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그의 잔은 그에게 족하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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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그의 잔은 그에게 족하다 6-4
  • 김선옥
  • 승인 2022.09.30 07:47
  • 기사수정 2022-09-30 0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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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에 이어) 아내를 만난 것은 그 시절이었다. 아내는 그의 부모가 다니던 교회의 착실한 신도였다. 신앙심이 깊은 부모 밑에서 어렵지 않게 자란 아내는 무난하고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내의 나이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었으므로 적당한 남편감을 고르는 중이었다. 처가에서는 아내를 호적에서 떼어 낼 절호의 시기로 여겼다. 결혼은 그에게 흥미로운 거래였다. 광재와 헤어지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아내는 광재를 대신하기에 충분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사회적인 시선을 피할 적격의 상대였다. 피난처로 가능한 괜찮은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중매로 만난 낯선 여자에게 그는 조급하게 청혼했다. 여자는 말없이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결혼이란 형식 외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여자의 존재에 대해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내의 반응에 대해 숙고할 여유가 없었다. 광재에게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다른 누구에게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누군가를 떼어 내는 고육지책이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결혼이라니 아이러니했지만 틈을 보일 시간이 없었다.

결혼하기 위해 여자라는 외에 특별히 필요한 사항은 없었다. 덧붙여 결혼과 함께 수상한 감정들도 통제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덤으로 아이를 얻어 새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도 품었다. 아내에게는 그런 복잡한 마음을 숨겼다. 누구라도 부부로 연을 맺을 사람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가 그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시점부터 그는 자신의 우매한 판단을 후회했다. 그가 택한 올바르지 못한 수단과 방법에 수치심을 느꼈다.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지만 그가 아내의 생각을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결혼식 날에 그는 광재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광재는 교회에서 치러진 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후로 종적을 감추었다. 연락이 닿을 수 있기를 바랐으나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때때로 어디 사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비겁한 과거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참았다.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디서든 평화롭게 살기를 기도하는 게 전부였다. 하긴 찾는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만나 예전처럼 되돌아가거나 그럴 입장도 아니었다. 그냥 보고 싶을 뿐이었다.

아내는 결혼 후에도 한동안 그의 성적 취향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살아가야 할 세계가 그걸 강요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숨겼다. 그러나 계속 숨기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숨기고, 속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내가 잠이 든 밤에 여느 때처럼 '메종 드 히미꼬' 의 DVD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주인공 오다기리 조를 좋아했다. 그의 용기, 그의 삶, 그의 솔직함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자신과 닮은 고통을 안고 있는 영화 속의 인물을 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영화를 보는 중에 아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내는 혼자서 몰래 영화를 보는 그의 행동을 수상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눈치가 빠른 아내는 아마도 그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하고 미묘한 감정들을 처음 알아차렸던 것 같다. 하지만 아내는 자신이 느낀 수상한 기운들을 그에게 숨겼다. 아내는 허투루 행동하는 경박한 여자가 아니었으므로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그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은 후엔 메모하는 버릇이 있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영화를 보고, 생각했던 것들을 적었다. 광재의 이야기와 추억을 떠올리는 몇 가지들을 썼다. 그는 그런 것들을 세심하게 잘 간직했어야 했다. 하긴 감추는 게 쉬운 건 아니지만 아무리 꼼꼼하게 숨겨도 찾기 위한 노력이 끈질기면 뭐든 어렵지 않다. 아내는 그의 무심함에 지쳐 가던 상태였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고 싶어 안달하던 차에 기회를 포착한 셈이었다. 비밀스럽고 은밀한 게 무엇인지 단서를 발견한 아내는 그가 왜 적극적이 아닌지, 왜 한번도 사랑한다고 느끼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 버렸다. 그렇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진 않았다. 아내는 결코 그럴 타입이 아니었다. 그를 붙들고 따지기엔 자존심이 너무 세고, 오만했다.

그는 아내에 대해서 과소평가했다. 아내는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평범하지도 무난한 생을 살게 해 주지도 않을 인물이었다. 지극히 평범해서 평생을 무난하게 버텨 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의외의 강적을 만난 셈이었다. 아내는 자존심이 대단했고 자존심을 다치지 않기 위해서라면 어떤 굴욕도 감내할 배짱을 지니고 있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집에서 당하는 눈총에 끄떡없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자존심이 꺾이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내는 그 후에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 줬다. 가족이나 친지들 중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지만 잠자리는 거부했다. 그를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아예 남자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아내는 그와 같은 부류가 역겹고 극히 혐오한다는 사실을 수시로 그에게 일깨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내가 냉정하고 이성적이어서 가정이란 울타리를 망가뜨릴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돈독한 신앙을 가졌던 아내가 동성애적 성향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소수성애자에 대한 왜곡된 지식과 편견으로 무장한 아내는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성향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뼈아프게 노력했는지 이해하려는 마음조차 없었다. 아내에게는 그와의 결혼이 발등을 찍을 정도로 믿음에 대한 상실과 배반이었다. 남편과 아내의 위치가 확실한 가문의 전통을 중히 여겼던 아내가 청혼에 순순히 응한 것은 그의 배경과 흔들리지 않을 가정의 삶이었다. 높은 점수를 주었던 안정된 가정에서 성장한 그의 행동들이 아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일 수도 있었다. '미친놈'은 아내가 그에게 붙여 준 호칭이었고 '짐승보다 못한 작자' 역시 그를 칭하는 또 다른 명칭이었다. 아내의 말대로 어쩌면 그는 짐승보다 못한 미친 작자일지도 몰랐다. 그가 죽일 놈이었다. (계속)

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은 매주 금요일에 이어집니다. 

김선옥 작가는?

김선옥 작가
김선옥 작가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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