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38] 근대군산의 경제 중심지…지역 전통시장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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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38] 근대군산의 경제 중심지…지역 전통시장의 뿌리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9.23 16:53
  • 기사수정 2022-01-17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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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장로(서독안경, 항도약국, 대창철물 등)‧ 평화로‧ 장미1길 ‘유통 실핏줄’
유통중심지 공설시장‧ 신영시장‧ 역전종합시장 등 시장들만 10여 곳에 달해
시내 곳곳의 재래시장 단지… 옛 도심 도로와 유기적 연결

장재동에서 장미동까지 옛 중심도로를 따라가는 대로가 구시장로다. 구시장로는 옛 역전 인근의 구암3.1길에 있는 전북약국에서 장재동의 가구거리를 지나는 죽성로와 맞닿은 약 900m 구간을 말한다.

때로 평화길과 장미1길 등과 마주하거나 겹쳐 있는 이 도로는 신영1길, 신금길, 싸전길, 큰샘길, 약전길, 대명길 등과 실핏줄처럼 이어져 유통 대동맥 역할을 했었단다. 이 길에는 온갖 가게와 판매시설 등이 즐비, 옛날 시장통을 연결하는 곳이다.

군산의 옛 골목시장과 주요 전통시장 등이 형성된 밀집된 중앙동 주변 주택가(공설시장 옥상에서 내려 본 주택가). / 사진= 투데이군산
군산의 옛 골목시장과 주요 전통시장 등이 형성된 밀집된 중앙동 주변 주택가(공설시장 옥상에서 내려 본 주택가). / 사진= 투데이군산

 

과거 100년 가까이 군산의 경제와 유통중심지 역할을 해온 구시장로의 주변의 경우 과거의 영광은 사라졌지만 시장으로서 위상은 여전하다.

작은 길들은 결국 군산의 주요 시장통과 연결되는 핵심 유통망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당연히 지역재래시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만큼 그 시장의 역사와 발자취를 다뤘다. 이 내용은 김중규의 ‘군산역사이야기’에서 참조했다.

◇ 5일장과 재래시장

5일마다 한 번씩 마을의 중심, 또는 시장의 중심부에서 열리는 시장을 보통 우리나라의 재래시장(전통시장)이라 한다. 시장 인근에 사는 농가들이 키운 병아리나 돼지, 송아지 등, 가축 등을 내다 팔기도 하고 배추, 고추, 무 등의 채소류나 산나물 등을 직접 들고 나와서 파는 곳이기도 하다.

5일마다 열리는 이 장마당은 이 골짜기, 저 동네 사람들이 한 번씩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면서 세상 소식을 듣는 유일한 소통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소비자들이 직접 생산자를 만나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옛날 옛적엔 이곳의 물건을 믿고 샀고 가격까지 저렴했단다. 그리고 장날이면 하루 동안 자신의 물건을 홍보하기 위한 각종 호객 행위 등으로 그야말로 구경거리와 먹을거리로 가득했다.

예를 들어 전국의 어느 5일장에서 만날 수 있는 흥겨운 가락처럼 자연히 오랜 세월을 통해 그 지역의 특색 있는 상품이나 특색 있는 놀이가 발달하여 자리를 잡게 된다. 그것이 그 고장의 문화로 정착하는 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5일장은 다른 어느 부족이나 민족보다 특별할 것은 없다. 자기가 생산한 물건으로 필요한 물건을 구하는 것이 자급자족을 위한 경제적 목적이었으므로, 날짜나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어느 민족이나 도시에서나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공통된 흐름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5일장이나, 재래시장이 다른 민족(도시)에게 없는 특별한 어떤 현상만은 아니다.

보통 시장은 5일마다 지역 구성원들이 특정한 날짜를 정하여 장터라고 하는 일정한 장소에서 만나 서로 물물교환하는 5일장이 기본이었단다. 인근 지역과 다른 날짜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상생의 지혜라 할 수도 있고, 다른 지역의 물건들을 교류하고 교환하는 시간을 확대했다고도 할 수 있다.

◇ 군산의 전통시장 소사(召史)

군산지역에도 오랜 옛날부터 장이 섰을 것이다. 문헌에 기록된 시장은 조선시대인 1872년 만들어진 옥구현 지도와 임피현 지도, 그리고 옥구 및 임피현의 각 군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도에 등장하는 시장들을 보면 가장 먼저 경장동 예그린 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경장시장(설애장터)이 있었고 옥구현 상평리에는 옥구읍시장이 있었다.

임피현 역시 임피장이 섰으며 이밖에도 임피현의 세곡을 서울로 싣고 가던 서포 조창(漕倉)에도 서포시장이 있었다. 후에는 대야로 옮겨간 지경장은 본래 옥산면 남대리에 있던 오일장 등도 있었다.

옥구와 임피의 군지에서는 평사장(옥산면 사정리)과 옥흥장(개정면 옥석리), 신시장(보덕리), 나포시장(나포리) 등의 옛날에 장이 섰던 지역들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다 군산개항 후에는 군산 중심권에도 장이 생겼는데 그곳이 군산장이었다. 군산에는 이런 5일장만도 10곳에 달할 정도로 경제활동이 왕성한 곳이었다.

그 후예들이라 할 수 있는 5일장 군(群)은 오늘에도 전승되고 있다.

◇ 군산 최고의 장(場) ‘경장시장’

경장시장은 현재의 미장동 예그린 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경포리에서 경장교(아흔아홉다리)를 건너면 도착할 수 있는 장이었다.

