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0] 옛 군산진의 수덕산공원‧ 호남 개신교의 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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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0] 옛 군산진의 수덕산공원‧ 호남 개신교의 원류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3.09 07:58
  • 기사수정 2022-01-17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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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 드루 선교사 ‘ 전북 의료선교 열정 다바쳐’… 드루, 도산 안창호선생 후원까지
신흥교회‧ 군산해경 청사(옛 의료원부지)‧ 공화당(옛 군산상공회의소 건물)
전북선교에 헌신한 전킨, 구암교회 설립‧ 영명중학교‧ 궁멀예수병원 등 건립 앞장
젠킨과 드루 선교사 첫 기착지
젠킨과 드루 선교사 첫 기착지

 

수덕산, 아니 수덕산공원.

지금의 월명공원을 호위하듯 있었을 수덕산의 위용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졌고 군산진의 폐진(廢鎭)과 함께 그 운명을 다했다.

이곳이 과거와 같은 해발이었다면 군산항이나 금강을 오가는 각종 선박들은 한눈에 들어왔을 것은 분명하다. 지금도 이곳에 있으면 그런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보면….

군산개항 직후 그 역할은 사실상 끝났다. 해상을 이용한 일제 침략을 막기 위한 전초기지였는데 오히려 일제의 통제를 받으면서 존립의 근거를 완전히 상실했다.

이런 아픔에도 이곳은 의외의 꽃을 피웠다.

엉뚱하게 외국선교사들의 활동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우리의 근대의학과 학문을 수용할 수 있는 핵심통로가 된 것이다. 근대의 자양분을 맘껏 수용했다.

그 자양분은 처음에는 개신교의 정착과 함께 개화사상으로 무장한 근대선각자들의 활동 근거지로 충분한 작용을 했다. 후엔 근대독립사상의 핵심 뿌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군산서초등학교와 옛 군산상공회의소 건물 등을 등진 곳이 수덕산공원이다. 신흥교회와 가까운 곳에 있는 뒷동산과 같은 언덕이 바로 이곳.

찬바람이 여전한 군산의 삭풍을 받아가면서 군산신흥교회 주차장쪽에서 몇십미터 떨어진 수덕산공원으로 오른 초입에 ‘전킨‧ 드루 선교사 군산 첫 선교지 표지석’이 서 있다.

이들 벽안 선교사가 생뚱하게 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뭘까.

이들의 이곳 귀착은 당시 군산사회와 전북권에 엄청난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의료 선교사 드루가 탄 선교선이 닿았을 때 지금과 다른 형태의 지형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덕산 바로 아래에는 해변이었을 것이다.

 

젠킨과 드루의 군산 선교활동

드루와 전킨 선교사는 당시 수덕산 언덕의 한 곳에 초가집 두 채에 포교소를 마련했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가 1895년 3월이었고, 그들의 가족들이 합류했던 시기가 이듬해 초였다.

의료선교에 앞장서 선교 관할권을 넘은 금강과 만경강 강변마을 사람들을 치료했을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발생했다.

1899년 군산개항과 함께 일본이 수덕산을 중심으로 조계지를 할양받으면서 그 둥지를 옮기게 된 것이다.

구암동산으로 이전, 얼마 후엔 궁멀예수병원(구암병원)과 구암교회를 설립하고 영명학교와 도서관, 선교사 사택 등을 차례로 건축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이 지나자 전킨(1865~ 1908: 한국명 전위렴)은 병을 얻었다. 그런데도 전주서문교회 예배당을 신축하고 1908년 자신의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과 이별했다.

전킨의 부인 메리 레이번 선교사는 지금의 군산영광여고(멜볼딘여학교 후신)와 인연이 큰 사람이다.

그의 부인은 건강이 악화된 남편을 따라 전주로 이주한다. 그 후임  엘비 선교사(한국명 부위렴(불) 선교사 부인)가 자신의 모교 미국 메리 볼딘대학에 지원을 호소, 3층 교사를 신축했다.

이를 기리는 뜻에서 군산멜볼딘 여학교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드루(1859~ 1926: 한국명 유대모)는 1901년 미국으로 되돌아가 샌프란시스코 항만 검역관으로 살아갔고 한인교회와 도산 안창호 선생과도 인연을 맺었다.

드루는 1902년 12월7일자 서부 유력 일간지였던 샌프란시스코 클로니클(1865년 창간)신문과 도산 안창호 선생(1878~ 1938)이 인터뷰할 때 통역까지 해주는 등 한국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쏟았다.

그뿐 아니라 힘겨운 타향살이를 하던 빈털터리 도산을 경제적으로 도와 그의 독립운동을 격려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내용을 담은 중앙일보(2016년 3월) 보도가 도산학회 관계자들의 실증 자료와 증언 등에서 전해졌다.

한편 1925년 4월 창립한 신흥교회는 1945년 11월 영화동 소재(영화동 15-11) 일본인 교회당을 인수한 후 신흥정 교회에서 군산신흥교회로 개칭했다.

1980년 12월 현 소재지인 금동 26-9번지로 이전했다.

