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30] 약 80년 역사의 화교소학교… 화교들의 ‘교육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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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30] 약 80년 역사의 화교소학교… 화교들의 ‘교육 산실’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7.27 11:00
  • 기사수정 2022-01-17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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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개항 후 군산 이주 본격… 화교 한때 1000여명 넘어서기도
화교소학교 1941 년 개교 후 ‘화재- 이전- 2차 화재’-휴교
오랜 화교 교육산실 사라질듯…화교박물관 운영 논의할 때
80년 역사의 화교소학교가 2년간 휴교로 폐교 위기에 놓여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80년 역사의 화교소학교가 2년간 휴교로 폐교 위기에 놓여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명산시장에 인근에 사는 시민들은 유곽과 함께 화교소학교 등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유곽과 화교소학교 등이 있었던 금광길은 이웃에 살았던 화교들의 삶터이자 우리의 오랜 이웃의 얘깃거리이다.

이런 과거 때문에 군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화교와 관련된 일화나 소재들이 수두룩하다.

‘우리의 이웃’ 화교, 그들은 누구이고 군산과 인연은 언제부터일까.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인 여건, 즉 군산의 화교들은 서해를 마주하고 있는 대부분 산동성 출신이다. ‘화교(華僑)’란 단어는 중화의 ’화(華)’와 교거(僑居: 객지 생활)의 ‘교(僑)’가 합쳐진 약칭으로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이라는 의미다.

중국인의 첫 국내 이주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군과 함께 들어오면서 비롯된다.

이들이 언제부터 군산에 거주하기 시작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군산에 화교가 공식적인 거주한 것은 1899년 군산개항 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군산과 관련된 화교의 첫 기록은 1900년 황성신문 잡보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개항 1년 후 군산이 각국 조계지역으로 개항장이 되자 인천과 원산에 거주하던 청국인들이 치외법권지역인 군산조계지에 다수 이주했고 이들의 안전과 이해관계를 돕기 위해 청국 영사관이 설치된 것이다.

1901년 11월 인천항의 청국 조계지 내에 개업한 해운회사의 기선이 인천과 군산을 정기 운항했다는 언론 기록이 있다. 실제로 1894년 군산에 처음 도착한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인천에서 군산까지 여객선을 이용해 들어왔다는 기록으로 미뤄 항로가 연결되었을 것이란 추론은 가능하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볼 때 당시 군산이 청국인들에게 중요한 활동 거점 지역의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초창기 군산에 화교가 거주했음을 확인해주는 자료로는 화교 최고 무역회사였던 동순태상회의 상해 본점과 조선 각 지점 간 연락장부인  ‘동태래신’을 들을 수 있다.

동태래신에는 1905~1906년까지 원산과 인천, 군산의 동순태상회 지점의 무역사항이 정리되어 있다. 이 상회가 군산의 조계지역 중 5개 지역의 토지를 경락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군산에 이주하기 시작한 화교들의 주요 거주지역과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1911년 제작한 군산 각국 조계지역 지주현황지도다.

군산에 거주한 화교는 1910년 일본인(약 3,000명) 다음으로 많은 499명이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대부분 산동성의 내항, 용성, 영도지역 등 주로 바닷가 주변 출신으로 주된 직업은 도시나 읍내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포목, 요식업, 잡화)과 도시 주변에서 채소 등을 재배하며 판매하는 농민 및 노동자들이다.

주요거주지인 영화동(당시 전주통) 인근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규모 도매상인 금성동과 우풍덕이 있었다. 요리집은 동해루, 평화원, 대화루, 쌍설루 등이 전북은행 군산지점 인근과 시내 중심지에 있었다. 또 화교농민들은 사정동과 개정동, 회현면, 삼학동 대우아파트 및 중앙초등학교 뒤쪽(당시 밭) 등에서 밭농사를 주로 했다.

특히 이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집은 약 120년 동안 우리 음식처럼 자리 잡아 친숙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나 화교들에게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줬다. 농업을 하던 화교들은 주요 소비계층인 일본인들이 쫓겨가자 대부분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해방 당시 약 1,200명이던 화교들이 절반가량 귀국했고 1970년대 이후 상당수가 해외로 이주, 최근에는 소수만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강 이남 첫 군산화교소학교의 개교 … 영광, 그리고 휴교

군산화교학교의 연혁지를 통해 가장 밀도 있는 연구를 하는 이는 김중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장이다. 김 관장이 정리한 논문 ‘이웃 사촌 화교를 만나다’란 책자의 내용을 발췌했다.

군산화교소학교의 설립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인천과 서울에 이어 국내 세 번째로 건립된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한강 이남 최초라는 역사성도 지니고 있다.

이곳의 역사성에도 안타까운 것은 2001년 화재로 학교의 모든 기록물이 불에 타는 바람에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와 관련된 내용이 없었는데 수년 전 학교 내에서 나무판에 새겨진 학교 연혁이 발견됐는데 목판이었다.

중화민국 42년(1953년) 10월10일 개교 11주년을 기념해서 작성한 연혁의 글로 이를 쓴 이가 교장 동을신, 교사 왕서오였다.

