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28] 해돋이 공원 ‘전국구 스포츠 스타’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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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28] 해돋이 공원 ‘전국구 스포츠 스타’ 산실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7.14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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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동 ‘산 끊어진 고개’ 전락… 일제강점기 무분별한 개발로 탄생한 공간
어려운 시절 겪은 인사들 야구‧ 복싱 등 헝그리정신 무장… 스타반열 우뚝
복싱의 산실… 김광선(88서울올림픽 금메달)‧ 박구일‧ 전진철씨 등 유명 복서 배출
선양동 해돋이공원. / 사진=투데이군산
선양동 해돋이공원. / 사진=투데이군산

 

“ ‘해돋이 공원= 올림픽 공원(?)’을 아시나요.”

선양동의 스토리는 말랭이 마을이란 말로만 한정하기보다는 전국적인 스포츠 스타들의 배출지란 점에서 스토리 텔링을 할 소재들로 넘쳐난다.

선양동(先陽洞)은 군산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맞이하는 동네’란 이름으로 시작됐는데 다른 지역과 달리 해방 후 일제식 표현을 탈피한 몇 안되는 곳이기도 하다.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던 체육명문인 군산지역의 중‧ 고등학교에 구기 종목이든, 격투기 종목 등이 있는 곳에는 소위 ‘깡’으로 무장한 헝그리 스타들이 적지 않게 배출됐다.

군산 선양동 등 인근에서 50‧ 60년대에 살았던 이들은 고픈 배를 부여잡고 산에서 그들만의 놀이터를 누볐을 터.

산의 정상부에서 인근 학교에 있는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자신들도 따라 해보았거나 지역 불량배들과 다툼을 통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필살기를 연마했을 것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금과는 확연히 차이를 보여준 해돋이공원.

본래 이곳의 이름은 ‘산 끊어진 고개’였다.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종안 기자(본보 야구 100년사 기고)는 이곳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월명산을 주봉으로 서낭당 고개(형무소 고개), 콩나물 고개(아리랑고개), 군청고개(둔율동 고개) 등과 어깨동무하듯 어우러지는 곳이라 했다.

이곳에서 보면 주변의 남초등학교 등의 운동장에서 놀고 있거나 운동하는 광경은 사정권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의 스포츠 입문기는 재능과 재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떤 이는 굶주린 것을 면하기 위해 야구든, 복싱을 선택해야 했다는 것이 그 시절의 사연이고, 어떤 스포츠 영웅의 탄생기였다.

 

올림픽 공원 탄생… 조계현‧김광선 등의 고향

군산이 고향인 ‘조영섭의 복싱 스토리’에서 선양동과 인근 지역을 끼고 있는 산동네(?) 출신 유명 복서는 물론 전국구급 야구계 인사와 일화. 인연 등을 소개했다.

조계현과 김완수(군산 권투의 산증인 김완수 관장과 동명이인 권투선수) 등이 누볐던 삼학동과 오룡동이 교차하는 그곳엔 작은 능선이 엄마의 포근한 가슴처럼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400m에 걸쳐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곳 출신 스포츠맨들은 전국은 물론 세계를 호령했단다.

이 능선 인근에서 야구선수 조계현, 정명원, 백인호, 김일권, 한경수 등이 자랐고 복싱에선 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김광선을 비롯한 66년 방콕아시안게임(웰터급) 금메달리스트이자, 68년 멕시코 올림픽 국가대표였던 박구일(작고),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전진철 등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이들이 태어난 곳을 유추해보면 이곳이야말로 스포츠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란 생각이 진하게 든다.

조계현 기아 타이거즈 단장은 현역 시절 팔색조의 투수로 고교와 프로야구계를 주름잡았고 선수생활을 마친 후 야구지도자로 맹활약, 군산을 대표하는 스포츠계인사다. 김일권도 프로야구 원년 도루왕과 한국시리즈 최초의 노히트 노런의 신화를 쓴 태평양의 정명원(투수) 등도 이곳에서 자랐단다.

