데 참고가 되는 지도’라는 뜻이다.

‘동여비고(東輿備攷)’는 1682년(숙종 8)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책으로, 지도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일종의 도별도(道別圖)이면서도 군현 지도의 성격을 지닌다. 동여비고의 제목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동여비고는 2008년 12월 22일 보물 제1596호로 지정됐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보물 제850-1호. 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목판본의대동여지도 22첩(帖)은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또는 절첩식) 전국 지도첩이다.

최근 김정호의 지도 중 이름이 같으면서 내용이 다른 지도첩이 새롭게 조사됐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필사본의 동여(東輿) 14첩은 1층에 큰 글씨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라고 쓰여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에는 필사본의『대동여지도』 18첩이 남아 있기도 하다.

따라서 앞으로는 대동여지도라는 이름 앞에 ‘목판본 22첩’, ‘필사본 14첩’, ‘필사본 18첩’이란 수식어를 붙여 구분해 주어야 하는 필요성이 생겼다.

1861년에 간행된 것은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의 2본이 각기 보물 850-1호와 보물 850-2호로, 1864년에 간행된 것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1본이 보물 850-3호로 지정되어 있다. 판목이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1매, 국립중앙박물관에 11매가 남아 있어 일제강점기 이후 이야기되었던 판목소각설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 우리나라 수리조합의 원류 …익옥수리조합→ 전북농지개량조합→농어촌공사의 모태

미제지의 용수는 우리나라 최초 수리조합 설립의 근거가 됐다.

미제(米堤)와 선제(船堤)를 관개에 이용하기 위해 근대 수리사업의 계기가 마련된 1906년 수리조합 조례에 따라 1908년 12월 8일 탁지부(지금의 재경부에 해당)로부터 허가받아 설립됐는데 이것이 ‘옥구서부수리조합’이다.

은파호수공원에 있는 농어촌공사 100주년 기념탑. / 사진=군산시제공
은파호수공원에 있는 농어촌공사 100주년 기념탑. / 사진=군산시제공

조선인이 주도한 이 수리조합은 조합원 다수가 조선인이었다. 몽리(蒙利) 구역의 70%가 조선인 소유였다는 점에서 다른 수리조합들과 사뭇 구별된다.

옥구서부수리조합은 사무소를 당시 옥구군 미면 미룡리(현 미룡동 394-2)에 뒀으며 미제와 선제의 두 수원을 이용해 수리사업을 경영했다.

선제는 제방과 방수로만 남은 채 개답하여 농지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역사성 때문에 이 조합의 설립일을 오늘날 농어촌공사의 시작으로 삼고 있다.

이에 농어촌공사는 공사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시설과 탑을 건립했다.

전북도민일보 2007년 10월에 따르면 농촌공사는 홍성 보령방조제 준공탑과 수자원공사의 용담댐 완공기념탑을 기본 모델로 최종 위치에 3,305∼4,958㎡규모의 소공원을 조성키로 했다. 여기에 기념탑과 정자, 벤치, 조명시설 등을 갖춰 공사의 역사를 대내외에 알린 것이라고 전북도민일보는 보도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은파호수의 공사창립 100주년 기념탑. 이를 건립한 것은 우리나라 수리조합의 효시인 옥구서부수리조합이 은파유원지를 기반으로 출범한 역사성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군산은 이런 역사성에도 관련 시설이 얼마 남아 않지만 익산에는 여럿 존재한다.

# 익산 전북농조 옛 청사건물 … 농촌공사 통합 후 한동안 청사로 이용

익산시 평화동소재 익산역 주변 문화예술의 거리 안쪽으로 도보로 10분 남짓 걸어가다 보면 익산문화재단이라는 방향 안내판이 나타난다. 코너를 돌면 정면에 빨간 벽돌에 범상치 않은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이 건물은 일본인 농장 지주들이 쌀 생산량을 늘리고자 창설한 익옥수리조합의 사무소 및 창고로 사용된 서양식(르네상스의 팔라죠 양식) 건물로 1930년에 지상 2층의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1930년 익옥수리조합 사무소로 지어져 1941년에는 임익(臨益), 전익(全益), 옥구서부수리조합과 통합돼 전북수리조합 청사가 됐고 해방 후에는 전북농조의 청사로 1996년까지 사용됐다.

정면 중앙의 출입구와 위쪽 창호 부분은 테두리에 꽃잎무늬 형상의 인조석으로 치장하여 붉은 벽돌과 대비를 이루고 있고 맨사드 지붕 등 독특한 당시의 건축기법들을 보여주고 있다.

