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40] 선조들의 상권 수호의 현장 '구시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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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40] 선조들의 상권 수호의 현장 '구시장로'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10.05 17:55
  • 기사수정 2022-01-17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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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후 탄생한 전통 5일장 ‘군산장’ 소멸… 일제의 상권장악 등 원인
일제 ‘시장규칙’ 의 산물인 상설시장에 맞서 조선인 노점상들 저항
해방후 명산시장‧ 양키시장‧ 역전종합시장 등 새롭게 문 열어

장재동에서 장미동까지 옛 중심도로가 구시장로다.

구시장로는 일제강점기 때 월명동 및 영화동 등 중심권과 교통 등을 연결하는 핵심도로 중 하나였다. 이른바 원도심 상권의 대동맥 역할을 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구시장로는 싸전길과 약전길 등 자연스럽게 옛 시장통을 흡수한 도로였고 이 도로를 따라 공설시장(신금길)과 신영시장(동신영길), 양키시장, 역전종합시장(대명3길) 등을 품고 있는 근‧ 현대기 군산의 유통중심지였다.

구시장로처럼 전통시장들도 거의 이어졌다 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어 그 시장 탄생 유래와 배경만 다를 뿐 시민들의 마음속에는 전통시장이자 거의 같은 구시장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신영시장 뒷 골목길. / 사진=투데이군산
신영시장 뒷 골목길. / 사진=투데이군산

 

# 市場의 고장 ‘군산’… 전통시장 숫자면에서 전국 최고

군산은 다른 지역과 달리 시장(市場)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노점상 집합형태인 시장과 상설형 전통시장 등이 혼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100년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독특한 곳이기도 하다.

군산의 대부분 읍면의 5일장들이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장을 열었던 오랜 역사를 자랑한 반면 오늘날 원도심권의 시장의 중시조격은 아무래도 개항 후 설립된 ‘군산장(場)’이라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군산장의 성립 배경은 군산개항 후 급격한 인구증가와 함께 당시 중앙로와 둔율동, 신흥동, 영화동 등의 급격한 도심 팽창 등 때문에 이전에 장이 섰던 경장동과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 좀더 가까운 곳에 장이 서야 하는 당위성 때문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른바 상권의 변화상 불가피한 결과물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일제강점기의 집요하고 교활한 상권 장악 야욕과 교통수단의 대변화가 결정타였다 하겠다.

일제강점기로 들어서면서 1912년 군산에 철도가 개통된 후 기차가 정차하는 철도역 주변의 교통의 편리함때문에 오늘날의 구시장로 인접지역과 군산역 앞 광장에 5일장이 자연스럽게 섰을 것은 분명하다.

일제는 이를 통제하고 상권 장악을 위해 공설시장 등을 만들었고 이에 맞서 5일장 등과 같은 유사한 기능을 한 시장 형태의 등장은 지극히 필연적이었다 할 수 있다.

군산은 이런 역사적인 흐름인지 몰라도 개항장인 군산장이 오늘날 시장의 시원이라 할 수 있지만 도시규모와 달리 전통시장의 수가 유독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도로 명칭조차 구시장로란 도로가 생겨날 정도이고 시장들간 다른 이름을 하고 있지만 거의 하나 강물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특징도 있다.

오늘날도 이런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그 사례가 오래전 시작된 옛 군산역 주변의 새벽시장이다.

시장의 탄생 자체가 자연발생적이어서 그런가.

일명 번개시장도 중앙로와 구시장로, 대명1‧ 2길 등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면서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양상이다.

# 개항장 군산장의 후예들… 日帝의 공설시장과 ‘구시장(신영동시장)’ 등의 경쟁

군산장은 1일과 6일에 장이 서는 5일장이었으며 우(牛)시장이 서는 매우 큰 시장이었다. 이 장이 생긴 후 경장시장이 그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다.

