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3] 도선장‧ 횟집타운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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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3] 도선장‧ 횟집타운 전성시대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3.30 11:11
  • 기사수정 2022-01-17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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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대교 밑 군산수산물종합센터 곧 신축 통해 손님맞이 나설 듯
횟집타운 중심 군산회집… 동양최대 회전문 식당 전국적인 인기
사라진 옛 도선장 … 군산~ 장항간 ‘장통선’ 양지역의 발 역할 톡톡
썰물로 드러난 군산내항 연안. / 사진= 투데이군산
썰물로 드러난 군산내항 연안. / 사진= 투데이군산

 

군산내항 연안은 지역의 수산 및 운송 중심지를 넘어 금강의 물류 통로였고 충남 서남권 및 전북의 관문이었다. 본래 째보선창이나 서래포구 등이 그 역할을 했었겠지만 일제강점기 때부터 좀 더 수심이 확보된 오늘날의 내항이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수행했으리라.

군산 내항 저편에는 요즘과 같은 봄철이면 실뱀장어잡이 어선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강물과 바닷물이 접하는 기수지역인 금강하구에는 특성상 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맘껏 오르내렸을 실뱀장어떼들이 매년 하굿둑의 어도(魚道)를 향한다. 어선들은 금값보다 비싼 실뱀장어떼들을 잡기 위해 어도의 길목을 에워싸고 있다.

내항 얘기를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언급되어야 할 공간은 동백대교, 군산수산물종합센터, 군산횟집, 도선장 …

수년 전 개통된 동백대교의 밑에는 군산수산물종합센터가 있다.

2003년 8월 준공한 이곳은 지역을 대표하는 수산물시장임에도 이웃 시‧ 군에 비해 노후화 및 접근성이 좋지 않아 시민은 물론 관광객 등의 외면을 자초했다.

이 때문에 리모델링 등을 거쳤지만 허사였고 조만간 그 인근에 다시 신축한다는 로드맵도 있다. 이곳을 헐어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건물이라니 그나마 기대될 뿐이다.

이곳에서 도선장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한때 동양 최대 회전문식당 ‘군산회집’이 있다.

 

동양 최대 회전문 횟집 ‘군산회집’… 코로나 19 폐업

동양최대 회전문 횟집이었던 군산회집이 코로나 19와 지역경제 악화 등으로 영업을 중단, 시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 사진= 투데이군산
동양최대 회전문 횟집이었던 군산회집이 코로나 19와 지역경제 악화 등으로 영업을 중단, 시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 사진= 투데이군산

 

이 횟집이 최근 코로나 19 확산 등의 여파로 약 40년 만에 폐업, 지역사회로부터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금동소재 군산회집은 ‘횟집 경영의 달인’으로 불리는 고(故) 최인식 회장이 1982년 개업한 군산과 전북을 훌쩍 넘어 동양 최대 횟집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다.

이 횟집은 직원 100여 명에 8층 규모(연건평 3300여㎡)의 전국적인 횟집이었다.

이곳은 과거 1980~2000년대 초반 전주~ 군산 벚꽃 100리 길의 최고 수혜 업소였고 지역횟집들의 롤모델이었다. 이 시절에 이 횟집은 한꺼번에 1000여명의 손님이 활어회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대성업이었고 심지어 서울 역삼동에 지점을 두고 운영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하지만 전국적인 명성을 자랑하던 이 횟집도 코로나 19사태의 직접적인 희생양으로 변했다. 물론 수년 동안 계속된 어려운 지역 경제 상황도 주된 원인이 됐지만 최근 코로나 사태로 일격을 당해 결국 손을 든 것이다. 이 시기가 코로나 19 확산으로 강력한 사회적 거리를 시행한 정점이었던 지난해 4월이었다.

군산회집의 폐업 원인은 창업주 최인식 회장이 작고한 수년 전부터 내부 시설을 제대로 투자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왔고 계속된 지역경제상황도 발목을 잡았단다.

게다가 창업주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은 아들이자, 현 건물주는 수도권에서 요식업 사업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면서 이곳의 영업에 애착을 보이지 않아 향후 영업 재개 가능성도 가물가물한 상태다.

이곳 사정을 잘 아는 인사는 경영난에서 비롯된 일반적인 폐업과 달리 군산에 대한 무관심과 냉철한 사업 분석 결과 등에 따라 자발적으로 문을 닫은 것이라 귀띔했다.

이 인사는 군산회집의 시장가치는 약 40~ 50억원에 달하지만 이는 그 본질을 잘 알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곳은 수십 년간의 축적된 브랜드 가치와 함께 바다와 인접한 자연경관, 엄청난 주차장 확보 등을 고려하면 매우 저평가된 것이라는 게 부동산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얘기다. 그렇다고 시장에 전격 매물로 던진 것도 아니란다.

한편 외식업 경영자 가운데 최초의 박사학위(경기대)를 받은 군산회집 창업주인 고(故) 최인식 회장은 호원대 식품외식조리학부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했을 뿐 아니라 전국외식산업 포럼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역횟집 요리문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그는 경기대 건축과를 졸업한 후 서울 등을 거쳐 군산에 안착했던 인사다.

 

횟집타운과 도선장… 장통선의 추억(?)과 타임머신

고군산군도 등 섬지역 여행의 첫 출발지였던 도선장이 옛 영화를 뒤로 하고 한산한 공간으로 전락했다. / 사진= 투데이군산
고군산군도 등 섬지역 여행의 첫 출발지였던 도선장이 옛 영화를 뒤로 하고 한산한 공간으로 전락했다. / 사진= 투데이군산

 

정든 님 떠나가신 군산항구에/ 끝이 없는 뱃길따라 노을만 진다/

~ 중략~

천리만리 가고 없는 미운 사람을/ 그리워도 보고파도 만날 길 없네

 

이는 이미자 노래‧ 백영호(1920~ 2003) 작곡‧ 조형식 작사의 ‘님 떠난 군산항’ 중 일부 가사 내용이다.