토지 개량과 수리 사업을 명분으로 설립되어 과다한 공사비와 수세를 부담시켜 지역 농민을 몰락시키는 등 일제에 의한 우리나라 근대 농업 수탈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건물이지만 건축 및 기술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아 건축공학도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해방 이후 전북농지개량조합(전북농조)의 청사로 사용되다가 목천동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빈 건물이 됐다. 수십 년 간 폐허로 방치되던 건물은 2005년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 후 2009년 ‘익산시 문화재단’이 입주하고 새 단장을 통해 지금은 익산시의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탈바꿈 했다.

한편 1905∼1919년 조성기 동안 익산을 둘러싼 도내에서는 모두 6개의 수리조합이 탄생했다.

도내 수리조합 제1호인 옥구서부수리조합(1908), 황등호를 수원으로 하는 임익수리조합(1909), 만경강에 도수로를 개설하여 겨울철 임익수리조합의 남은 물을 활용했던 임익남부수리조합(1909), 도수로를 개설하여 탑천에서 물을 끌어썼던 임옥수리조합(1910), 만경강 수계의 독주항을 활용하여 춘포리(대장촌) 일대에 물을 댔던 전익수리조합(1910), 고부지방에서 만들어진 고부수리조합(1913) 등이다.

*취재후기

도내 J사 기자로 익산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이 때가 1996년 1월이었다. 익산분실 부임차원 기관방문을 했는데 전북농조 청사였다. 그 때 그곳에서 당시 김규풍 조합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분과 대화를 했던 기억들이 있다. 군산출신이어서 군산과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

풍채와 대화법이 걸걸해서 여러 기억들이 남아있지만 남성미가 넘쳐나는 분이었던 것 같다.

그가 나중에 군산으로 발령이 나 알아보니 후배격인 김동순 사장의 선친이었다.

그분의 풍채 등이 기억나 비슷한 사람이 있어 그 궁금증이 생겨 수소문해보니 그분의 자제라는 것이었다. 몽리구역이 군산과 익산에 혼재되어 있어 조합장들이 양쪽에서 배출되곤 했다.

# 은파 명칭의 시작은 

#‘사업 구상자의 호일까’ 또는 ‘일반명사의 고유명사화’ 논란 현재진행형

본보에 군산야구 100년사를 기고했던 조종안 기자의 취재 내용에는 은파의 유래에 대한 작은 단서와 오류에 대한 얘기를 밀도있게 다뤘다. 그가 보도했던 오마이뉴스 등을 참조했다.

“전라북도 군산시 은파호수공원에 ‘은파’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미제저수지에 유원지 영업을 구상한 사업가 류모씨가 영업 허가 원서에 자신의 아버지의 호인 ‘은파’를 붙여 1975년 허가 받았기 때문이다. 은파호수공원은 군산시의 허가에 따라 1976년 유원지로 결정되었고, 1985년 8월 26일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었다”는 내용이 한 여러 매체와 나와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자료에서 명칭 유래와 은파유원지의 구체적인 자료에 대한 오류를 지적했다.

이러한 내용은 사업을 처음 구상한 사람의 신분과 개발 시기 등 근거가 확실치 않음에도 정설로 굳어져 왔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1993년 군산문화원이 발행한 군산풍물지를 비롯해 다수 책자와 논문, 해설 등에 인용되고 있었다.

*은파는 일반명사에서 비롯됐다?

사업자의 선친 호를 붙였다는 대목은 시민휴식공간이자 당시 국민 관광지 위상에도 걸맞지 않다.

그의 아들도 이런 내용과 보도 등에 대한 언급을 통해 부분적인 오류가 존재했다는 것을 대체로 수긍하고 있다.

은파(銀波)는 예로부터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이 비단처럼 곱고 아름다운 금강(錦江)을 의미했다. 금강은 군산 시민의 혼이 담긴 강으로 낮에는 은비늘처럼 눈부시게 반짝여 은파라 하였고, 동틀 무렵과 해질 무렵엔 황금빛으로 변해 금파(金波)라 표현하였다.

당시 인기가수 박재란이 금강의 뛰어난 경관을 표현한 노래(1960년 취입) 가사에도 금파와 은파가 등장한다.

조종안 기자가 이 분을 취재한 내용에 따르면 1969년 12월 당시 신지철 동인제약(주) 전무와 백락환 군산경찰서 보안과장은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옥구군 미면 미룡저수지(미제지)를 관광단지로 개발할 것을 착안, 계획을 세운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70년 10월 2일 전북농지개량조합 문종열 대표와 (주) 군산유원지의 신지철 대표 사이에 임대계약서가 체결되면서 은파호수에 대한 개발이 시작된 것만은  정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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