일제는 상권 장악을 위해 관련 법령 제정과 함께 1918년 장재동(현 대명동)에 상설시장을 개설했다.

그러나 식민지하의 한국인들은 5일장에 익숙한 나머지 처음엔 군산장만 이용하고 장재동의 시장을 이용하지 않았다.

이에 일제와 일본인들은 장재동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군산역 앞의 군산장을 단속하자 현재의 미원동 구 미원파출소 인근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지속적으로 5일장을 유지하는 끈질긴 저항을 보여줬다.

이 시장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구시장’이라는 명칭의 근원이자, 조선 민초들의 저항의 산물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구시장로’의 명칭 기원이기도 하다.

# 신영시장의 무한 변신… 친환경 공동덕장까지 갖춰

신영시장 앞 전경. / 사진=투데이군산
신영시장 앞 전경. / 사진=투데이군산

흔히 신영시장이라 일컫는 구시장의 명칭 연원은 다시 요약하자면 이렇다. 물론 군산토박이들은 시장들의 이름을 잘알면서도 공설시장과 혼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군산장이 미원동으로 옮겨진 후 사람들이 미원동의 군산장을 ‘새장터’라고 부르고 신영(동)시장 자리는 옛 시장이 있었던 자리라 하여 ‘구시장’이라 불렀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지만 미원동 신시장은 가축장이 서기는 하였으나 옛 시장만큼 활성화가 안되는 상태로 유지되었는데 그나마 장이 유지됐던 이유는 새장터 인근에 흥남동 도축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29년 그 전부터 활성화가 안 되던 장재동의 시장 부근에 자리 잡고 있던 조선인 노점상들이 단합, 상가를 열고 주변에 가축시장을 두어 매일 장을 열자 오일장인 군산장은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상황을 맞았다.

여기에다 상설시장 등과의 힘겨운 경쟁은 더욱 사활조차 힘들게 했다.

군산의 경우 개항이 된 후에도 지경장과 임피장, 옥구장, 군산장 등은 계속 열었으나 5일장은 조선인들이 주로 이용했고, 상설시장은 일본인들이 이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체적인 분위기가 5일장도 이용하지만 상설시장 이용빈도가 늘면서 어느 시기 들어서서 상황은 역전됐다.

1929년 대명동 주변 조선인 노점상들이 단합, 신영동에 상가시장을 여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신영시장(일명 구시장)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신영시장은 목조건물 2동과 점포 4칸의 규모로 주변에 가축시장을 두어 같이 사용했다.

이후 신영시장은 군산 최고의 시장으로 성장했으나 당시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돼 노천에 천막시장으로 운영되다가 1962년 개축됐다.

현재와 같은 시장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69년 슬래브 건물이 완공된 후 조금씩 시설 현대화로 변모를 거듭하고 있다. 최근에도 그렇다.

그 핵심은 신영시장 친환경 공동덕장의 준공이다.

이곳은 지난해 4월 전통시장 공동시설 구축 및 환경개선사업으로 추진했다가 최근 준공됐다.

일반철골조 2층 건물의 이 시설은 연면적 595㎡ 규모로 1층 사무실(고객지원센터)과 2층 공동건조장 등으로 이뤄졌다.

신영시장은 그동안 각 상점마다 직접 수산물을 손질해 판매하는 바람에 비릿한 생선 냄새로 진동, 고객들의 고충도 적지 않았다. 그야말로 학수고대해온 숙원사업이었다.

시장상인회와 소상공인지원과, 도시재생과 등은 당초 1층 건조장 계획을 확대해서 1층 공동작업장과 2층 건조장 건립안을 이끌어냈다.

한편 현 수협 죽성지점 자리에 있었던 군산청과물 시장은 일제강점기에는 부영시장이라 불렀고 이 시장은 수송동소재 군산원협 공판장으로 대부분 이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부 청과물가게 만 인근에 남아 그 유래를 가늠할 뿐이다.

