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54] 경성고무의 흥망… 근대기 유명 기업인 고(故) 이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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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54] 경성고무의 흥망… 근대기 유명 기업인 고(故) 이만수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01.10 14:36
  • 기사수정 2022-01-17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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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표’ 고무신으로 전국적 기업 반열 우뚝 … 한국인 운영 고무신공장 설립
‘1930~ 해방까지’ 중흥기- ‘한국전쟁~ 1960년대’ 시련기- ‘70 ~ 90년’ 쇠퇴기
일제강점기 시절 지역대표기업인 ‘친일논란’ 옥에 티

 

한때 군산역과 인접한 장미동 인근에 위치했던 굴지의 기업이 있었다.

이 회사가 옛 경성고무.

근대와 현대 시기의 경성고무는 군산 근대화의 상징물과 같은 회사였지만 안타깝게 오늘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엄청난 회사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족적을 남겼으나 근대역사박물관과 일부 기억에만 존재하는 전북경제에서 군산 선도시대를 연 최고 기업이었다.

옛 경성고무가 위치했던 장재동 인근에 현대세솔아파트가 서 있다. / 사진= 투데이 군산
옛 경성고무가 위치했던 장재동 인근에 현대세솔아파트가 서 있다. / 사진= 투데이 군산

 

고무신 하나로 전국적인 기업으로 성장, 약 60년 동안 지역과 애환을 같이한 대표적인 향토기업이었다.

고무 신발산업으로 성장, 60‧ 70년대 지역경제발전과 수출 역군으로 엄청난 기여했을 뿐 아니라 한국야구사에 기념비적인 역할을 했던 스포츠 후원 회사이기도 했다.

회사가 사라진 공간에는 향토주택건설업체가 건축한 현대세솔아파트가 우뚝 서 있다.

하지만 시가 미원동의 한 공원에 고무신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조형물을 설치, 그 시절을 회상하는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조형물이 군산 미원광장에 있는 ‘검정 고무신 조형물’이다.

이 조형물은 흥남동 소규모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옛 미원동에 있었던 경성고무의 ‘만월표’ 고무신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이는 과거 고무신을 만들었던 노동자와 고무신을 신고 야구 연습을 해온 남초등학교 야구부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것.

미원공원의 한 켠에는 야구 홈베이스 위에 3.5m 높이로 형성화된 검정 고무신 한 켤레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우리나라 고무신의 등장 역사

일본 고무신공장은 1886년에 처음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고무신 공장은 고베지방에 많이 설립됐는데, 고베상인들이 1916년 고무신을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였다.

그동안 당혜(唐鞋: 가죽신), 나막신, 짚신을 신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빗물이 새지 않는 고무신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에 고무공장이 들어선 것은 1919년으로 전해진다. 또 우리나라 첫 고무신은 조선 말 외무대신을 지낸 이하영(친일파)이 서울 청파동에 세운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에서 1922년 8월5일 생산한 ‘대장군표’ 고무신이 바로 그것.

순종 황제는 이 대장군표 고무신을 처음 신었던 사람으로 기록됐다.

대륙고무공업사 설립을 전후해 서울 중림동에 반도고무공업소, 평양에 정창고무공장이 잇따라 설립됐다.

1921년 4개에 불과했던 고무공장은 1933년 72개로 늘어났다.

# 한국인 운영 ‘경성고무’ 설립… 장재동 경제중심시대 개막

군산에 고무신이 언제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20년대 초반에는 대중화를 위한 준비단계였을 것이다.

1924년 군산에도 일본인이 운영하던 고무신공장이 있었고 이때 경성고무의 창업자 이만수 사장은 고무신 소매업을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군산에 고무신공장 진출이 빨랐던 것은 당시 경제가 발달한 군산항을 통해 일본 오사카, 고베지방과 교역이 활발했던데 따른 것이다.

이만수 사장은 처음 소매로 시작했던 고무신 사업을 착실히 성장시켜 도매업까지 손을 댔다. 당시 고무신 인기가 높은 생활필수품이었기 때문에 순풍에 돛을 달았다.

그는 이 시기에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고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이런 활동으로 1930년 군산상공회의소 선거에서 상의원에 선출됐고 한국인으로서 군산상의 최초였다. 그 후 부회두(부회장)까지 선출됐다.

고베에서 온 일본인 고무신공장이 매물로 나오자 이를 놓치지 않고 인수, 경성고무공업사를 1932년 11월 설립했다.

이는 일제 독점자본이 대부분 차지하던 사업 분야에 진출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 기업가에 의해 설립된 유일한 기업이기도 했다.

군산시 장재동에 자리잡은 경성고무공업사는 당시 임직원이 100여명이었다.

이 시기에 시인 김광균이 군산의 경성고무에 입사해 근무, 당시의 시대상과 도시 등의 상황을 노래하는 시를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서울 이북에서는 삼천리표 고무신이 인기였지만 한강 이남의 고무신은 경성고무의 ‘만월표’가 최고였다.

이때 주 생산품은 '깜둥이 신발'로 알려진 검정 고무신이었다.

