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57] 흥남동‧삼학동 주변 기억물…‘영화배우 故 남춘역’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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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57] 흥남동‧삼학동 주변 기억물…‘영화배우 故 남춘역’ 아시나요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02.04 10:44
  • 기사수정 2022-02-04 1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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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동: 1954년 7월 동‧ 서흥남동 분리… 1963년 합병→ 2008년 통합(중미동 흡수)
2008년 2월 오룡동+ 삼학동의 통합 ‘삼학동’ 탄생 … 모시공원의 전설도 스토리텔링 소재
서해대의 아픈 역사… 군산전문학교→ 군산실업전문대→ 고등교육법 위반 폐교
삼학동
삼학동

 

군산의 고지도엔 본래 흥남동이나 삼학동이란 지명이나 유사한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 동의 명칭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 등의 시기에 만들어진 지역이란 것이 정설일 뿐 그 이전의 명칭과 관련한 자료는 전무하다.

그동안의 ‘군산을 걷다~’ 시리즈의 방향을 고려, 흥남동에서 삼학동 방향으로 발을 옮기면 주민센터는 물론 적십자 평생대학, 모시공원, 폐교된 서해대, 평화중‧ 고, 성신병원 등으로 향한다.

이들 동과 관련된 주변의 기관과 인물 등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면 흥미로운 것들도 적지 않다.

# 흥남동과 삼학동의 탄생

흥남동의 역사는 오늘의 청사처럼 웅장하지 않았고 수많은 행정동 통합을 반복하며 만들어진 동이다.

흥남동은 조선시대엔 옥구현 북면이었다가 1910년 군산부로 편입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후 군산부의 북면 둔율리, 발산리, 오룡리 등이 병합돼 옥구군 미면 둔율리로 편제됐다.

1940년 10월엔 군산부에 편입, 남둔율정이란 이름으로 있다가 1954년 7월 동흥남동과 서흥남동으로 분리됐다.

1963년 6월 동흥남동과 서흥남동을 통합돼 흥남동이 만들어졌고 2008년 중미동까지 흡수해 오늘에 이른다.

대한적십자사 전라북도지사 군산봉사관. / 사진=투데이군산
대한적십자사 전라북도지사 군산봉사관. / 사진=투데이군산

 

흥남동에서 눈길을 끄는 곳 중 하나가 대한적십자사 전라북도지사 군산봉사관(군산적십자평생대학).

대한적십자사 봉사회 전북지사협의회는 1968년 2월부터 군산·익산·남원·정읍 등 4개 지역에 봉사관을 개관해 운영하고 있으며, 군산봉사관은 2013년 1월 새로 준공,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사회 군산지구협의회는 1995년 9월 20일 군산적십자 평생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이 평생대학은 어르신들에게 알 권리 충족과 여가 생활을 위한 쉼터 역할은 물론 교양강좌, 노래교실, 무용교실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인근 삼학동의 통‧ 폐합 흐름도 흥남동과 유사한 흐름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삼학동은 2008년 2월 4일 오룡동과 삼학동이 통합하여 만들어진 행정동.

일제강점기에는 군산부 남정동으로 불려오다가 1949년 8월 15일 군산시(행정구역 개편: 府→市) 남정동으로 개칭되었고, 한국전쟁 중인 1952년 7월 14일 인접한 경원동, 남산동, 도원동 등을 합병해 최종 삼학동으로 개칭했다.

2008년 오룡동을 흡수해 오늘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청사는 2012년 4월 준공,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학동에서 유명한 곳은 아무래도 모시공원.

옛날 모시산은 조선시대에 서울로 보내는 각종 진상품 중 하나인 모시와 삼베 등을 바람에 말리는 곳이었다.

해변과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염기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이곳은 선조들에게도 당시로선 엄청난 정성이 필요한 진상품을 관리하는데 안성맞춤인 공간이었으리라.