정명원은 94년에 최초의 40세이브를 기록하며 선동렬의 기록을 넘어섰다. 또한, 96년에도 태평양 소속으로 해태와 4차전 깜짝 선발투수로 등판, 포스트시즌 사상 최초로 노 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2승2패로 균형을 맞춘 투수가 바로 정명원이었다.

복싱 전문기자로 활동하는 조영섭은 이런 점들을 들어 감히 ‘올림픽공원’이라 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전국과 도내에서 스포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스타들의 고향이란 점에서 일면 수긍도 간다.

올림픽에 2회 이상 출전한 전국의 복서 9명 중 군산출신만 3명에 달했는데 대부분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이다. 이들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월드컵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따낸 금메달만 모두 15개를 수확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김광선은 복싱 메이저라 할 수 있는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월드컵을 제패한 최고의 복서였지만 프로권투에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 고향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곳의 주인공들은 수십 년이 흐르면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아닌 노년층으로 바뀌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이곳에 처음 태어난 이들은 이곳을 대부분 떠났고 최근엔 백색 머리를 날리는 노신사들로 채워졌다.

얼마 전 친구와 이곳을 취재하면서 만난 이도 당연히 노인이었다. 산 아래 자락의 쉼터에는 그들이 주인공이고 주역이다.

걸프전(1991년 1월 발발: 이라크 대 미‧영 등 다국적군간 전쟁) 당시에 중동에서 근로자로 일했던 강태성(80)옹을 만났다. 그는 향토기업 백화에서 전기 주임으로 10여년을 근무했을 뿐 아닐 걸프전 당시 현대건설에서 팀장급으로 근무했다고 말을 붙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다수의 근로자들이 건설현장을 이탈했는데 자신은 팀장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고.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 그의 책임감을 높이 사서 포상을 내렸다는 얘기들을 술술 풀어냈다. 덤으로 자신은 오영우 예비역 대장(남성고 출신)과 임피중 동기라고 소개한 뒤 오 장군의 어린시절과 얽힌 얘기들도 덧붙이기도 했다. 중동근무로 모았던 돈으로 자녀들을 교육했고 산 아래 동네에서 가장 큰 집(?)에 산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한편 이곳에서 해맞이 축제가 수년 전까지 새해 첫날 새벽이면 열려 시민들의 소망을 기원한 곳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극장길에서 못한 얘기, 그리고 추억의 소환

당신의 인생극장과 인생영화는?

1954년 군산극장의 영화간판. / 사진= 군산시제공(사진으로보는 군산 100년)
1954년 군산극장의 영화간판. / 사진= 군산시제공(사진으로보는 군산 100년)

 

극장길을 수없이 오가면서 떠오른 것 중 하나는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한편의 ‘인생 영화’는 뭘까.

익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던 필자는 영화와 관련된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영화 ‘빠삐용’이다.

직접 영화관에서 보지 못했지만 초등 5학년 어느 날, 친구의 형으로부터 생생하게 들었던 얘기였는데, 그의 입담이 어찌 구수했던지 몇 시간을 그 형의 입만을 바라봤던 기억이 소록소록 떠오른다.

그 시절 그 영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주산을 가르쳤던 요즘 말로 ‘방과후 교사’로부터였다. 그의 풍부한 해설과 친절한 설명으로 나중에 (TV로 방영됐을 때도) 생생하게 그 내용이 기억났을 정도였다.

그리고 영화와 관련된 기억은 중학교로 넘어갔는데 2학년 때 친구와 몰래 극장에 갔을 때 봤던 1970년대 인기를 끌었던 영화 ‘고교 얄개’시리즈였다. 이 시기에 아역배우 출신 이승현과 김정훈, 진유영씨 등 트로이카는 엄청난 하이틴 스타였다.

고교 때도 몇몇의 영화를 단체관람을 했지만 기억에 흐리게 남아 있을 뿐 거의 떠오른 내용이 없을 정도인데 입시지옥에서 살아서 그랬던 것 같다.