이 내용에 따르면 이 학교 설립 및 이전과정과 학교운영을 위한 화교들의 기금 모금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학교가 의미가 있는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 보존과 유지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과 함께 일제강점기 우리 학제에 대한 비교 연구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큰 틀에서 보면 군산화교소학교는 시기별로 ▲ 창립기(장미동 중국어문강습소) ▲ 시련기(중앙로 2가 화교소학교) ▲ 도약 및 쇠퇴기(명산동 화교소학교 시절)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 학교의 구체적인 흐름을 살펴보자.

군산화교소학교는 1941년 10월10일 중국어문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장미동 만춘향(과거 전주통 17번지)에 위치한 중화상회 사무실에서 문을 열었다.

중화상회는 1927년 설립한 화교협회의 옛 이름. 당시 회장은 무역업을 하는 녹(鹿)암정이었다.

개교 당시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로 만들어진 이 학교는 녹암정(교장), 임전갑 등의 노력으로 건립됐다. 특히 유풍덕과 금생동 등이 모금에 적극 나섰단다.

학생은 군산지역 학생 50여명과 기숙사에 거주하는 유학생 10명 등 모두 60여명이 다닌 학교였다.

자녀들이 제때 교육을 받지 못하면 문맹자가 될 것이라는 우려 속에 교육의 필요성을 절하게 느낀 녹 회장은 소학교 설립계획을 세우고 추진위원회를 만드는 한편 일제 교육관청 관계자들을 설득, 중국어문강습소의 허가를 받아냈다.

이듬해인 1942년 일제로부터 군산화교소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는다.

서울과 인천 다음으로 문을 연 화교소학교는 심상과(초등학교) 6년 과정으로 매일 6시간씩 수업을 했고 수업과목은 중국의 북경어를 중심으로 산술, 자연, 주산, 음악, 체육 등이었다.

이 학교는 1947년 가을 중앙로 2가 중앙초등학교 인근 과거 일본인 운영하던 병원(옛 한일상호신용금고 뒷편)으로 이전했다. 이때가 가장 많은 학생들이 진학, 최고의 번영기였다.

하지만 이런 전성기도 잠시였고 일본 패망 등으로 화교들의 귀향이 이어지면서 약 600명만 남게 됐고 교장도 4명이 바뀌는 형국이었다.

이 시기는 중국 귀향과 화교무역상의 번성 등으로 이어졌으나 그것도 일시적이었다. 결정적인 원인은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의 혼란, 전주 및 익산의 화교학교 설립 등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1949년 2월 학교 건물 수리 중에 큰불이 났다.

이에 1949년 11월11일 지금의 학교 자리인 신흥동(현재 명산동) 유곽 칠복(2층 목조건물)으로 이전했다.

1950년 한국전쟁과 함께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곳으로 피난 온 전국 화교들의 임시 거처로도 이용되는 상황이었다.

전쟁은 우리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국내 거주하는 한 화교들은 대만을 모국으로 선택해야 했다. 극단적인 반공정책과 대륙 교류 봉쇄 등은 엉뚱한 상황을 낳았다.

1970년대 한국정부의 화교정책에 따른 경제력 약화와 화교의 해외 대거이주 등으로 급격히 화교들의 세가 약화됐는데 이는 취학아동의 부족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고육지책으로 한국인 학생을 받아들였지만 20년을 넘기지 못했다.

물론 이 시기에 군산시민 중에는 중국과의 교류를 대비, 중국어 교육에 관심을 쏟아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화교소학교를 병행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1980년 중앙각 주인이었던 형인진씨의 둘째 아들 광의(제11회 졸업생)씨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재도약을 위한 노력을 했다.

당시 35세였던 형 교장은 중앙대와 원광대 약대를 졸업한 뒤 1970년부터 영동에 중국 장수당약국을 개업, 운영해오면서 지역사회와 활발한 교류에도 힘써왔다.

2001년 4월7일 학교로 사용해오던 유곽건물과 자료 등이 화재로 거의 다 사라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후 대만정부의 도움을 받아 교사를 신축한 뒤 외국인학교로 인가받는 등 학교발전에 헌신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형 교장으로부터 학교를 인계받은 그의 딸이 의욕적으로 운영해왔지만 학교 재도약으로 이끌기엔 역부족이었다.

학생 수급난이 결정타였다.

이런 여파로 2019년부터 사실상 휴교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중수교(1992년) 이후 중국 본토출신 중국인들의 결혼 이주 행렬에도 약 80년 역사의 교육현장에서 취학아동으로 연결시키는데 실패했다.

여기에다 이 학교에선 북경어 교재로 활용하고 있지만 본토 출신 학원 관계자 등의 집요한 중국어 원조론(?)에 휘말렸다.

사실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군산의 화교 유산이 굴러온 돌에 박힌 돌이 밀려난 꼴을 당한 것이다.

오랜 이웃에게 열띤 응원을 하지만 일어설 기력이 있을지 아직 의문이다.

군산시와 화교소학교측이 지혜를 짜내 120 여년의 화교 유산이 사라지지 않게  이곳을 화교 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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