옛 경장시장이 위치했던 것으로 알려진 미장동소재 예그린 아파트와 그 주변. / 사진= 투데이군산
옛 경장시장이 위치했던 것으로 알려진 미장동소재 예그린 아파트와 그 주변. / 사진= 투데이군산

 

경장시장은 서울 경(京)자를 사용하여 서울시장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일명 서래(설애)장터 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경장이나 설애(서래)라는 명칭은 그 의미가 군산창 때문에 서울상인이 오는 시장 또는 서울 상품 등과 교류하는 시장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경장시(市= 市場)는 초하루(1일)와 초엿새(6일)에 장이 서는 오일장이었고 장터의 위치가 현재의 경포천 옆에 있는 포구 인근(예그린 아파트)에 자리하고 있어 군산과 인접한 장항, 서천, 한산 등의 지역으로 왕래하는 나루터 때문에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또 이곳은 금강 상류에 위치한 조선 3대장이었던 강경장 상인들의 뱃길 왕래가 용이해 매우 번성한 장이었단다.

경장시장은 400년 역사를 자랑하며 서천방면으로 가는 나루터가 있었을 뿐 아니라 상업인구만도 500여명에 달했을 정도라고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는 경장시장의 상권은 군산과 옥구는 물론이고 강경, 전주, 태인 등까지 걸쳐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일제는 강경장의 상권을 빼앗기에 온갖 술수를 다 썼는데 이 여파로 경장시장의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철도와 도로의 발전으로 오늘날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경장시장은 1917년 임피 토지조사국이 시장의 규모를 조사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20년도까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항 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중앙로와 신흥동, 영화동 등의 지역은 기존 상권인 경장시장과 거리가 멀어서 새로운 장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개항과 일제강점기 철도역 주변을 중심으로 현재의 신영시장 인근과 군역 앞 광장에 자연스럽게 5일장이 서게 된 것이다. 이곳이 군산장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군산장이라고 불렀고 1일과 6일에 장이 서는 전통적인 장이었다. 인근에는 우(牛)시장이 서면서 큰 시장이 생겨났다.

일제는 1912년 군산역이 들어선 이후 새로운 상권을 구축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상설시장을 개설했지만 당시 조선인들은 이를 외면으로 저항했다. 일제가 만든 이 상설시장은 1908년 구 경찰서 앞 서울분식 골목에 들어선 식료품시장이었다.

이에 일제는 상권 형성을 방해차원에서 단속을 강화했지만 군산장을 애용, 장으로 입지를 굳혀 왔다.

대명동 감도(일명 감독)가(街)의 조선시장에 있던 노점상들이 단합, 신영동에 시장을 열었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신영시장이자 구시장의 다른 이름이다.

이후 조선의 민초들은 일제의 집요한 상권침탈에 맞서 자구책 마련에 나섰고 지역 내 새로운 시장들이 탄생하는 불을 지폈다.

이 때문에 군산의 전통시장은 다른 도시들과 달리 많은 시장들을 갖고 있다.

여전히 문을 열고 있는 전통시장의 현황을 보면 공설시장과 수산물종합센터, 대야시장, 신영시장, 역전종합시장, 명산시장, 문화시장, 나운 주공시장, 삼학시장, 동부시장 등 모두 11곳에 달한다.

이중 원도심에 있는 시장만도 공설시장(신영동)과 수산물종합센터(해망동), 신영시장(신영동), 역전종합시장(대명동), 명산시장(명산동), 문화시장(문화동), 동부시장(경암동), 삼학시장(삼학동) 등 모두 8곳에 이른다.

# 군산의 100년 전 저잣거리 잔영은… 골목시장 즐비

일제강점기에는 시장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다소 작지만 민족전통의 상설 점포들이 모여 있는 골목을 중심으로 조선인 저잣거리가 형성됐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현 영동 수협 골목에 한산모시를 취급하는 모시전 거리가 있었고 구 영동파출소 앞 왼쪽 골목의 농방골목과 파출소 서쪽일대의 싸전거리, 그리고 중앙로2가 한일은행 골목에는 떡전거리 등이 있었다.

그곳과 다소 거리는 있지만 영동상가에서 평화길로 나오면 약전길이 있었고, 지금도 그 옛 상황을 기억이라도 남길 듯이 약전길과 약전 안길 등이 존재하고 있다.

이밖에도 옛 시장 중에는 당시의 난방재료가 나무였기 때문에 화목만 취급하는 나무장(場)만도 두 곳이었다.

이 중 한 곳은 째보선창 주변이었고 그곳에서는 충청도의 안면도와 부안의 변산 격포에서 배로 실어오는 질이 좋은 화목을 한 평 기준으로 쌓아놓고 고객들에게 팔았는데 장의 규모가 커서 산탄조합이라는 조합이 결성될 정도였다.

또 한곳의 나무장은 구시장 순대국밥 골목 앞의 나무장이었단다.

일제강점기에도 그곳은 국밥집이 즐비했고 국밥집 앞은 큰 공터였다고 한다. 이곳은 군산 인근의 벌목장인 산판에서 소달구지에 나무를 실은 나무꾼들이 이곳 공터에서 달구지를 세워놓고 국밥을 먹고 있으면 땔감을 살 사람이 와서 달구지의 나무를 살펴보고 나무를 샀단다. 이런 상황은 연탄이 대중화되기 전인 일제강점기~ 60년대 들어서도 계속돼 지금의 선양동 산 말랭이에서도 나무시장이 형성돼 땔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시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당시 땔감 부족 등으로 충남권과 부안 등에서 나무를 사들여와야 했고 월명공원과 군산의 야산에는 거의 민둥산으로 변했다.

이런 내용은 군산대박물관에 기증한 신철균 작가의 작품에 선명하게 나와 있다.

이 작품은 1964년 월명산 자락을 촬영한 길이 15m의 ‘군산의 기억’.

일제강점기와 현대로 이어지는 군산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작품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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