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大選 이야기 #_7] '토론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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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大選 이야기 #_7] '토론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 박선춘 前 국회 국방위 수석 전문위원
  • 승인 2022.03.04 08:50
  • 기사수정 2022-03-15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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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대의 정치쇼, 대통령 후보 TV 토론

“토론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민주주의가 갖는 진정한 가치는 시민 의견의 분포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의견을 형성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로널드 드워킨,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2012)

<웨스트 윙>은 대사가 많은 드라마다. 토론 장면이 많기 때문이다. 흔한 액션 장면 하나 없지만, 속도감과 긴장감이 상당하다. 대통령과 참모들이 계급장을 떼고 벌이는 열띤 토론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하우스 오브 카드>가 정치의 속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면, <웨스트 윙>은 민주주의의 속성을 이상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웨스트 윙>의 토론 장면 중 압권은 마지막 시즌(Season 7)의 'The Debate'편이다. 40분 러닝 타임 내내 대통령 후보 2명이 토론을 벌인다. 지루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이 TV 토론 장면이 미리 찍어둔 것을 편집한 것이 아니라, 생방송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재미를 넘어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토론 장면을 찍기 위해 2주 정도의 리허설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대본도 없이 40분의 토론 장면을 원샷으로 찍었다니 말이다. 이 토론 장면은 일요일 저녁 <NBC NEWS>를 통해 미국 전역에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드라마로 알고 시청했더라도, 카메라 앞에서 벌이는 두 배우의 생생한 토론은 실제 대통령 후보의 TV 토론으로 착각할 정도다.

좋은 토론자가 좋은 정치인은 아니다.

하지만, 토론에서 던지는 정치인의 메시지는 정치 광고 이상의 의미가 있다.

#TV 토론은 얼마나 유용할까?

선거가 민주주의 꽃이라면, 정책토론은 선거의 꽃이다. TV 토론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TV 토론이 선거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회의적 분석이 많아졌다. TV 토론이 유권자의 투표에 미치는 효과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이다.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과 SNS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TV 토론의 영향력도 크게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만큼은 그렇지 않다. 미국에서 TV 토론은 대선 레이스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후보자는 물론이고, 유권자에게도 마찬가지다. 2020년 대선을 보자. 도널드 트럼프와 마이클 블룸버그는 '슈퍼볼(super ball)'로 불리는 NFL 결승전에서 60초에 1,100만 달러(130억 원) 짜리 TV 광고를 나란히 구매했다. 초당 2억 원이 넘는 액수다. 이렇게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은 이유는 단순하다. 1억 명이 넘는 시청자 때문이다.

대통령 후보 TV 토론은 어떤가?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가 벌인 1차 토론의 시청자 수는 7,300만 명이었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가 벌인 토론의 시청자 수는 8,440만 명이었다. 90분 동안 7-8천만 명의 시청자들에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무대이자, 상대방을 무너뜨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기도 하다. 실제로, 미국 유권자의 10% 정도가 TV 토론을 보고 마음을 결정하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Pew Research Center Surverys, 2016)

#링컨-더글러스 토론

 

▲ 링컨-더글러스 토론 100주년을 맞아 1958년에 발행된 기념우표
▲ 링컨-더글러스 토론 100주년을 맞아 1958년에 발행된 기념우표

 

미국에서 공직을 놓고 후보자끼리 벌인 최초의 토론은 1858년 에이브러햄 링컨과 스페판 더글러스의 토론이다. 두 후보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직을 놓고 7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토론을 벌였다. 사회자나 패널 없이 각 후보가 1시간씩 발언을 하면 각각 30분씩의 반론을 제기하는 형태로 총 3시간 동안 진행되는 1:1 토론 방식이었다.