검정 고무신은 주로 짚새기를 신고 다니던 당시 사람들에게 대단한 제품이었고, 그 인기는 시들 줄 몰랐다. 경성고무는 점차 기술 수준을 높여 제품을 다양화해 나갔는데, 나중에는 표백기술을 적용해 흰고무신을 생산했고, 검정 운동화에 이어 하얀 운동화까지 생산했다.

경성고무공업사는 해방 직전까지 4가지 제품을 생산, 전국에 공급했고 당시 1일 생산량은 일제강점기 당시 500족 정도였다.

60년대 들어서는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3만족에 달했단다.

이렇게 생산제품이 하늘색 등 ‘색’ 고무신을 출시했고 꽃무늬 고무신, 농구화, 실내화, 슬리퍼 등 다양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운동화를 만들면서부터는 경성고무공업사 공장 한켠에 방직공장도 뒀다.

실을 사다가 방직공장에서 운동화용 천을 직접 만들었고, 여성 근로자들이 재봉틀 등을 이용해 운동화 어퍼(Upper: 甲皮)를 제작했다.

또 롤러 등 고무신 생산라인의 기계가 고장 날 경우 공장 내 기술자들이 필요 부품을 제작하는 등 직접 수리에 나섰기 때문에 공장시설 내 철공소도 운영했다. 즉, 고무신공장 내에 방직공장, 미싱부, 철공소까지 둔 셈이다.

게다가 신발 크기와 모양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금형(Mold)도 수십 종류에 달했다. 금형은 신발공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이기 때문에 디자인 전문가를 두고 금형을 떴다.

고무신 공장은 초창기는 물론 지금까지도 제작 공정상 노동집약적이다.

실제로 전성기에 하루 3만 족 이상을 생산한 경성고무의 직원이 무려 3,000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2,500여명이 여성이었다. 고무판을 생산하는 롤러부를 비롯해 남자들이 근무하는 부서는 주야간으로 계속 일해야 밀려드는 일감을 댈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 근로자들은 낮에만 근무했다.

장재동에 있었던 옛 경성고무 공장 전경. / 사진= 군산시제공
장재동에 있었던 옛 경성고무 공장 전경. / 사진= 군산시제공

하지만 엄청난 성장을 시샘이라도 하듯 시대 상황이 변하면서 엄청난 시련기를 맞아야 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지역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신발공장들이 생겨났고, 일제강점기 이래 전성기를 구가하던 경성고무는 큰 도전에 직면했다.

창업주 이만수 사장의 아들 용일은 1957년 경성고무 전무로 취임, 경영일선에 나섰다.

부친인 창업주 이만수 사장이 1964년 별세한 후 경성고무를 총괄했고 방직공장까지 운영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또 목포와 전주 등지에도 분공장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사세를 키웠단다.

앞서 한국전쟁은 경성고무에게는 혹독했다.

부산지역의 경우 일본의 영향을 받아 많은 신발공장들이 생겨났고 그 회사들이 성장하면서 위기를 맞게 됐다. 즉 신발 생산기지로서의 지위를 부산에 넘겨주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전시수요 때문에 지리적으로 인접한 일본으로부터 신발 관련 자재 수입이 많아 70년대를 넘어서 80년대 초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두 차례의 큰 화재(1970년3월 2억원 피해와 74년 4월 4억원 피해)로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경영난 직면하자 선경(지금의 SK그룹 전신)이 76년 11월 경성고무 경영에 ‘50대 50대’의 지분으로 참여했다.

1979년 선경그룹과 합자 경영에 들어가면서 이용일 사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났고, 회사는 1983년 선경에 완전 매각했다.

본사는 운수업 등지로 전환됐지만 그룹 내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해 1998년부터 SK창고에 합병되어 65년만에 소멸되는 아픔을 겪었다.

1990년 8월 (주)경성고무는 노조측에 회사경영권을 넘겨야 했고 얼마 안돼 사실상 문을 닫게 됐다.

이후 여기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가 선화란 이름으로 중국에 진출, 성공 신화를 쓰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한편 군산시 장재동 3만3,000㎡(1만여평)의 부지에 자리잡았던 경성고무 신발공장 자리에 현대세솔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시인 김광균(1914~1993)과 경성고무

다음은 김광균의 대표작 중 하나인 와사등이다.

[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충,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와 아우성의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 김광균시인의 와사등(1939년)-

개성 출신 김광균은 송도상고를 졸업한 뒤 경성고무 사원으로 군산과 용산 등지에서 근무하고 그 이전 10대 초반부터 시단활동을 했다.

가신 누님(1926년)을 비롯 야경차 등이 그의 습작기 작품이다. 시인부락(1936년), 자오선(1937년) 동인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했고 조선일보 1938년 신춘문예에 응모, 당선되기도 했다.

이후 와사등(1939년), 기항지(1947년), 황혼가 등의 3권의 시집을 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실질적인 시작활동은 1952년 죽은 동생의 사업을 맡아 중단되고 실업인으로 변신, 국제상사중재위원회 한국위원회 감사, 무역협회 부회장, 한일경제협력특별위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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