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32] 잊혀진 ‘근대사상’ 정신적 도장(道場) ‘금호학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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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32] 잊혀진 ‘근대사상’ 정신적 도장(道場) ‘금호학교’(상)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8.11 11:55
  • 기사수정 2022-01-17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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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풍미한 민족 거두(巨頭)들의 산실…김성수‧ 송진우‧ 백관수‧ 김철수 등
지역 금융시장 핵심 옛 한일상호신용금고‧ 가시리 등 금융 및 유명 음식점도
옛 허름한 골목길을 새롭게 단장한 중앙동의 ‘도깨비 카페’ 눈길

옛 도심에서 현재의 중앙로를 따라오면 개복동과 둔율동, 미원동이 나온다.

이곳은 100여년 전 중심권인 영화동과 월명동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옛 군산역이나 죽성포구 등으로 가는 길목이자 해일 등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개항기의 둔율동은 야산으로 이뤄진 고지대여서 당시 사람들이 본래 주거지로 삼았던 곳이었으리라.

시간이 지나면서 정주여건을 위해 주변에 대한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이곳에 대한 평탄 및 정지작업을 벌였다. 지금도 영광여고와 극장길 주변에는 남아 있는 일부 돌산 형태가 남아 있다.

군산 복요리의 원조격인 가시리가 반백년동안 영업하며 단골 및 미식가들과 교감하고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군산 복요리의 원조격인 가시리가 반백년동안 영업하며 단골 및 미식가들과 교감하고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개복교회와 중앙초 등을 지나면 옛 한일상호저축은행 뒤편에는 복요리로 유명한 오랜 음식점 ‘가시리(1971년 8월 개업)’가 50년째 영업하고 있다.

한때 군산 금융계의 양대 축이었던 옛 한일상호저축은행은 대주주의 부실과 불법적인 여신 취급 등에 따른 정부의 구조조정에 따라 미래2저축은행에 인수된 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이곳의 마지막 대표 군산출신 A씨는 불법적인 여신 등으로 사회적인 무리를 적지 않게 일으켰고 후엔 또 다른 일로 검경수사를 받던 과정에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그는 각종 사업을 하면서도 무리한 생활을 했지만 주변엔 온정적으로 대해 그래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여운 가득한 ‘도깨비 카페’ 등장

부흥여인숙, 옛군산교육청, 옛 세무서 등도 위치

도깨비카페 야경. / 사진= 도깨비카페 제공
도깨비카페 야경. / 사진= 도깨비카페 제공

 

얼마 전까지만도 이곳을 지나면 과거에는 허름한 선술집 골목이었는데 최근 깔끔하게 단장된 공간으로 만들어진 곳이 있다. 그 이름도 해괴한 ‘도깨비 카페’다.

필자도 지역의 한 매체에서 근무하던 동안 이곳을 지나야 했는데 그때와는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이곳을 가꾼 이는 김영희 사장이다.

김 사장과 그의 부군 K씨는 3~ 4년 전부터 주변을 사들이고 가꿔 오늘의 어여쁜 카페로 새롭게 치장했다. 노후 선술집 7~ 8개 있는 골목길을 정리, 개비온 담장으로 쌓아 밤거리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이곳에 게스트하우스까지 갖췄는데 그 아이디어의 시작은 반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부흥여인숙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요즘은 하수관거 공사까지 마무리 단계에 있어 옛 번화가의 위상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어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김 사장은 “본래 시댁이 인근에 있어 이곳에 대한 애정과 관심 때문에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는데 주변이 워낙 낙후돼 조금씩 땅 등을 사들여 꾸며가고 있다”면서 “앞으로 이곳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을 수 있게 정성과 아이디어를 짜낼 것”이라고 말했다.

옛 시외버스터미널이 위치했던 군산농협 중미지점 건물. / 사진=투데이군산
옛 시외버스터미널이 위치했던 군산농협 중미지점 건물. / 사진=투데이군산

 

옛 번화가였던 이곳 주변에는 옛 군산역과 함께 군산의 관문 역할을 한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단다.

오늘날의 군산농협 중미지점과 연접한 옛 시외버스터미널(3층 규모)은 타지로 나가는 출발점이었고 엄청난 인파들이 모여든 핵심상권이었다.

익산과 전주 등지의 시외권과 옛 군산역을 이용한 여객들을 남초등학교 인근에 있었던 시내버스터미널과 연계하는 교통중심지였단다.

70년대 들어 옛 시외버스터미널은 도심발전 저해와 교통문제 등을 이유로 1976년 새로 이전한 곳이 지금의 시외버스터미널.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옥구교육청과 군산교육청, 옥구군청, 군산세무서 등 옛 공공기관들이 위치해 한땐 영화동과 비견할 정도인 핵심 행정타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옛 옥구교육청은 1952년 중앙로 1가 3번지에서 시작했으나 명산동(1955년 2월)시대와 미원동 청사 이전(1957년 7월), 오룡동 평화중‧고 건물 등을 거쳤다.

이후 1983년 현재의 군산교육청으로 이전한 뒤 95년 1월 도농통합과 함께 자연스럽게 옥구교육청을 흡수했다.

