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69] 옛 시민문화회관의 과거-현재-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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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69] 옛 시민문화회관의 과거-현재-미래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04.28 10:22
  • 기사수정 2022-04-28 1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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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 ‘건축가 김중업(작고) 유작’… 현재 도시재생 중
20세기 ‘세계 3대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수제자로 국내 건축 발전 기여
30만 시민들의 문화예술 욕구 충족시킨 주된 공간
도시재생 기다리고 있는 옛 군산시민문화회관/사진=군산시
도시재생 기다리고 있는 옛 군산시민문화회관/사진=군산시

 

대학로의 군산시민문화회관은 우리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을까.

한마디로 이곳은 예술의전당 건립 이전에는 과거 20년을 훨씬 넘게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공간이었다.

1989년 개관한 시민문화회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에 총 858석 규모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와 문화예술인들의 공연· 전시공간으로 활용돼왔다.

각종 행사 때 메인 공간으로써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이 골목을 지나면서 왜 시민문화회관만을 하나의 독창적인 주제로 다루는가를 묻는다면 간명하게 얘기할 수 있다.

시민문화회관의 유명세는 20세기 ‘세계 3대 건축가’ 가운데 한 명인 ‘르코르뷔지에’의 수제자로 국내 현대건축의 선구자인 고 김중업(1922~ 1988)의 유작이란 이유 때문이라고.

# 시민문화회관의 역사

사진=군산시
사진=군산시

 

시민문화회관은 건축가 김중업씨의 유작으로 1989년에 개관해 25년간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운영됐다.

이곳은 이런 역사성에도 지곡동 예술의전당(2013년)이 들어선데다 시설 노후화를 이유로 운영을 중단했다.

이후 매각과 활용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지만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에 해법을 찾았다.

시민문화회관은 2019년 12월 국토교통부 도시재생 인정사업 대상지에 선정된 것이다.

또한, 이듬해 6월부터 세 차례 사회실험을 거쳐 전국 최초 민관협력형 도시재생 방식을 적용해 사업을 추진해 왔다.

이어 이번에 민관협력형 운영 및 설계자 선정 절차를 완료해 시민참여형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될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운영 및 설계자로 선정된 프로젝트팀 ‘거인의 친구들’은 군산에서 활동하는 생활예술가그룹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인천에서 복합문화공간을 운영 중인 콘텐츠 기업과 서울 소재 재생건축분야 설계자로 구성된 프로젝트팀.

운영방식은 시가 소유권을 갖고 선정업체는 장기적으로 자유롭게 운영하면서 시민이 원하는 공공서비스 제공을 맡는다.

# 고 김중업 건축가는 누구

김중업 건축가
김중업 건축가

한국 현대건축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김중업은 누구인가.

그는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경향을 한국에 도입한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인 수준의 건축가였다.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요코하마 공업고등학교 건축과 등을 졸업한 그는 1942년부터 일본 도쿄의 마쓰다‧ 히라다 건축설계사무소에서 근무하다 1944년 귀국, 조선주택영단 기사로도 일했다.

해방 전후 서울대와 한양대 등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952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개최한 유네스코 주최 제1회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가 그해 10월 프랑스 파리의 르코르뷔지에 건축도시계획연구소에 들어가 3년 6개월 동안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그래서 그의 초기 건축 작품에는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1956년 귀국하여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열고 건축의 기능성을 주장한 합리주의가 드러난 조흥은행 본관(1963)과 삼일로 빌딩(1969), 낙천적인 낭만주의 경향을 보이는 제주대학교 본관(1964) 등을 설계했다.

건축가로서 그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심사위원, 한국건축가협회 부회장, 독립기념관 건립위원회 기획위원 등의 공직을 지냈다.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알려졌다.

1969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직접 나서 영화 ‘건축가 김중업’을 만들었을 정도다. 또한 르코르뷔지에 재단이사, 프랑스 몽펠리에 국립건축대학, 미국 포트아일랜드 예술대학, 미국 하버드대학교 부설 디자인학교 교수를 지낸 바 있다.

# 르코르뷔지에는 누구

김중업 건축가의 스승 ‘르코르뷔지에(1887 ~ 1965년 8월)’이다.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프랑스어: Charles-Édouard Jeanneret-Gris) 또는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도시계획가였다.

현대건축에 이론적 연구의 숨결을 불어 넣은 선구자이자 도시 거주자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그는 라쇼드퐁의 장식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며 스승 레플라트니에로부터 배웠다.

그의 건축 디자인은 기능주의와 대담하고 조소적인 표현주를 결합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른바 국제주의 건축의 제1세대로서 수많은 저서를 쓴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금욕주의와 조소적 형태를 추구하는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기법으로 ‘거친 마감 콘크리트’ 사용을 연구한 최초의 건축가이기도 했다.

50여 년 동안 활동하면서 중앙 유럽, 인도, 러시아, 미국 등지에 건축물을 세운 그는 탁월한 도시계획가이기도 했다.

국제적 합리주의 건축사상의 대표주자로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신조를 지켜온 그는 근대건축국제회의를 주재하기도 했고, 거대 주거단지 마르세유의 ‘유니테’를 설계한 건축가였다.

이런 공로 때문에 그를 그리스 최고의 조각가인 페이디아스(pheidias)와 르네상스의 천재 조각가 미켈란제로의 반열에까지 올리며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을 정도다.

시민문화회관의 기억물

16년 전 지역의 한 신문사에서 근무할 때 이곳을 연말 음악회의 주공간으로 매년 빌린 그 시절의 기억들이 듬성듬성 아른거린다.

그곳에 초청된 유명 테너와 소프라노, 가수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곳의 2층은 오래전 건축된 건물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1층의 공연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고민했던 기억도 있다. 이른바 2층 관객석이 거의 난청권이어서 많은 공연엔 크나큰 흠결이 있었다. 구조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설계상 결함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연말이면 이곳에 더 많은 관객들을 모으기 위해 (직원들과 함께)동분서주하던 기억들도 새록새록 나곤 한다. 시청 공무원들과 지인들에게까지 참석을 권유하거나 거의 강권하다시피 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가장 힘든 때는 연말 폭설이 내린 때였다. 연말연시 바쁜 일과 중에서도 다행스럽게 그곳을 찾아준 관객들은 500~ 600명이 넘어섰다는 데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고, 무사고로 마무리됐다는 것에 자족해야 할 때도 있었다.

이런 기억과 함께 오래 전, 4월 벚꽃행사의 시가행진 땐 옛 시청 앞 도로에서 시민문화회관 앞 도로 앞까지 참석했던 벚꽃아가씨들과 함께 걸었던 기억도 있다. 그 시절 시장은 문동신 전 시장이었고 그곳에는 의장단 등 각급 기관장들이 이곳에 도착한 가두행진 참석자들에게 박수로 맞이하던 기억이 생생한 공간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행사도 번거로움과 행사의 흐름 변화로 더 이어가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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