# 해방 후 시장들

해방 후에도 군산의 상권은 폭발적인 모양새였다.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등으로 군산의 상황은 변화무쌍했다. 1.4 후퇴 때 피난 온 평안도 사람들이 본래 규모가 작은 시장이 있던 자리에 집단 이주, 미군들에게 얻어낸 군복을 주로 팔며 일구어낸 시장이 평화시장(양키시장)이다.

또 일제강점기 유곽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기 피난민들의 집단 수용소 역할을 하며 시장으로 모습을 바꾼 명산동시장(유곽시장), 역전종합시장(1965년 설립), 나운주공시장 등이 있었다.

역전종합시장의 내부. / 사진= 투데이군산
역전종합시장의 내부. / 사진= 투데이군산

 

또 대명동의 감독거리는 본래 완주와 고산 등지에서 생산되는 감을 들여다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파는 전문 감시장이 있었지만 80년대를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한국전쟁 이후 유흥업소가 한두 곳씩 자리잡기 시작하더니 1970년도 초에 어느 정도 모습을 갖췄고 1980년대 급격히 번창, 이곳의 명칭인 ‘감둑’이 속칭 윤락가를 의미하는 ‘감뚝’이라는 명칭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들 주변에서 2000년대 들어 두 차례의 윤락가 화재로 집단 참사가 일어나면서 사실상 옛 흔적은 사라졌다. 지금은 잔영만 경우 유지한 채 낡은 술집촌으로 변해 있다.

양키시장(일명 평화시장) 입구. / 사진=투데이군산
양키시장(일명 평화시장) 입구. / 사진=투데이군산

 

이곳에 주택가로 들어가면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데 특이한 시장이 나타난다. 이름조차 양키시장이다. 입구에는 양키시장의 유래를 설명하는 안내판도 있다.

미군과 동거하던 양색시와 부대를 출입할 수 있던 한국 군무원들이 풀어놓은 물건들이 거래됐다. 다양한 물건들이 시끌벅적하게 거래되면서 ‘도떼기시장’이라 불렀다. 단속반이 뜨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해서 ‘도깨비시장’이라고도 했다.

미군과 동거하던 양색시와 부대를 출입할 수 있던 한국 군무원들이 풀어놓은 물건들이 거래됐다.

다양한 물건들이 시끌벅적하게 거래되면서 ‘도떼기시장’이라 불렀다. 단속반이 뜨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해서 ‘도깨비시장’이라고도 했다.

더러 국제시장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일제보다는 미제(美製)가 많아 ‘양키시장’이라고 명명되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동두천 생연동, 인천 송현동, 군산 대명동, 대구 교동의 재래시장은 현지인들에게 지금도 양키시장이라 불리고 있다.

서울이나 부산 등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조어(造語)가 미국인을 의미하는 ‘양키’와 ‘시장’이 결합한 양키시장이다.

양키시장은 한국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엄청난 피난민과 지역민들이 군산 미군비행장 등의 PX(군대내 매점)에서 흘러나온 다양한 물품을 사고팔면서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에게 유명 옷이 등장하기 전에는 군산의 20대들은 이곳에서 군복을 입으면 떨어지지 않아 한번 사 입으면 딱이었다. 그 전통으로 어떤 이들은 이곳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거 한국군 부대가 옛 공설운동장과 중앙초등학교 자리에서 주둔하고 있어 다른 지역보다 더욱 활기 넘쳤고 항상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단다. 이곳 주변에서 옷 수선을 하거나 세탁하는 사람들까지 자리잡으면서 전문상가처럼 입지를 굳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20여개의 상점들이 있지만 한참 때에는 100여개에 달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이들은 길게 50년 이상, 짧게는 30년 동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키시장 공영주차장에서 작은 골목에 들어서면 (구)역전종합시장과도 연결되고 조금 가면 신영시장과 공설시장도 하나의 시장처럼 띠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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