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33] 지역 ‘근대사상’ 꽃피운 ‘금호학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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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33] 지역 ‘근대사상’ 꽃피운 ‘금호학교’(하)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8.18 13:50
  • 기사수정 2022-01-17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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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교육’ 통한 자강운동 앞장선 금호학교… 군산공립보통학교에 강제흡수
송진우‧김성수‧ 백관수‧ 김철수 등… 근‧ 현대사 민족 및 사회주의계열 거두
고창- 부안- 전남 담양 출신의 대표 근대선각자들 계몽운동‧ 항일투쟁 헌신

우리 근현대사의 거두로서 근현대기 때 조국광복과 애국계몽운동 등에 엄청난 에너지와 역량을 불사른 애국지사들이 적지 않았다.

다수는 계몽주의이자 민족주의 계열에서 활동을, 일부는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여생을 마쳤다.

민족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반관 반민의 금호학교를 수학한 일부 선각자들이 우연인지 몰라도 그 대표적이다.

이 선각자들은 금호학교의 교사 등 당시 선각자들의 국채보상운동 등 국권회복운동과 같은 강연을 듣고 이 학교와 연을 맺어 우리의 근현대사의 중심에  우뚝섰다.

이들의 공과는 역사의 심판을 받겠지만 여기에선 사상보다는 인연과 일대기를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하는 장을 만들었다.

이들을 한데 묶는 교량 역할을 한 중심인물은 물론 인촌 김성수(1891~1955)다.

고창 부안면 출신인 인촌은 1906년 담양 출신 고하 송진우(1887~1945)와 담양 창평의 영학숙(호남권 근대교육 중심지)에서 교류, 친구이자 평생 동지로 이어졌고 군산의 금호학교를 거쳐 1908년 일본 유학까지 함께한다.

이들은 귀국 후 김성수가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 운영하면서 3.1운동에 함께 참여했고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에 이르기까지 일생의 동지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인촌은 이웃의 고창 성내면 출신 근촌 백관수(1889~1951)와는 금호학교에서 동문수학하면서 동지적인 관계로 발전했다.

앞서 근촌은 1907년 부안 내소사 청련암에서 공부하다 고하와 교류했고 1915년 경성법학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졸업한 뒤 인촌의 중앙학교에서 교사로서 활동하다 뒤늦게 일본 유학을 떠난다.

이들 삼 거두와 달리 사회주의계열의 지운 김철수(1893~1986)는 같은 금호학교 출신이지만 인촌과 고하에 비해 일본 유학이 다소 늦게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인촌의 도움으로 1912년 대망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이 선각자들의 공통점은 고창(김성수, 백관수)과 담양(송진우), 부안(김철수) 등의 호남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핵심적인 역할을 한 김성수(고창)와 인접지역에 살아 지속적인 교류가 이뤄지면서 상호 간의 신뢰는 대단했다.

해방 후 김철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민당계열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의 연령을 보면 근촌(1889년), 고하(1890년:고하 송진우 선생 기념사업회 기준)년생으로 가장 연배였고 , 인촌(1891년), 지운(1893년) 등의 순이었다. 그들은 4년 전후의 나이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교류를 통해 시대정신 구현에 몰두했다. 즉 민족이 처한 상황을 실력배양이나 사상적인 투쟁, 애국계몽운동 등을 통해 일제 압제에서 벗어나 조국광복을 앞당기는데 힘을 쏟았다.

그들의 면면을 보자.

▲ 고하 송진우(1890~1945)

고하 송진우
고하 송진우

전남 담양 출신으로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후 중앙학교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한 이후 30여 년 간 회사를 이끌었던 선각자다.

어릴 때 한문공부를 시작했고 뒤에는 의병장이었던 기삼연 선생으로부터 수학했다. 1906년 담양 창평의 영학숙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울 때 김성수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내소사 청련암을 거쳐 군산의 금호학교에서 신학문과 어학을 배웠고 1907년 10월 김성수와 유학,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시절 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하고 총무일을 맡았고 가인 김병로 등과 함께 유학생회의 기관지 ‘학지광’을 펴내기도 했다.

인촌과 중앙학교를 인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후 물산장려운동을 벌였고 민립 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애국애족운동을 전개했다.

1936년 8월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하자 그의 가슴에 있었던 일장기 사진을 말소에 나섰다가 총독부 압력으로 사장을 사임해야 했다. 1921년부터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충무공(이순신 장군) 유족보존운동을 전개, 모금으로 아산 현충사를 증수했고 문맹퇴치를 위해 브나로드 운동을 펼쳤다. 1931년 만주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자 사설을 통해 한중 민간의 보복 중지를 호소했고 희생된 중국인의 위문사업을 전개, 훗날 장개석 국민정부 주석으로부터 은폐를 받기도 했다.

그는 징병과 학도병 권유 유세 등 친일협력에 나서지 않고 병을 핑계로 칩거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을 결성하데 앞장, 당수격인 수석총무에 추대됐고 이에 앞서 국민대회 준비회의를 조직해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반탁문제를 거론했다가 9월 30일 오전 한현우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서거했다.

▲ 인촌 김성수(1891~1955)

인촌 김성수
인촌 김성수

고창 부안면 태생이지만 줄곧 부안 줄포면에서 자랐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귀국,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활동에 매진했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 운영했으나 초기 경영상황이 어려워 늘 사재를 털어서 보충했다가 1926년 동생 김연수가 성장시켰다. 1920년 양기탁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창간했고 1932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다.

