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6주년 특집] ‘근대기 파란 눈의 선교사’ 공적 기리자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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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6주년 특집] ‘근대기 파란 눈의 선교사’ 공적 기리자 (上)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8.13 10:43
  • 기사수정 2021-08-14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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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킨 선교사 수덕산 방문 이후 20~30명, 군산과 전주‧ 김제 등 도내 맹활약
기독교 이외에도 근대사상‧ 스포츠‧ 육영사업 등 새로운 문물 전달자 앞장
이젠 종교적 시각 벗어나 그들의 몫 제대로 되찾아줘야 할 때

근대기의 ’파란 눈의 선교사’들의 공적과 공로, 헌신 등이 종교적인 측면에 국한돼 당시 새로운 세상을 열었던 그들의 노력물이 더 사라지기 전에 역사적인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동안 미국은 물론 서양의 수많은 선교사들이 군산과 전주 등 전북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당시 선교사들은 기독교적인 포교‧ 전도활동 이외에도 우리에게 학교 설립을 통해 근대사상(신학문)은 물론 스포츠‧ 의료 전수(또는 의료봉사)와 항일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헌신해왔다.

하지만 우린 단순 ‘외국인 선교사’란 시각에 갇혀 그들의 엄청난 노고에 무관심, 광복 후 많은 것을 역사 속에 사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개신교회의 몫으로 치부했었다.

이에 그들의 흔적들을 살펴보고 역사와 대화하는 장을 두 차례(상, 하)에 걸쳐 마련했다.             

<편집자주>

2021년 8월15일은 광복 76주년.

이 선교사들은 우리와 그 당시 선조들에게 무엇이었고 그들의 노력과 헌신문제를 왜 점검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우린 해마다 광복주간이면 항일운동과 애국정신 고양에 힘써왔지만 정작 120여 년 전부터 해방직전까지 근대학문과 사상으로 이끈 스승격인 그 시절의 선교사들에 대한 공적과 헌신문제에 대해선 무척이나 소홀했다.

피상적으로 종교적인 측면의 ‘기독교(개신교)의 전파자’라 치부했다는 지적에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일이다.

추론컨대 지역사회에 많은 흔적들이 있는데도 그 내용을 표피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노력과 헌신을 신앙적인 접근으로 단순하게 치환하면서 근대기 선교사들의 피와 땀들을 사장하지 않았었냐고 자문과 자책도 해본다.

자칫 미국이 ‘우리에게 수혜(受惠)를 베풀었다’는 의미의 사대주의적인 사고로 흐를 수 있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전근대적인 봉건사상을 넘어서 근대정신의 문을 활짝 열었다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 공적과 공로들은 실로 엄청났다.

특히 군산은 더욱 그랬다.

1899년 개항과 그에 앞서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전북과 충청권까지 어우르면서 근대사상과 문물, 기독교 사상 등을 받아들이는 중심 창구역할을 톡톡히 했다.

# 근대의학 및 학교의 시작…궁멀병원(구암병원)‧ 영명학교 등의 등장

1910년 영명학교 전경(사진=군산시제공)
1910년 영명학교 전경(사진=군산시제공)

 

전킨(한국명 전위렴) 선교사와 드루(한국명 유대모) 의료선교사가 1895년 3월 수덕산 기슭에 둥지를 틀고 그 다음해(1896년) 4월 의료 선교활동(드루)을 한 이래 수많은 선교사들이 군산과 전주 등 호남권을 다녀갔다.

이들의 역할은 근대사상 형성과 항일운동 배양 등의 밑바탕으로 작용했다.

전킨과 드루가 1899년 12월 구암동산에 선교기지를 세우고 구암교회는 물론 예수병원(1897년), 영명학교(1903년), 멜본딘 여학교 등을 차례로 잇따라 열거나 설립했다.

1910년 멜본딘여학교 전경(사진=군산시제공)
1910년 멜본딘여학교 전경(사진=군산시제공)

 

전킨은 선교활동과 근대학교 등을 설립하면서 세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도 1908년 1월 군산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부인도 근대여성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들이 중심이 돼 1897년 구암동산에서 문을 연 궁멀예수병원은 후엔 ‘예수’의 번역 한자어 ‘야소’를 붙여 야소병원, 구암병원이라 불렸다. 전주예수병원보다 앞서 설립된 이 병원은 그곳의 롤모델 역할도 톡톡히했다.

이들은 전도선을 타고 인근 도서지방을 순회하면서 진료는 물론 기독교를 전파하는 활동했다.

이때 드루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진료한 사람만도 약 4,000명에 달했단다.

선교부가 호남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개척정신을 발휘했던 드루.

온갖 고역에도 레이놀즈와 전라도 해안지역 답사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서울과 군산에서 사역하는 7년을 끝으로 1901년 영구히 본국으로 돌아간다.

샌프란시스코 항만 검역관으로 지내던 그는 1902년 가을 하와이에서 배를 잘못 타는 바람에 하마터면 불법 입국자가 될 뻔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통역도 하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숙소를 제공하는 등 미국생활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드루 의료선교사의 뒤를 이었던 이는 토마스 다니엘(한국명 단의사).

그는 결혼과 함께 1904년 군산으로 와서 간호선교사 케슬라(한국명 계순라) 등의 도움을 받아 구암병원을 운영한다.

6년간 병원을 운영하던 다니엘은 1910년 이곳에서 전주예수병원으로 근무지를 바꾼다.

군산에 온 알렉산더 선교 의사는 활동한 지 얼마안돼 그의 부친 별세 소식에 따라 선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오긍선과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알렉산더는 오긍선의 유학생활 도움은 물론 구암병원 신축, 순천의 학교 설립과 병원 등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에 오긍선은 켄터키주 센추럴 대학과 루이빌 의대를 졸업한 뒤 1907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군산으로 되돌아 군산과 광주 등 야소병원의 병원장을 역임한데 이어 세브란스의전 교수(1912년)로 옮긴 후 우리나라 의학발전에도 기여했었다.

다니엘 원장의 후임은 J.B. 패터슨(한국명 손배돈).

그는 부임하자 병원을 확충하고 입원실을 온돌방으로 개축했고 전국적인 병원으로 이름을 날린다.

그의 근무기간은 7년(일부 자료에선 1909~ 1924년으로 표기).

다니엘의 후임으로 의사 브랜드(한국명 부란도)가 1924년 부임, 농촌순회진료를 하다 1930년 자매병원인 전주예수병원으로 옮겨갔다.

1930년대 이후 대공항과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선교사들은 강제출국을 당했다.

한편 조선의 테라사로 불린 독일출신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1880~ 1934 :한국명 서서평) 간호선교사는 패터슨 원장의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원장감독대리를 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간호사 발전, 고아 돌봄과 한센병 환자 치료, 독립운동 지원 등에 앞장서왔다.

전주의 한예정성경학교와 광주의 이일(李一)학교(셰핑의 후원자 이름을 따 명명)를 1961년 합병, 한일장신대의 토대가 됐다.

셰핑이 군산에서 근무한 시기는 1914~ 1919년까지 5년간이다.

이에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는 1930년대 전세계에 파송된 선교사 중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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