 

군산해경청사와 옛 군산의료원 부지

옛 군산의료원 부지에 자리잡은 군산해경청사
옛 군산의료원 부지에 자리잡은 군산해경청사

 

이곳에서 서남쪽의 월명공원 쪽을 내려보면 군산 해양경찰서 청사가 있다.

과거 100년 전에는 전혀 다른 배경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주변이 산중턱이었다는 점에서 파헤쳐졌을 것이지만 근대기에 관공서 건물들이 잇따라 건축됐다.

그중에 눈길을 끈 것은 금동소재 옛 군산의료원이었다. 1922년 2월 관립 군산자혜의원이란 이름으로 개설된 군산의료원은 도립군산병원(1925년 4월) 등을 거쳐 지방공사 전라북도 군산의료원(1983년) 등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옛 군산의료원 건물은 일본식 건물이었지만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됐다. 전후 복구작업으로 신축된 이 병원건물들은 몇 차례의 증축과정을 거쳤고 2002년 4월 지곡동 현 군산의료원 이전까지 군산은 물론 이웃 충남 서천, 부여, 보령권의 환자들까지 담당하는 서해권의 핵심 의료기관으로 역할을 했었다.

이곳을 거쳐 간 인사들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쌍천 이영춘 박사(해방 직후)와 이길여 길병원 설립자 겸 가천대 총장(1958년경)이 잠시 군산도립병원에서 근무했었다.

의료원 이전 후 수년 동안 빈 건물로 남아 있다가 군산해경이 2009년 8월 둥지를 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터가 세서 권력기관이 와야 한다는 말들이 무성했다.

실제로 이런 말들과 관계없이 해경은 소룡동 해경청사가 낡고 비좁아 이전할 자리를 잡으려다 시내권에 있는 이곳을 선택했는데 무슨 일인지, 서장 등 군산해경 고위근무자들의 잇따른 악재가 이어져 풍문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금동 청사 이전 후 당시 군산해경의 S 서장이 본청으로 전보한 후 불미스러운 일로 퇴직했는가 하면, P 서장은 중징계를 당한 바 있다.

이후에도 악재는 꾸준히 이어졌다. 2011년 11월 C 서장은 경비정의 갑판에서 실족사했고 얼마 전(2020년 6월) 전도양양할 것으로 알려진 A 서장은 직위 해제 등을 당하기도 했다.

이를 놓고 현 청사의 터는 영안실과 화장터 등이 있었던 곳이어서 “땅의 기운이 아주 세서 그렇다”는 호사가들의 말도 쏟아지고 있다.

 

금동 군산공회당 건물의 운명…

공회당→ 군산상의→ 해신동주민센터로 변모

이곳에서 조금 걸어오면 한때 군산소방서와 해신동 주민센터가 있다. 물론 크고 작은 공동주택들도 주변에 산재해 있다.

군산소방서는 개정동으로 이전한 후 금동소방파출소가 들어섰고 지금의 해신동주민센터 자리에는 과거에 엄청난 역사를 지닌 근대식 건물이 존재했었다.

옛 군산공회당 표지판
옛 군산공회당 표지판

그 화제의 건물이 과거 지역(마을) 회관격인 ‘군산공회당’이다.

해망굴과 함께 주변에 다수의 근대식 건물들 중 하나인 이곳은 1934년 4월 건축됐지만 시공관 기능과 청구물산주식회사의 부설학교인 청구여중의 교사, 군산상공회의소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군산상공회의소가 이곳으로 이전한 시기는 1992년 12월이었고, 필자가 도내 일간지에서 근무할 때인 1999년 5월에 당시 박노길 군산상의회장 등의 관계자들을 인사차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다.

나중에 군산상공회의소를 언급하는 차례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본래 중앙로1가 청사에 1970년 12월 신축했다는 것이 군산상의의 연혁에 나와 있다. 물론 일제강점기 화재로 오랫동안 군산상공회의소의 건물로 이용됐던 것도 이 건물(시공관)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청사는 1921년 8월 중앙로 1가에 신축됐지만 1930년 12월 화재로 사라졌다.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전전해온 상공회의소 청사는 1970년 12월 옛 경찰서 부지와 인접한 지금의 동남병원 건물에 위치했었단다.

하지만 이 건물이 개인에 팔리면서 1992년 12월 다시 군산공회당(시공관)으로 이전했다. 그러던 중 이전한 건물이 너무 낡아 위험등급 판정을 받은 탓에 급하게 조촌동 옛 청사로 2003년 6월 이전했다.

상공회의소 이전 직 후 이 곳은 헐렸다가 주차장 부지로 상당 기간 이용되기도 했다.

인근에 있던 해신동주민센터가 이곳의 과거 흔적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붉은 벽돌을 활용한 건물로 2016년 11월 신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밖에 이들 지역과 비교적 인접한 공동주택인 한신 88맨션(1989년 건축)은 모두 99세대로 되어 있고 한때 월명공원(公園)을 지칭한 경관인 공(公)세권으로 입지가 유명했다.

구영1길과 연접한 이 아파트 앞의 박가네(2006년 5월)란 음식점은 갈치찜과 물메기탕, 김치국 등을 요리하는 지역 맛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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