1930년대 실력양성론에 따라 자치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이 시기 동아일보는 수시로 정간 등 탄압을 반복해서 받았다. 중일 및 태평양전쟁(1937~1941년) 때에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면서 상당수 지성인들이 그렇듯 일제의 강압적인 동원에 응해 친일행위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를테면 학병 모집과 전쟁물자 지원 등에도 협력했던 것.

그렇지만 동아일보 창간 후 문맹퇴치 운동에 이어 한글보급과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광복 후 한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 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동지였던 송진우의 암살을 계기로 정치인으로서 현실정치에 참여했고 이승만과의 관계를 맺었다.

1951년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고 1954년 이승만의 부산 정치파동에 반발, 부통령직을 사임하는 한편 통합야당인 민주당의 창당해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대항했다.

사후 대한민국 공로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됐지만 수년 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고 광복회 등에서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올랐다. 훈장은 대법원 판결로 취소됐고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 근촌 백관수(1889~ 미상)

근촌 백관수
근촌 백관수

고창군 성내면에서 태어난 언론인이자 민족운동가였다.

근촌의 사촌형이던 백인수(작고) 선생은 을사늑약에 반대, 순국 자결을 두 번이나 기도했을 정도 항일애국정신이 드높았던 집안이었다. 구한말 대학자인 간재 전우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금호학교를 거쳐 1915년 경성법학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중앙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인촌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입학했고 1919년 2.8 독립선언서를 학생 11명의 한사람으로 발표했다가 1년간 복역했다.

1924년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해 조선일보사에 입사, 편집인과 영업국장 등을 역임했다. 1927년 2월 민족단일단체로 신간회가 출범하자 조선일보사 대표로 참가했고 사설 문제로 당시 주필이던 안재홍과 함께 구속 수감됐으나 도쿄에서 열리는 제3회 범 태평양회의 참석차 일시 석방됐다가 1930년 형기를 마치고 풀려났다.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는 1년 4개월간 발행이 중단되는 상황을 맞기도 했다.

1932년 홍문사를 설립, 출판과 잡지를 발간했으나 일제에 의해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폐간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37년 5월 동아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한 지 얼마 안돼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자 이에 항거, 폐간계에 서명을 하지 않자 구금됐다.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낙향, 일제의 유혹과 압력에도 시작(詩作)과 붓글씨로 소일했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이름으로 등록한데 이어 남조선과도 입법위원회 의원과 제헌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제헌의원으로서 헌법기초의원, 초대 법제 사법위원장, 헌법 제정의원 등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신하지 못해 납북됐고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납북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 지운 김철수(1893~1986)

지운 김철수
지운 김철수

1893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난 김철수는 1908년 서당을 열고 있던 한학자 서택환의 제자로 들어가 선비정신과 함께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금호학교(1908)를 거쳐 1912년 일본 와세다대 정치과로 유학 간 뒤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매진한다. 1915년 재일본 유학생들과 열지 동맹을 결성하고 이듬해에는 조선인‧중국인‧대만인과 함께 신아동맹단을 결성, 대일항쟁을 선언한다.

1920년에는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국내 최초의 사회주의 결사인 사회혁명당을 결성했다. 이듬해에는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을 창립, 재무담당 중앙위원을 맡았고 1923년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다.

1926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취임했고 다음해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승인을 받는 등 사회주의 운동사에 굵직한 역할을 담당했다.

사회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으로 1930년에 붙잡혀 8년8개월 수감됐던 그는 1940년 다시 감옥에 들어가 해방을 맞아서야 공주형무소에서 출옥했다.

1947년 모든 정치활동을 접고 낙향한다. 좌우익 대결과 세력 다툼 등 혼란스런 해방정국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

낙향 뒤에는 자연과 벗하며 농사에 전념했다.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면모는 물론 남한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고 허백련, 오지호 등 호남지역 유명예술인과도 교류했다.

김철수의 삶은 그다지 편안하지 못했다. 자녀들의 삶이 남북으로 나눠져야 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혹독한 남북 대립기에도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상해 임시정부시절 정치적인 어려움에 처한 이승만을 구해준 인연(?)으로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목숨을 지킬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지사다.

자유당 말 신익희의 급서 후 허백련의 집에서 민주당 전남지부장 김양수 등과 모인 대책회의에서 김준연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이승만을 꺾기 위해서는 조봉암을 지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주위의 의견을 조성해 나가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이전에 그가 운영했던 조직과는 별개로 다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진행했다. 따라서 의욕과는 달리 사상과 정치적인 한계가 있었고 그만큼 성과를 얻지도 못했다.

1986년 전남대에서 강연을 마친 후 귀가한 지운은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급히 전남대 부속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여망하던 통일도 보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나이는 93세.

사회주의 활동 때문에 그의 가족사는 우리의 민족 아픔만큼이나 컸다. 유학시절 만난 씨없는 수박을 개발한 우장춘 박사에게 민족혼을 불어넣은 선각자로 알려졌고, 일제강점기엔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과도 호형호제한 사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과 친북활동의 전력이 없었음에도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1급 감시대상으로 분류돼 한평생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또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민족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우리의 서글픈 남북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선각자였다.

한편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의 독립정신 등을 기린 기념비가 부안 백산고교 동산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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