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그의 잔은 그에게 족하다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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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그의 잔은 그에게 족하다 6-1
  • 김선옥
  • 승인 2022.09.11 14:57
  • 기사수정 2022-09-11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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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돌아누웠다. 쌓인 불만이나 원망을 아내는 등을 내보이는 것으로 항변했다. 등은 그와 아내 사이의 단절을 의미했고, 서로가 느끼고있는 그만큼의 경계선이었다.

너무 마른 아내의 등은 팔을 두르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그는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막막함에 속이 답답했다. 벽은 지나치게 견고해서 부서지지 않을 것이고, 거북의 등껍질처럼 단단해 뚫고 들어갈 빈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웅크린 아내는 그의 심장을 짓누르며 뒷골을 사납게 잡아당겼다. 뇌세포가 출렁이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손을 내밀어 아내의 몸을 더듬었다.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고싶은 짓궂은 마음이 일었다. 새삼 왜 아내의 예민한 감정을 들춰 보고싶었던 것인지 그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경 쓰여 피곤하니까 건드리지 마."

아내는 짧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낮게 날아든 짜증이 섞인 언어는 비수처럼 그의 가슴을 찔렀다. 피곤하다는 말에는 귀찮다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었으며 접근 금지의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내의 입을 통해 밖으로 튕겨져 나온 무거운 낱말들은 오랫동안 아내가 갈고 벼린 날선 비수였다.

명백한 거절의 언어는 장난기가 가미된 행동에 급격하게 제동을 걸었다. 아내의 선택은 그가 지니고 있던 막연한 기대 심리와 동지적 유대감을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아내가 보인 사소한 행동들이 이제까지 억제해 왔던 그의 의식들에 파문을 일으켰다. 아내가 달아나고 싶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은 것은 자만이었다. 아내는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그러지 못할 뿐이었다.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고도 그대로 진행하면 경을 칠 수 있었다. 아내는 고슴도치처럼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날카로운 가시를 세워 덤빌지도 몰랐다. 다가서다간 피만 흘리게 될 것이니 포기하는 게 나았다. 그는 내밀었던 손을 잽싸게 거두었다.

아내의 그런 행동에 그는 꽤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익숙함에 저항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잠자리를 같이했던 날이 까마득하지만 사실을 일깨우는 짓은 치사했다. 살을 부비며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지 않는 부부의 삶에 대해서 아내는 별다른 불만을 갖지 않았다. 아내가 성적 욕구를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대해 그는 아는 바가 없었다. 가끔 궁금증이 솟았지만 물을 수도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에 아내는 최대의 예의를 갖추었다. 따라서 법적인 고리로 얽혀진 것에 더 의미를 부여하였고, 그게 그와 헤어지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였으므로 선을 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차라리 이혼하자. 그게 너를 위해서도 좋지 않겠어?"

아내의 성향을 알면서도 슬쩍 떠보았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그럴 수는 없지. 수민이 장래도 생각해야 하잖아? 당신 때문에 소중한 아이의 인생을 망칠 수는 없으니까.”

"하긴 우리 딸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절대 해선 안 되지."

"헛소리하지 마. 수민이가 왜 당신 딸이야? 그 앤 내 딸이야. 그리고 답을 뻔히 알면서 느닷없이 쓸데없는 이야기는 왜 꺼내는지 모르겠네. 우리 그냥 이렇게 살아. 한 세상 사는 게 별거야? 생각하면 그다지 나쁠 것도 없는데 새삼스럽게 뭘 어쩌자고."

아내는 아이를 그의 자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수민은 아내 혼자만의 아이였다. 아내의 시선으로 그는 사랑이 결여된 상태에서 정자를 제공한 상대일 뿐이었다. 상징적인 의미로 존재하는 박제된 아버지란 이름, 그 이상은 아니었다.

딸아이 수민은 아내가 구상했던 세계에서 유일하게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내아이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집안의 시린 눈총을 받으면서 굳세게 버티고 있는 것도 오직 수민이 때문이었다. 심지가 깊은 아내가 수없이 많은 말을 속에 담은 채 힘겨운 시집살이를 견디는 이유가 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인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았다. 아이에게 감사할 부분이었다.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아내가 측은해서 억장이 무너질 때가 많았지만 이런 순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김없이 되돌아온 핀잔을 들으며 안심했다.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아내의 단호한 음성에서 법적인 올가미를 풀지 않을 결심을 재차 확인한 셈이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태풍이 사납게 몰아쳐도 꿈쩍하지 않을 고집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단단하게 고여 있는 아내의 의지가 생각할수록 새삼 고마웠다. (계속)

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은 매주 금요일에 이어집니다.

김선옥 작가는?

김선옥 작가
김선옥 작가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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