이미자의 ‘님 떠난 군산항’은 도선장과 그 주변을 지칭하는 곳이었겠지만 이 시기에는 군산항의 위상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군산회집에서 도선장 방향으로 몇 걸음을 더 옮기면 금동의 옛 도선장과 횟집들이 영업 중이다.

과거에는 호객꾼들까지 나서서 자신의 식당으로 유인하는 호객행위가 일반적인 광경이었지만 그런 모습은 아련한 옛 추억일 뿐.

도선장과 인접한 옛 토박이 횟집에는 2~3층의 경우 군산의 뱃사람들이 회포(?)를 풀었을 여관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그곳을 사진찍고 있으니 그 주변에 있던 이가 그 건물에 관심이 있느냐며 말을 건네왔다.

도선장쪽을 살펴보면 바다와 강물이 맞닿은 곳인지 몰라도 갯벌에서 먹이를 찾는 갈매기 떼들로 눈이 다가간다.

사람들이 다가가도 경계를 하지 않고 갯벌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며 먹이를 찾느라 여념이 없다.

한 젊은 부부가 봄기운이 완연한 오후, 어린 자녀와 함께 새우깡 등을 던지며 갈매기들의 먹이를 향한 창공에서 몸짓을 살펴보며 즐거워했다. 먹이를 찾던 갈메기 가족들도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그 주변을 에워싸며 가벼이 날고 있었다.

지금은 갈매기 떼만 북적이는 도선장은 본래 섬으로 향한 관광객과 주민들로 가득했었다. 지금은 유람선과 여객선 등을 타려면 비응도와 외항으로 가야 가능하다.

엊그제 도선장과 그 주변을 둘러보며 고교시절의 한 광경이 문득 스쳐갔다.

1980년 여름이었나, 그 이듬해였나, 아니 매년 반복됐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필자의 기억보다는 더 생생한 이들은 장항과 군산을 통학하는 중‧고학생들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장통생(장항통학생)들의 추억에는 언제나 남아 있을 얘기이자, 재미난 추억물로 아로새겨져 있겠지만.

어느 여름날, 필자의 모교인 J고의 교실 스피커 속에 빨려 들어가 그런 광경 앞에 멈춘 것이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에 막 도착해있는 사람들처럼 생생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풍랑주의보가 내렸으니 장통생 여러분은 빨리 집에 갈 준비하고 교무실 앞에 모이라”는 3년 내내 우리를 가르쳐주신 Y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생생하게 울리고 있었다.

당시 장통생들은 그 시절, 통학선이 갈 수 없는 경우 인근 여관이나 친구‧ 친척집으로 전전해야 했던 얘기들로 지금까지 재미나게 풀어낸다. 덤으로 나온 얘기들은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다.

군산사람들에게도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했던 추억과 청춘남녀들의 사랑 얘기 등등이 실타래처럼 쏟아져 나오기는 마찬가지다.

여객선이 한창 오가던 70‧ 80년대만 하더라도 장항항은 곧잘 승객들로 붐비곤 하였는데, 그중에는 멀리 전라도와 충청도 북쪽으로부터 오는 수학여행 학생들도 붐빈 승객으로서의 한몫을 했다.

당시 군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서해방송도 ‘파도를 헤치며’란 프로그램을 통해 양지역의 도선 운항시간 등을 알렸을 정도니 말해 뭐하겠는가.

그 전성기엔 객선이용객만도 1만 명 가까울 정도 늘어났고 운항시간 간격도 20분 안팎이었단다.

군산과 장항(서천)을 오가던 일도 1990년에 완공한 금강하굿둑 때문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육상교통이 추억의 장통선을 과거로 밀어낸 것이다.

그래도 20년 가까이 용하게 버텨냈다.

승객이 급감하면서 2009년 11월 1일, 무기한 운항 중단에 들어가면서 사실상 여객선 운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내항 도선장도 철거되기에 이른다.

교통수단의 대변화 때문에 옛 추억도 여기까지였다.

근대적인 의미의 군산과 장항 간 도선사업은 1934년경 처음으로 뱃길을 열게 된다.

그 이전에는 우리의 전통 나룻배들이 오갔으리라.

해방 후 여객선도 목선에서 철선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군산시가 처음엔 직영하다가 1984년에 군산시와 서천군이 공동 투자하여 설립한 ‘금강도선공사’로 운영권이 넘어갔으나 정부의 지방공기업 매각 방침에 따라 2001년 1월 향토기업 월명토건이 인수, 운영했었다.

월명토건은 도선사업에서 손을 떼고 유람선에 주력했다. 한때 성업이었지만 코로나 확산에 직격탄을 맞아 주춤한 상황이다.

장항에는 도선출장소를, 군산시는 금동에 도선사업소를 설치하고 여객선을 운영해왔다. 일반적으로는 장소가 수차례 바뀌었다지만 옛 도선장이 우리에겐 더 친숙한 곳이다.

금강 1호가 다니기 이전에는 배 이름이 군산호였으며, 군산호도 제1호와 제2호 두 대가 교대로 다녔을 정도였다.

80년대부터는 서천군에서 운영하는 서천호가 추가 운항했었단다.

누구 말대로 추억의 장통선을 운항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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