해발 수십m 높이의 모시산 주변에 말뚝을 박은 뒤 수많은 모시나 삼베를 건조했단다. 이런 모양새를 한 이곳은 바다쪽에서 볼 때 바닷바람에 어우러져 너울거리는 삼베와 모시의 모습이 마치 ‘수천 마리의 학과 같다’고 해 ‘삼학’이라 명명했단다.

이곳은 1970년대 구획정리 사업으로 주택 밀집 지역으로 개발됐고 대학로변(평지대), 도시미정비 지역(고지대)을 형성했다. 그 후 삼학동 고지대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시행하여 아파트가 들어서 아파트단지와 노후 주택단지 등이 뒤섞여 있다.

이곳을 다루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사가 있는데 흥남동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고향에서 완전히 잊혀진 배우이자 가수였던 남춘역이다.

# 고향에서 잊혀진 ‘영화배우 남춘역’…

#당대 최고의 작곡가 반야월‧ 연극인 이해랑 선생 등과 인연

평생 무명가수이자 무명 배우였던 남춘역(南春驛: 1923~ 63))의 본명은 이종모다.

1923년 흥남동과 선양동의 움막집에서 가난 속에 성장했다.

식민지 백성이자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가수가 되기 위한 그의 몸부림은 처절했다.

남춘역의 가수 인생은 시작부터 시련 연속이었다.

1941년 5월 서울 제일극장(훗날 한일극장)에서 열린 총결선에서 1등으로 레코드 예술상을 차지했다. 전국 1등상을 들고 군산에 내려오니 와병 중이던 어머니가 숨을 거뒀고. 아버지는 멸시했다. 남춘역은 아버지의 홀대 속에 고향을 찾은 떠돌이악단을 따라 상경했다.

이후 극단 황금좌에 가수로 정식 입단했다.

정식가수가 된 이종모는 일본으로 건너가 첫 데뷔곡인 이재호 작곡 <그림자 고향> <왕모래 선창>을 취입한다.

가수로 데뷔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당시 최고의 가수 진방남(=반야월 등 다수의 예명: 본명 박창오)씨가 이종모에게 ‘남춘역’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이후 기록이 없고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일찍 흥행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황금좌 이외에도 약초악극단, 대중극회, 상록극회 등을 거치며 배우로서 무대생활을 시작했다.

민경식 감독의 태양의 거리(1952)를 통해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1952년부터 1963년까지 단역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노역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주로 뱃사공, 웨이터, 내시 등 단역을 전전해야 했다.

하지만 연기의 꿈은 버릴 수 없어 이해랑, 김승호 등 당대의 연극인들과 함께 ‘극단 신협’에서 활동했다.

당대의 유명 연극인이자 영화배우였던 이해랑(1916~ 1989: 연극배우, 연극연출가, 영화감독, 대학교수, 정치가)은 그의 연기 스승이었다.

동아일보(1963년 8월 24일 자)에 영화배우 남춘역씨가 요독증과 기관지천식으로 성모병원에 입원 치료 중 그날 오전 11시 50분경 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세상을 뜨기 1년 전 극단 신협 재기공연 <갈매기떼>에 19세 소년역으로 출연하는 등 열정이 대단했다.

그는 <울고 간 사랑 5백 리> <상해의 밤> <구두닦이> <다시는 놓지 않으련다> <청춘 12열차> <두만강아 잘 있거라> <초립동> <어느 여대생의 고백> <현해탄은 알고 있다> <마부> <지게꾼> 등 총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사망 전 촬영을 끝낸 10여 편의 영화가 사후에도 하나씩 개봉되어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악극단 출신 영화배우로 불우한 환경에서 도전과 실패를 거듭했고, 무명가수로 조연배우로 연예인 생활을 마감했지만, 이름 없는 명배우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사후 1963년 12월 제1회 청룡영화제에서 특별연기상을 수상했고 1964년 3월에는 부산일보가 주관하는 제7회 부일영화상에서는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조종안 기자 보도 등 다수 참조>

한편 아빠의 청춘(1964)· 소양강 처녀(1968)처럼 지금까지 애창되는 수많은 노래의 가사를 반야월이 썼다.

