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48] 옛 군산선 추억과 철도문화유산(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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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48] 옛 군산선 추억과 철도문화유산(下)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11.30 14:02
  • 기사수정 2022-01-17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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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군산~전주 통근열차(동차)… 70년대 이후 수십 간 추억 뚜렷
약 100년 군산선의 기록물… ‘일제 수탈’- ‘월남 이상재의 운구’ - ‘향학열’
역전새벽시장‧ 경암동 철길마을 등 군산철도의 유산들 관광객 손짓
군산역
군산역

 

옛 군산역과 그 역사(驛舍)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2007년 12월 말 군산~(익산)전주 간 통근열차가 중단됐고, 2010년 12월11일 도로망 확충을 위해 그나마 남았던 군산역사(驛舍)는 철거돼 도로로 변해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지만 이곳의 역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로 남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시민들 사이에 남아 있는 ‘옛날 역전’이라는 말과 함께 추억의 철도문화유산과 새벽시장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군산선의 100년 역사 중 가장 역사 속 명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군산선 개통 15년 만에 월남 이상재 선생의 운구가 서울과 익산 등을 거쳐 향리 서천군으로 향하던 마지막 철도 기착지였던 군산역과 도선장 등에 대한 기록이 아니었을까 싶다.

 

군산선 개통 후 최대사건… 월남 이상재 선생 철도 활용한 운구

지금은 상상이 안 되지만 과거 군산선과 장항선이 연결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기는 따로따로 운행돼 별도의 철도 노선으로 존재했었다.

수년 전 군산과 장항의 철도 연결은 기존 군산선 대신 익산~ 군산~ 장항~ 대천~ 광천~ 홍성~ 용산 등으로 이어지는 확장된 장항선으로 편입됐다.

철도개통 100년 역사 중 군산선은 수많은 인파를 수송했고 긴 세월 동안 군산과 애환을 같이했다.

그중 가장 역사적인 사건은 1920년 후반에 있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운구가 군산역에 도착했을 때다.

1927년 3월 한말 정치가요, 민족운동가였던 월남이 서거하자 서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사실상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향리(鄕里)까지 오는 길은 묘연했다.

당시로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서울에서 타계했던 월남의 운구를 고향 선영까지 이동하는 방안으로 철도를 이용하는 방안이 제기됐다.

그의 운구는 서울에서 호남선을 따라 이동했다가 익산(옛 이리)역에서 군산선으로 바꿔 타고 그의 고향인 충남 서천군 한산면까지 1,000리가 넘게 이동했다. 군산역에서 내려 도선장에서 장항까지 도선을 이용, 향리로 운구를 옮긴 당시 보도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내용에도 제법 나와 있다.

월남이 노환으로 사망한 이후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진행되었으며 장의위원회가 각계 인사들을 망라하여 조직됐다.

1927년 4월 7일 장례 후 운구가 서울에서 군산으로 향했다.

서울 재동 자택을 떠난 운구는 종로 중앙 기독 청년 회관으로 옮겨져 장례식을 치른 후 1927년 4월 8일 군산역에 도착했다.

이후 군산 지역 사회 단체와 청년 단체가 중심이 되어 조문을 낭독하였고, 영결식장이 설치된 군산 불이매립광장(不二埋立廣場)에 모셨다.

군산부의 개복동 군산 노동 연맹 회관에서 각 방면의 인사가 참여, 월남 선생 사회장 군산 장의소를 개복동에 설치했다. 항일투사였던 조용관(趙容寛:1885~1950) 위원장을 중심으로 장례를 진행했다.

군산 예배당의 학생들은 학생대를 조직하여 장의(葬儀) 행렬에 참가했다.

한편 월남 선생 사회장 군산장의소를 이끈 조용관은 누구인가.

조용관은 1885년 6월 29일 지금의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익산 지역의 3.1운동의 주동자로 구속되어 고문을 받고 한쪽 눈을 실명했다고 한다.

