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그의 아내 9-1
상태바
[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그의 아내 9-1
  • 김선옥
  • 승인 2022.07.08 07:55
  • 기사수정 2023-07-06 08: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파르게 이어진 단선도로의 오르막길을 오른다. 차는 도로의 아래쪽에 마련된 주차장에 놓아둔 상태다.

바람결이 제법 차갑다. 모자를 눌러쓰고, 점퍼의 깃을 세운다. 여민 옷깃 사이로 시린 바람이 스며든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마다 나뭇잎들이 후드득 떨어져 발밑으로 사각거리며 기어든다. 밟힌 낙엽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도 낙엽의 비명을 듣고 있는 걸까. 배가 나오기 시작한 그의 걸음걸이가 점차 느려진다. 숨소리가 거칠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틴다.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억지로 참는 눈치다. 빠르게 펌프질하는 그의 심장이 더욱 바빠지는 모양이다. 심장박동 소리가 내 귀에 크고, 또렷하게 들린다. 기를 쓰고 쿵쾅거리는 저 소리가 멈추면 윤시영이란 유기체도 가치를 잃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힘들지?"

나의 물음은 형식적이다. 힘들다고 대답하더라도 멈출 생각은 없다. 쉬자고 말할 내가 아니라는 것, 지나가는 식의 물음이라는 것을 그도 눈치챈 모양이다. 진의를 파악한 탓인지 대꾸하지 않고 여전히 가쁜 숨소리만 내뿜는다. 무슨 말이라도 할 듯싶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굼뜨게 산행을 계속한다.

“시간을 내줘서 고마워." 나는 다시 말한다. 그는 씨익 웃으며 잽싸게 비위를 맞춘다.

“내 시간은 항상 너를 위해 대기 상태야. 네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해. 너를 지켜 주는 굳센 존재가 되고 싶어. 네 영원한 수호신으로."

바보 같고, 지겨운 답변이다. 그의 아내가 들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빈틈을 보이지 않는 그의 아내를 생각하며 나는 이마를 찡그린다.

걸음을 멈추지 않는 그는 내가 일부러 힘든 코스를 택한 이유를 모른다. 짐작하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가 아니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이라고 선언하기 위해 별렀다. 날을 잡아 험한 산길을 제안하고, 그를 충동질한 것도 이별의 힘든 과정을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인생의 길에서 만났다 헤어지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는 뜻을 그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이별을 이야기할 시간이다.

그는 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마를 찡그려서 마음을 표현하는 내 오랜 습관도 아직 모른다. 그의 아내는 단 한번의 만남으로 내 습관을 금세 꿰뚫었다. 이마를 찡그리는 버릇이 있군요. 그녀는 내게 웃지도 않고 말했다.

나는 이제 막 중년에 접어든 나이다.

그간에 많은 남자들을 만났고, 상당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남자는 내 고객이고, 그도 내가 만난 남자들 중의 하나다. 그는 특별한 존재로 예전에 만난 남자들과는 약간 구별된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류에 속하는 그를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헤어질 시간에 이른 지금도 막막하다. 순진하고 착한 사람,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고 믿는 바보, 나를 위해서 목숨도 담보할 수 있는 남자다. 표현이 제대로 되었을지 의문이지만 그에 대해 내가 느끼는 전부다.

아무튼 그는 내가 만나서 이용했던 남자들과 질이 다르다. 그가 거북했고, 부담스러웠던 느낌에는 그런 껄끄러운 감정이 깔려 있다. 그를 쉽게 떨쳐 버리지 못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이제는 끝내야 한다. 너무 오래 관계를 끌었으니 어쩔 수 없다.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헤어지기로 다시 굳게 결심하자 마음은 조금 홀가분하다. 솔직한 내 심경이다.

그는 내가 첫사랑이라고 말한다. 기억에 없어서 나는 모른다. 너는 내 첫사랑이야. 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믿을 뿐이다. 내 기억의 갈피에 없는 그가 첫사랑의 느낌을 이야기할 때면 솔직히 납득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는 첫사랑을 내게 이식시키기 위해 무척 애썼고, 그런 예전의 감정은 내게 부담만 준다. 애절하고 간절한 느낌으로 첫사랑의 아련함을 강조하는 감정을 받아 주는 일은 어려운 노릇이다. 내겐 받아들일 여력도 없다. 그를 감당하기 어려운 게 그런 것들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남편과 헤어지고 난 뒤에 뭇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심신이 극도로 피곤해진 무렵이었다. 구차한 생을 더 살아야 할지, 아니면 끝장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런 시기에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계속)

※김선옥 작가의 단편 소설은 매주 금요일 이어집니다.  

김선옥 작가는?

김선옥 작가
김선옥 작가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수상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수상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