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70] 한때 지역 최고의 도심 나운동, 그 영광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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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70] 한때 지역 최고의 도심 나운동, 그 영광의 시대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05.03 10:47
  • 기사수정 2022-05-03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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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군 미면 신풍리‧ 미룡리의 한적한 동네에서 출발… 1973년 7월 공식 등장
나운동의 명칭 유래… 73년(나운1동)→ 94년8월(나운2동)→ 2003년2월(나운3동)
개소 13년째 된 한일지역아동센터…어려운 아이들 꿈 가꾸는 보금자리

과연 나운동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나운동이란 이름은 군산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은 것은 아마도 1970년대 초반에 등장했지만 군산을 대표하는 곳으로 변모한 시기는 아무래도 1980년대 중‧ 후반 아니었을까 싶다. 나운동은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절정의 발전을 거듭했다가 수송동과 조촌동 지역과 경쟁에서 다소 밀리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최고 동(洞)으로서 입지는 여전하다.

출발은 미약했으나 창대한 발전을 통해 지역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오늘날 나운동의 시작은 군산시의 팽창과 맞물려 있는 곳이다.

이곳의 특성을 살펴보면 나운1동은 군산 최고의 아름다운 월명산을 배경으로 한 주거밀집지역과 상업지역이 어우러진 곳이고, 나운2동은 전형적인 아파트 밀집 주거지역이다.

나운3동의 주변은 은파관광지, 군산대학교가 위치해있다.

대단위 아파트단지와 농촌지역이 다소 혼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최근엔 거의 군산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거듭났다.

그러면 군산의 핵심공간 나운(동) 명칭 유래를 살펴보자.

나운동의 시작은 1914년 옥구군 미면 신풍리와 미룡리에서 비롯됐다.

나운동은 옥구군 미룡리와 신풍리에 속한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구체적인 유래조차도 애매했다는 것이 통설이라면 통설이다.

나운동이란 이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다.

그 이전에는 명확한 ‘나운’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아 마을 유래가 불명확한 것은 사실이다.

군산시에 편입되어 신풍리 일부(나운)를 나눠서 나운동으로 만들고, 군산의 신도시 지역으로 개발되어 오늘날 지역 최고의 인구와 경제를 자랑하는 곳이 됐다.

이후 나운1동과 나운2동은 1994년 8월 1일 분동됐고, 인구증가에 따라 2003년 2월 17일 나운2동이 나운2동, 나운3동으로 각각 나눠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5년 2월엔 미성동 일부(법정동: 신관동 동부와 개사동의 옥구저수지 동쪽)가 나운3동에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나운동의 탄생 공간’ …주변 마을들 설화와 얘기

미면은 옥구읍 선제리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는 현재 금광동 삼성아파트 고개까지의 상당히 큰 면적을 차지한 곳이었다.

현재의 군산 시내권을 북쪽과 남쪽으로 나눈다면 남쪽 중심지들이 모두 미면에 속한다고 보면 맞다.

미면의 중심에 자리한 곳이 ‘나운리’였다. 아래 내용의 대부분은 나운동을 소개한 행정자료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나운리는 일명 ‘나-랭이’, ‘나-룬이’이라고도 불리던 곳으로 옛 KBS 군산방송국 근처의 산기슭에서 나운동 롯데 APT에 이르는 규모의 마을로 인근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운중반월(雲中半月)’의 명당이 있다는 터로 알려져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왔는데 규모가 크던 나운동은 상-나운(윗나룬이: 신풍초등학교의 서쪽지역), 하-나운 (아랫-나룬이: 신풍초등의 동쪽지역)로 나누어 부르기도 했단다.

나운리의 인근에 위치한 마을로는 나운리의 서쪽으로 창고지기가 살았다는 ‘고직-이’ 마을이 있고 나운리의 남서쪽에는 마을 전체가 밭이었던 ‘대전(大田)’마을이 있었다.

남쪽에는 현 해태마트 인근에 옛날 이곳까지 물(水)이 들어와 청어장수 들이 많이 살았다는 청어장수골(마을)이 있었고, 나운의 남서쪽에는 부엉산(부곡산) 기슭에 나운리와 규모가 비슷한 큰 마을이었던 독점마을 (유원 APT 인근· 부곡마을)이 있었다.

부곡마을은 오랜 옛날부터 독(옹기)을 구웠던 마을로 도기를 생산하여 부흥한 마을이었다.

지금도 나이 드신 어른들은 신풍초등학교 인근의 땅속에서 수천 년간 땅에 묻혀 있던 아름드리 목탄(木炭)을 캐서 불을 지피던 기억과 옛 얘기들을 담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조선시대 미제면 인근 지역의 현황을 당시 시점에서 살펴보면 개사리에서 산길을 따라 걸으면 현 군산대 옆에 자리한 신촌리에 닿는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 작촌으로 불렸으나 마을 이름 때문에 마을이 작살났다 하여 (큰 도로가 나서 마을이 둘로 갈라짐) 최근에 옛 이름인 신촌으로 바뀐 마을이었다.