선거 결과는 54:46으로 더글러스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 토론을 통해 링컨은 무명의 정치인에서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7차례의 토론 내용 전문이 신문에 게재 되었고, 토론 내용은 책으로 발간되어 16,000부나 팔렸다. 이를 발판 삼아 링컨은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케네디-닉슨의 TV 토론

최초의 대통령 후보 TV 토론은 1960년 민주당의 존 F. 케네디와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의 토론이다. 4차례에 걸쳐 TV 토론이 진행되었고, 신문기자들이 패널로 참가했다. TV 토론 당일까지도 상당수의 유권자들은 케네디가 젊고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게 없을 정도로 그의 지명도가 낮았다. 하지만, TV 토론은 대통령 선거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라디오로 토론을 들은 유권자들은 닉슨이 비교적 무난했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TV 토론을 시청한 유권자들은 두 후보에 관해 전에 알았던 것 그 이상을 알게 되었다. 1960년 당시는 미국 가정의 TV 보급률이 90%에 육박했던 시기로, TV 토론은 케네디를 슈퍼스타로 만든 반면, 닉슨을 패자(loser)로 만들어 버렸다.

케네디의 승인(勝因)은 철저한 준비에 있었다. 케네디는 프로듀서와의 사전 제작회의에 직접 참석했다. 그리고, 스튜디오 배경을 고려해 검은색 정장과 파란색 셔츠를 골라 입고, 앉았을 때 발목의 피부가 보이지 않도록 긴 양말을 신는 등 치밀한 준비를 했다. 그에 비해 닉슨은 사전 제작회의에 불참했고, 얼굴이 보다 밝게 보이도록 조명등 아래 앉으라는 조언을 무시하는 등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TV 토론은 누가 주관하나?

1960년 대선 후보 TV 토론은 4회에 걸쳐 ‘CBS’, ‘NBC’, ‘ABC’가 주관했다. 1964년, 1968년, 1972년에는 토론에 소극적이었던 후보의 불참으로 인해 개최되지 못했다. 그리고, 1976년, 1980년, 1984년까지 3차례의 TV 토론은 '여성유권자연맹(League of Women Voters)'이 주관했다.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이 합의한 토론 조건이 토론의 기본정신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여성유권자연맹이 TV 토론 주최를 거부하면서 TV 방송사나 정당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공적 권위가 보장되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1987년 비영리 민간기구인 '대통령토론위원회(Commission on the Presidential Debate: CPD)'가 발족되었고, 현재까지 모든 TV 토론을 주관하고 있다. CPD는 회장을 비롯해 이사진 10명과 50명의 자문위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TV 토론의 진행방식은?

TV 토론은 90분 동안 3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1차 토론은 스탠딩 형식이고, 2차 토론은 50-70명의 유권자들이 참가해서 후보자들에게 직접 질문하는 타운홀(town hall) 미팅 방식이다. 마지막 3차 토론은 두 후보자가 45도 각도로 테이블에 앉아서 진행하는 방식이다. 2020년 대선에서는 2차례만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CPD가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에 감염되었음을 감안해서 2차 TV 토론을 화상으로 개최하려 했으나, 자신은 전염성이 없다면서 토론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1988년부터는 한 명의 사회자가 진행과 질문을 모두 맡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패널리스트가 국민의 관심사를 대변하기보다 공명심을 앞세워 돌발적인 내용을 질문하는 경향이 있음을 감안해서 토론의 사회자는 언론인이 맡는 것이 관례이다.

# TV토론 참여 자격

TV 토론 참여 자격은 의외로 엄격하다. 3가지 요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헌법 상 대통령의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둘째, 산술적으로 270명 이상의 선거인단을 확보할 수 있는 만큼의 지역에서 후보 등록을 마쳐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CPD가 선정한 다섯 개 여론조사 기관이 실시한 전국 여론조사에서 평균 지지율이 15% 이상이어야 한다.

양당제가 고착화된 미국에서 공화당과 민주당 후보를 제외하고는 두 번째(선거인단 270명)와 세 번째(지지율 15%) 자격을 동시에 충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까지 이 조건을 충족하고 TV 토론에 참여한 제3의 후보는 1992년 대선에서 로스 페로가 유일하다. 텍사스에 기반을 둔 로스 페로는 공화당의 조지 H.W. 부시 당시 대통령과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 사이에서 18.9%를 득표하며 무소속 돌풍을 일으켰다.

 

※이 원고는 저자의 저서 '미드보다 재미있는 미국 대선이야기'를 참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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