1920년 8월 군산노동공제회를 창립하였고, 1924년 군산노동연맹 대표로 활동하면서 조선노동총동맹의 창립 집행위원을 역임했다. 1925년 1월 군산민중운동자동맹 사건으로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 위반 혐의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군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감 후에도 노동운동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6년 10월 군산철도노동회 위원장, 1927년 3월에는 군산노동연맹회 회장에 선임됐다. 그해 5월에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에서 임시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관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930년 12월에는 조선공산당 전북도당을 결성한 혐의로 일경에 다시 검거되기도 했다.

당시 군산을 대표하는 항일운동가요, 투사였다. 그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3일 사망했다.

 

추억의 ‘군산~전주 통근열차’

 

1912년 개통 이후 군산과 익산, 전주를 이어주던 통근열차는 70년대 이전 석탄차에서 스팀차(일명 동차), 통일호 등으로 이어지는 ‘추억의 기차’였다.

이 열차는 일제강점기에는 호남평야 곡식이 일본으로 수탈되는 현장을 지켜봐야 했고 해방 이후 여객과 화물을 운송하는 서민들의 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군산선과 전라선을 부지런히 오가던 이 열차는 모두 3량 또는 4량, 정원 100~ 150명에도 못 미치는 ‘미니 기차’였다.

이중 화물칸이 1량이었는데 그 반 칸은 군산 앞바다의 수산물을 전주와 도내 다른 내륙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했고 나머지는 사람들이 탔던 열차였다. 이 화물칸에 타면 생선 냄새로 온통 진동했고 지금처럼 마트가 제대로 없었던 시절에는 아주머니들의 행상 물결이 도내 전역을 누볐단다.

전주에서 군산까지 1시간가량 달리면 군산역에 도착, 군산지역 관공서 등에 다니던 사람들의 통근열차였고 다수의 학생들의 통학수단이기도 했다.

이 열차를 타고 다니던 주 승객들은 군산고와 남성고, 전주고 등 전통학교와 다른 학교들을 오가는 통학생들이었다. 이 통근열차는 개정역과 임피역, 대야역, 오산리역 등 간이역을 오가는 추억의 상징적 공간이었단다.

옛 개정역. / 사진=투데이군산
옛 개정역. / 사진=투데이군산

 

특히 간이역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임피역사는 1936년 건립돼 등록문화재 제208호로 올라 있고 지금은 무인역으로 바뀌어 역 마니아들이 찾는 관광명소로 바뀌진 오래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간이역들이 그러했듯 역무원이 근무했지만 이용객들이 급감하면서 무인역으로 바뀌었고 이중 가장 먼저 간이역으로 변했던 곳은 개정역이었다.

개정역은 생긴 것은 처음에는 구마모토 농장주의 힘에서 비롯된 곳이었지만 나중에 이곳에 근무하던 개정병원 종사자들의 출퇴근을 위한 역이기도 했다.

군산과 익산, 전주를 정기적으로 출퇴근하는 학생들을 위해 값이 싼 정기승차권제도가 만들어져 활용됐고 일부는 직장인들을 위한 것도 있었단다.

일부 학생들은 용돈을 조기에 다 쓰는 바람에 무임승차를 하면서 다니는 사례도 있어 역무원(또는 차장)들이 이를 막기 위해 눈을 번득이면서 지켜보곤 했다.

군산경제권에 있었던 촌로와 아주머니들은 자신들의 농산물이나 특작물을 팔기 위해 새벽열차를 타고 와서 군산역 주변에 좌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것이 나중에 군산새벽시장의 시원이자, 촉매제로 작용했다. 이 통근열차도 철도 노선 이전으로 중단됐다.

 

역전새벽시장과 무료경로식당

역전새벽시장의 정확한 유래와 명칭은 오래전부터 옛 군산역 주변에 자연스럽게 형성됐던 새벽시간대에 열린 시장이다.