경남 마산 출신인 그는 3,000여 곡의 노랫말을 쓴 작사가로, 그리고 100여 곡을 부른 가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추미림‧ 고향초 등의 필명으로 허생원· 마도로스 박 등 10여 편의 극본을 쓴 극작가이기도 하다. 1991년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서울 미아리와 충북 제천(1998년: 울고 넘는 박달재) 등 전국 10여 곳에 그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서해대
서해대

 

# 서해대의 개교와 아쉬운 폐교 역사

오룡동 소재 서해대는 1974년 3월에 개교한 군산전문학교의 후신이다. 1979년 1월에 군산실업전문대학으로 승격되었고, 이후 여러 학과를 신설하여 학교를 키워왔다. 2013년에 지금의 교명인 서해대학교로 개칭했다.

1977년의 교육법 개정으로 전문학교가 전문대학으로 개칭됨에 따라 1979년 1월에 군산실업전문대학으로 승격, 1983년 2월에 부속유치원 설립이 인가됐다. 이후 여러 학과를 신설하는 등 교세가 확장하여 1993년 3월에 군산전문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이 시기에 교육정보학부(유아교육과, 원예조경산업과, 스마트자동차과), 문화예술학부(연기뮤지컬과, 뷰티케어과, 실용음악과, 음악과), 보건학부(방사선과, 보건행정과, 임상병리과, 외식조리산업과), 복지학부(사회복지과, 스포츠복지과, 아동복지과), 휴먼서비스학부(스포츠과학계열, 부동산과, 세무·물류과, 관광레저과) 등 총 17개 학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기관으로 학술정보원, 평생교육원, 부속유치원과 어린이집, 국제교류협력단 등까지 운영할 정도였다.

1998년 5월에 서해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한 뒤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는 듯했다.

서해대학은 전성기 시절 다양한 학과로 작지만 튼튼한 재정여력을 갖춘 강소대학이었다.

2000년 1월에 일본 세이토쿠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은 후 2001년 6월에는 학교법인명을 호남기독교학원에서 군산기독학원으로 바꾸고 설립인가를 받았다.

선교사들이 남긴 학교재산을 놓고 오랜 재판 끝에 승소, 새로운 재단을 만들어 운영했다.

새로운 재단이 운영하던 이 대학의 아킬레스건은 그동안 수익용 기본재산 미확보 및 정관변경 미이행 문제였다.

이런 문제에도 제법 순항하는 듯 했다.

2009년 3월에 미국 타코마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었으며, 이후에도 해외 각국 대학과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자매결연 및 국제교류 협정을 체결했다.

2013년에 서해대로 교명을 변경했고, 2018년 새로운 총장 취임과 함께 재기를 모색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교 채용비리와 재단 이사장 횡령 및 구속 등의 잇단 비리와 운영상 문제 등으로 이어졌다. 그야말로 회생 불능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에 교육부는 서해대가 교육의 질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학 운영이 한계에 도달했는데도, 재정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지 못했다고 보고 학교 폐쇄를 결정했다.

이때가 2021년 2월 28일이었다. 개교 50년을 2년 남긴 시점이었다.

한편 삼학동 소재 군산평화중‧고는 군산시 오룡로 9에 있는 학력인정고등학교다.

이 학교는 2000년 청학야학교를 시작으로, 2003년 군산YWCA가 위탁 운영해 온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로 2011년 이사회 측이 폐쇄인가 결정을 낸 바 있다.

한국YWCA연합회 후원회는 학교 운영 정상화 방안에 따라 2012년 5월 18일부터 공개모집공고에 나선 결과 유일하게 제안서를 제출한 ‘재단법인 호원’을 학교 운영 주체로 최종 선정했다. 재단법인 호원이 2012년 10월 법인 지위 승계를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학교는 그동안 중학교의 경우 제19회까지 졸업생 763명, 고등학교의 경우 제16회까지 졸업생 849명 등 총 1,612명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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