대학시절 이후 한국전쟁 속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남‧북한 양쪽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내용을 다룬 영화 남부군(1990년 개봉작)과 광주항쟁영화 ‘꽃잎’, 영화 ‘로메로(엘살바도르 대주교의 독재 항쟁 실화를 다룬 작품)’ 등도 조금씩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해낸다. 얼마 전 여름, 처형이 사는 장수에 가서 인근에 있는 용소계곡에 피서를 갔는데 영화 ‘남부군’의 단체 목욕 신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작품들은 내게 어떤 의미를 던져줬을까. 진보와 민주주의, 남북문제 등등을 고민하게 하지 않을까 싶다.

/ 사진= 군산시제공
/ 사진= 군산시제공

 

자신만의 ‘시네마천국’이라 할 수 있는 ‘인생극장’도 있다. 주로 학창시절에 익산에서 살았던 기억에 중학교 인근의 삼남극장이 어쩌면 내겐 ‘인생극장’이었지 않았을까. 그 시절엔 용돈도 적었고 극장에 출입하는 경우 교사들의 현장지도가 번득이었던 때라, 자유롭게 영화관 또는 극장을 찾기가 쉽지 않았었다.

그런 극장은 영화를 처음 보거나 인생영화를 본 곳일 수도, 연인과의 잊을 수 없는 첫 데이트 장소일 수도 있다.

영화를 관람하는 물리적 장소가 어찌했던 시공을 넘어 저마다의 인생이야기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물, 과거를 생생하게 소환하는 삶의 흔적이었던 곳의 지금은 잡을 수 없는 과거 얘기의 한 장면 아니었을까.

/ 사진= 군산시 제공
/ 사진= 군산시 제공

 

물론 고교 때 군산의 몇몇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한 적은 있었다. 그 시절의 기억력을 아무리 동원해도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시절을 기억나지 않게 한 것은 입시경쟁 때문인지, 긴 시간 때문인지 정확하지 않다.

한국영화는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질적 또는 양적 성장을 거듭했다.

각종 영화들이 꽃을 피웠고 극장도 시대 변화에 따라 부침을 했는데 한 극장에서 한 영화만 상영하는 단관극장이 중심이었다.

군산에서 살아온 40대 이상이면 극장길의 국도극장과 군산극장, 아카데미극장, 제일극장, 명화극장, 코아극장 등을 오가면서 명화든지, 아니면 19금 영화 등을 관람했으리라.

하지만 1998년 대기업이 참여한 대형멀티플렉스인 CGV강변 출범 이후 서울은 물론 전국의 극장가가 벼랑 끝에 내몰렸다.

앞서 1990년대 중반 전국을 강타한 비디오방과 비디오 대여점, 유선방송이 생기면서 소극장들은 문을 닫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군산극장가의 대부였던 박주일 사장은 2001년 12월 군산지역 최초로 복합극장체제로 상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수년 간의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롯데시네마와 메가라인 7과 같은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군산에 상륙하면서 박 사장의 씨네마 우일과 국도극장은 2007년 7월 6일 경매 처분과 함께 형체만 남기고 사라졌다.

영화관객 2억명 시대의 최종 승자는 상업성을 앞세운 멀티플렉스의 독식이었다.

100년 가까운 전북과 군산을 대표한 극장문화가 메이저 업체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극장 생태계의 다양성에 내상을 입고 군산사람의 극장이든, 영화관의 탄생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이런 폐관의 공간에 조용한 시도가 수년 전부터 군산시민예술촌의 움직임이다.

군산시민예술촌은 구 우일극장을 문화예술공간으로 리모델링, 지역예술인과 시민들이 문화예술로 만나는 교류의 장이다.

박양기 군산시민예술촌장은 “지역문화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주민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개발하는데 힘을 쏟고 지역 청소년 동아리들의 구심점이 되고자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홈페이지를 통해 거듭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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