물론 군산교육청은 1964년 1월 본래 옥구교육청으로부터 독립한 후 중앙초 뒤편에 있는 가시리 주변에 위치하며 지역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했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수십 년 동안 군산의 교육은 전북의 서남권과 보령과 대천 등지에서 유학을 올 정도로 그 위상이 남달랐다.

옛 한일상호저축은행에 위치해있었던 옛 군산세무서 전경(당시 송하철 세무서장 이임 때 근무직원들과 촬영한 사진). / 사진= 투데이군산
옛 한일상호저축은행에 위치해있었던 옛 군산세무서 전경(당시 송하철 세무서장 이임 때 근무직원들과 촬영한 사진). / 사진= 투데이군산

 

또 눈길을 끈 곳은 옛 세무서 건물이다.

1949년 8월 개청됐던 옛 군산세무서가 소룡동으로 이전하기 전인 1990년 11월까지 중앙로 오피스넥스 군산점 자리에 수십년간 위치해있었다.

이곳은 한일상호신용금고에게 매각됐고 한일상호신용금고가 상호저축은행과 태풍문구(도매) 등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공간에서 약간의 발길을 떼면 개항기의 역동적인 공간이자 신문물을 받아들였던 민족학교가 위치해 있었단다.

이 때문에 새로운 문물과 종교 등을 받아들이거나 배우려는 욕구는 물론 새로운 것을 접하기 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갖춘 근대도시였다.

이른바 근대인의 만남의 광장과 같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런 시대적인 산물이 그 시절 전국적으로 붐이 일었던 근대적인 자강운동은 군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역사적인 흐름으로 타고 설립된 곳이 금호학교다.

 

자강운동의 산실 ‘금호학교’ 설립

옥구부윤 이무영 등 설립 앞장

콩나물고개를 경계로 이웃한 둔율정(둔율성당 부근)에는 대한제국 시절(1907) ‘옥구 군산항 민단’이 설립한 금호학교(今湖學校)가 위치했다.

나중에 중앙초의 전신인 군산공립보통학교와 인접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봄 옥구군산항민단에서 설립한 사립학교인 금호학교는 전국적인 국채보상 운동과 같은 국권회복을 위한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근대교육의 전당.

초창기 군산항민단강습소로 불리다가 1907년 금호학교로 개명하는 상황을 맞는다.

그 배경은 대한제국 학부대신 이재곤(1859~1943)이 그 시기에 군산을 방문한 뒤 일어난 일이다. 이 학교는 본래 사립이지만 국가에서 후원하는 체제라는 반(半) 관립적인 요소도 지녔다.

이 학교 취지와 달리 이재곤은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을 맺은 ‘정미7적(敵)’으로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오른 인사로 거의 매국노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인사.

일제로부터 자작이란 칭호를 받을 정도로 각종 친일행각으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올랐다.

을사늑약 이후 군산항의 자강운동은 1907년 들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군산항에서 자강 운동의 모태가 된 것은 1907년에 설립된 옥구 군산항 민단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자강 운동 단체들이 만들어졌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민회가 설립되어 지역민의 단결을 통한 지역 자치를 꾀했다.

군산항의 민단은 1907년 3월경에 옥구부윤 이무영이 중심역할을 하며 만든 것으로 보인다. 1906년 8월 옥구 감리로 부임한 이무영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어 감리서가 없어진 뒤에 옥구부윤으로 부임한 후, 지역 자강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1885년 조선 정부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동문학’에서 영어 교육을 받은 뒤에 주로 외교업무와 개항장의 관리로 근무했다.

특히 독립협회에 적극 참여, 만민 공동회의 최초 상소문 봉소위원을 역임했고, 1898년 11월에는 관직을 물러난 후 만민공동회의 활동에 전력했다.

이후 무안항, 동래항을 거쳐 옥구항 감리로 부임했다. 이런 활동을 한 이무영은 군산항 감리로 임명된 이후 민단 설립에 앞장섰다. 그는 후에 공주지역으로 이사, 기독교로 귀의했고 이름도 ‘이교영’으로 개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후 삶은 잘알려지지 않았다.

학교 설립의 발기인은 옥구부윤 이무영이었고, 교장은 조병승, 교원은 노철우․ 한승리 등이었단다. 눈길을 끈 인사는 노철우와 한승리였다.

재정 후원은 옥구 군산항 객주들이 앞장섰다.

노철우는 군산개항 때 옥구세관에 근무한 이력이 있는 관리로 영어에 능통했고 한승리는 탁지부 하급관리였다. 한승리가 부안과 고창 등에서 애국강연회를 가졌을 때 감명 깊게 들었던 이가 인촌 김성수였다. 이를 강연을 듣고 금호학교와 연을 맺었다는 게 인촌의 술회다.

교육과정은 법률, 산술, 영어, 일어 외에도 물리, 화학, 체조, 창가 등을 교육했고 야간부도 있어 일어과와 직조과가 개설됐다.

이 학교는 계몽운동에 앞장선 학교로 1909년 일진회가 합방청원서를 제출하자 이 학교 교사 임항재와 학생 29명이 반대성명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하는 항일애국노선을 명확하게 한다.