신촌마을에서 북면의 군산창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 보면 북면으로 가는 길은 지게를 지고 다니는 작은 길로 오늘날처럼 평지에 있지 않고 월명산령의 산기슭을 따라 만들어진 산길이었다.

그 시절,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산굽이를 돌 때마다 초가지붕을 맞댄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을 것이다.

먼저 미룡리의 산 고개 (현 미룡초등학교 북쪽 고개)를 넘으면 독을 만드는 가마가 있는 마을이라 독점이라 불렸던 현 부곡리 (나운동 유원APT 뒷 마을)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 풍산재(현 유원APT고개)를 넘으면 옛날 이곳까지 금강 지류가 닿았을 때 청어장수들이 많이 살았다는 청어장수골 (나운동 극동주유소 사거리 해태마트 인근)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북쪽 건너편 (시민회관 인근)에 제법 규모가 큰 나운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나운리에서 현 칠성사 근처의 한마재와 돌케재를 넘으면 문화동의 오늘날 군산상고 자리에 있던 석치산 마을에 도착한다.

이 마을에서 동쪽의 응지뜸(중앙병원 앞에서 현대코아 앞으로 흐르던 개천)을 바라보며 산길을 걸으면 일명 노루목고개라 불렸던 장학리(송풍동)에 닿을 수 있었다.

# ‘나-랭이’, ‘나-룬이’에서 비롯됐나… 지주 K씨의 호(號) ‘나운’에서 따왔다는 설도

(위에 나온)나운동사무소의 행정자료에 소개된 나운리는 일명 ‘나-랭이’, ‘나-룬이’이라고도 불렸단다.

이렇다 하더라도 나운리를 걸쳐 최근의 나운동으로까지 연결하는 데는 흡족한 자료라 할 순 없다.

이런 점을 들어 어떤 이는 ‘나운’이란 마을 명칭이 옛 사전이나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점에 의문을 표한다.

보통의 한자어는 핵심적인 한자(漢字)가 담겨져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곳의 한자는 나운(羅雲)이 아닌가. 과거 명칭을 한자론 설명하기 싶지 않다. 마땅한 글자가 없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이곳의 소유주였던 작고한 K씨의 별호에서 비롯됐다는 그럴듯한 말들이 더 일반적이지 않나 하는 호사가도 적지 않다.

과연 어떤 것이 정확한 내용이고 정설일까.

# ‘아이들의 행복 요람’ 한일지역아동센터

나운1동 향군회관 내에 있는 한일지역아동센터(2층). / 사진=투데이군산
나운1동 향군회관 내에 있는 한일지역아동센터(2층). / 사진=투데이군산

나운1동의 한일지역아동센터(센터장 두미숙)는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중국어 해외연수 기회와 악기 공부 등을 통해 새로운 지역아동센터의 롤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2009년 9월 개소한 한일지역아동센터는 판에 박힌 의무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보다는 미래의 주인공들을 위한 맞춤형 프로그램을 개발, 지역 학부모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특히 센터 학생들의 폭발적인 관심이 이어지면서 기존 시설에서 지난해 말 향군회관의 건물로 옮겨왔다.

이 센터는 가정 형편상 악기 공부를 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착안, 소속 센터 아동들에게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 결과 아이들의 열띤 참여와 정서 함양에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이곳에서 운영하는 악기 프로그램은 우쿠렐라, 하모니카, 바이올린, 난타 등이다.

이 아동센터가 각종 악기를 정서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다면 다른 지역아동센터와 차별화 전략의 새로운 카드는 글로벌 연수를 위해 마련한 중국어 강좌다.

초기에는 글로벌 해외연수라는 유인책으로 중국어 강좌의 일환으로 도입했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흥미 유발과 동기부여로 이어졌다.

그 반향은 실로 엄청났다. 9년 전 원어민을 초빙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실력파 중국교포를 찾아냈고 그 교사의 헌신적인 노력과 아이들의 적극적인 학구열이 어우러지면서 아동들의 중국어의 실력은 나날이 향상됐다.

특히 2014년 한 아이가 중국 연수를 다녀온 뒤 하나둘씩 중국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수준별로 수업으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20명가량 참여하고 있고 매년 해외연수에 도전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같이 엄청난 성과를 낸 것은 글로벌 시대에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고 견문을 넓혀 우리 미래의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두미숙 센터장의 확고한 운영철학과 의지에서 비롯됐다.

또한, 원어민 강사의 열정과 학부모들의 뒷받침과 학생들의 학구열이 어우러져 이 같은 결실이 있었다는 게 주위의 한결같은 평가다.

여기에다 이 아동센터는 아이들의 건강과 신체발달을 위해 체육전문강사를 초빙, 프로그램을 다각화하고 있다.

한편 인근에 있는 온새미로는 한정식 등을 특화하며 새로운 군산의 맛집으로 미식가들을 사로잡고 있다. ‘자연그대로 언제나 변함없이’란 캐치프레이즈로 군산의 맛을 널리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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