이 새벽시장은 2008년 1월 군산역사 및 화물역 이전하기 전까지 대야와 임피면 등지에서 무· 배추 등 각종 채소류를 재배한 농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시장은 새벽 5시 전후 열려 오전 8시30분 전후면 어김없이 문을 닫은 시장이어서 인근전통시장과도 성격이 전혀 다른 시장이다. 이 때문에 아침 일정시간대만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명 ‘도깨비(또는 번개)시장’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곳을 이용하는 시장 상인과 직접 생산 판매까지 하는 농민들만도 하루 5~ 8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산지역 내는 물론 장항 등 서천지역에서 신선한 채소류를 필요로 하는 음식점 등을 운영하는 업주들이 빈번하게 이용하고 있고 각종 생선을 소매하는 상인들까지 가세하면서 구암 3.1로와 대명2길 등 옛 군산역 주변은 매일 이른 아침시간에 북새통을 이룬다.

추석 등 명절이면 평소보다 이용객들이 크게 늘어 수천 명에 달하는 서민 시장으로 입지를 확고히 했다.

하지만 이곳의 자연발생적인 시장 기능이 그동안 여러 차례 중단위기를 맞기도 했단다.

과거 군산선을 이용하던 철도고객들이 군산역 이전으로 크게 위축될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다.

게다가 철도 기능이 상실돼 도로 개설 여론이 불면서 수년 전 대명동과 중동 등을 연결하는 구암3.1로가 연장, 옛 군산역 앞에 장사진을 이뤘던 상인들의 좌판 공간이 없어져 끊임없는 시장 이전 압박과 폐장 위기를 맞기도 했다.

실제로 이 도로의 개설은 인근을 오가는 운전자들에게는 많은 불편을 해소했으나 상인들에게는 좌판을 놓을 공간이 사라지면서 대명2길 주변으로 확대되면서 교통체증의 주범이자 주변 상인들에겐 고질 민원거리였다.

주변 전통상가와 이 시장은 경쟁관계여서 이전설을 제기하는 직접적인 민원의 근원지였고 인근 주민들에겐 교통 불편과 혼잡의 대명사였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장터 마련을 계획하기도 했다.

시는 옛 역전의 새벽시장을 다른 자리로 옮기는 문제를 적극 검토한 끝에 군산의 명물로 육성하는 방안을 확정했지만 수년 째 별다른 진전 없이 영업 중이다.

이밖에 군산역과 그 주변을 얘기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공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옛 군산역 인근에 있었던 무료경로식당.

역전 무료경로식당은 IMF 전후에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점심을 먹지 못한 노인들과 실직자들이 급증해 파생된 사회적 산물이었다.

시가 지원하고 자원봉사자들이 나서 이들 대상자들에게 무료 급식하는 공간이었지만 이곳은 처음에는 허름한 시설에서 출발, 최근이 되어서야 새로 단장했다.

1996년 7월 대명동 당시 군산역 앞에 이 식당은 불우노인이나 실직자 등에게 무료점심봉사라는 명목으로 시작됐다.

이곳을 찾은 노인 등은 하루 평균 200여 명에 달하고 봉사자 및 봉사단체는 지역 내 종교단체를 비롯한 대기업 봉사단체, 자원봉사자, 법원 및 검찰 산하단체, 학생, 시청 공무원 등이다.

 

경암동 철길마을과 페이퍼코리아선… 관광자원으로 우뚝

옛 군산역(군산화물역)에서 페이퍼코리아(구 세풍제지) 공장까지를 잇는 약 2km의 전용선으로 정식 명칭은 ‘페이퍼코리아선’이다. 일명 세풍제지(고려제지)선이라 불렸다.

경암동 주택가를 지나가는 부분이 선로와 주변 주택이 대단히 가까이 붙어 있어 영화와 화보 촬영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때문에 이곳을 찾는 마니아들까지 등장, 지금도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선은 2008년 6월까지 열차가 운행됐으며 폐지된 후에도 관광자원으로 각광을 받아 선로는 존치되어 있다. 폐기관차까지 배치돼 군산의 핵심관광지로 자리잡고 있다.

한편 옥구상평선 또는 비행장선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폐선단계에 있지만 철로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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