일제는 이 같은 금호학교와 같은 민족주의적인 사립학교를 탄압하고자 사립학교령과 기부금 취제 규칙을 만들어 학교 운영을 적극 방해했다. 결국 재정난에 빠져 1910년 국권 상실과 함께 아쉽게 문을 닫아야 했다.

이에 따라 폐교와 함께 오늘날의 중앙초등학교에 학교 관련 재산이 흡수돼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 자료들을 찾고 끈질기게 추적한 지역 인사 등이 있어 오늘날 기록들이라도 남게 된 것이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민족주의 계열의 김성수, 송진우, 백관수와 사회주의계열의 김철수 등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항일문제를 접근하는 태도는 달랐으나 우리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선각자요, 항일운동을 해온 인사들이다. 이중 일부 인사는 친일인사로 지목돼 공과(功過)문제가 역사 속에 고스란히 투영돼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하다.

 

금호학교와  ‘든든한 후원자’ 김홍두…

‘국민엄마’ 탤런트 김혜자의 조부

(김혜자의 선친 김용택 전 사회부 차관)

금호학교와 김홍두(1878~ 1933). 이들은 도대체 어떤 관계여서 그 중심에 선 걸까.

디지털군산문화대전과 조종안 기자(본보 야구 100년사 보도), 김태웅 서울대교수의 2012년 심포지엄 발제문, ‘최영의 군산 풍물기’ 등을 참조했다.

금호학교는 객주들 상회사인 창성사의 도움을 받아 학교 재정운영을 감당했단다.

옥구 군산항민단에서 당시 객주들을 대표하던 이가 김홍두였다.

그가 문헌에 등장한 것이 1903년이다.

그는 20대 중반에 대한제국의 황실재정을 담당했던 내정원에 대항할 정도로 뚝심이 있는 객주였다. 영흥사 소속이던 그는 1903년 내정원의 상납량을 문제 삼다가 제명됐지만 그해 가을 창성사가 창립되자 동료들과 적극 참여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던 1907년 3월 당시 군산객주상회사에 소속된 그는 ‘국채보상 의무사’를 조직하는 과정에 중심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1909년 5월 옥구 군산항 민단을 매개로 결성된 대한협회 군산지회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또  3.1운동 이후 조선노동공제회 군산지회 고문, 군산미선조합장, 군산청년회장, 적성야학교 고문, 군산정미조합 및 군산제승조합 고문 등을 역임했다. 구복동(현 중앙로 2가)에서 천일상회를 운영하며 군산부 협의회 의원과 군산상공회의소 평의원을 지낸데 이어 신간회 군산지회장 등으로 활동, 군산의 객주들과 함께 민족자본가로서 교육 및 문화운동에 앞장선 인물.

그의 차남인 김용택(1907~ 1984)은 군산공립보통학교와 보성중, 일본명치대학, 미국 미시간주 호프대학 등을 졸업한 뒤,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북미 유학생총회 이사장과 총회장을 겸한 그는 부친의 영향을 받고 중국 상해를 오가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미국과 일본 유학생활을 하다 귀국(1940년) 후 1940년 일경에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다.  ‘국민 엄마’ 탤런트 김혜자는 귀국한 후 1년 뒤에 낳았다고.

해방 후 미군정 시절 재무부장 대리를 지냈고 이승만 대통령 시절 사회부 차관(1952년)을 역임하기도 했다. 서울과 군산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낙향, 중동에 집을 마련하고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등 네 차례에 걸친 도전에도 시민의 선택을 받지 못해 정계 은퇴와 함께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옮겨가  그곳의 작은 판잣집에서 1984년 7월 세상을 하직했단다.

 

(취재 후기)인연의 공간 중앙초 주변

중앙로는 고교를 군산에서 졸업한 까닭에 군산역 주변을 수없이 오가기도 했지만 부교재를 사기 위해 옛 신한은행 앞에 있었던 한국서적까지 걸어오는 공간이어서 나에게 무척이나 친숙한 공간이기하다.

이곳에 대한 아련한 잔상이 있다.

시기별로 적어보자면 1991년 3월 중앙초에서 열린 국회의원 합동연설회에 취재왔을 때다. 도청 출입선배들과 취재차 현장 스케치를 하던 중 가시리에 들러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그날 정치인들의 연설보다 더 기억이 새롭다.

그 후 고교 동창인 A와 강현욱 전 국회의원 간 연설회장에 들러 입담겨루기와 같은 정치판을 지켜본 것은 아마 2000년 초 총선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지역일간지에서 근무하던 중 본사로 발령이 났는데,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이 사회적 이슈였다.

2005년 광복절 즈음, 지운 선생에 대한 서훈이 발표된 시기에 그의 손녀딸인 김화래 한국화가와 만나 그의 조부(김철수 선생)와 그 집안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취재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기사가 나온 후에 그분은 답례로 화선지에 매화를 그려 자신의 낙관과 필자의 이름을 흔쾌히 넣어 주셨다.

그 작품은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고 조부의 정신이 서려 있는 부안 백산고교를 졸업한 언론인 등 선배들과 지운에 대한 후일담을 나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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