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3] 국내 양조산업 신화 옛 '백화'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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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3] 국내 양조산업 신화 옛 '백화' 주변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0.12.18 11:21
  • 기사수정 2022-01-17 0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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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아파트 주변 백화의 향기가 묻어나는 곳”
당시 군산, 양주․ 청주․ 소주 등 종합 주류 산업의 중심지…롯데주류 명맥
양조산업 메카 등극…고 강정준 백화 회장, 지역주류시장 천하통일
고 고판남 세풍그룹 회장 등 군산 경제 거두(巨頭) 숨결 그대로 남아

술이나 간장을 생산하는 양조산업은 보통 항구도시를 거점으로 발전한다.

프랑스의 고급 와인을 대표하는 생산지 보르도가 포도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토양뿐 만 아니라 그 지형의 완만함으로 인해 ‘달의 항구’라고 불리는 항구를 거점으로 한다는 것은 특이하다.

칠레의 와인 또한 항구도시 산티아고를 거점으로 발전했다.

 

물산풍부한 항구도시 특장 살린 군산… 양조산업의 발상지

미국의 맥주산업의 중심지인 위스콘신주(州) 동부의 밀워키도 항구도시다.

금속‧ 자동차‧ 건설기계등의 산업도 유명하지만 이 지역을 대표하는 미 메이저 야구팀의 이름이 ‘밀워키 브루어스(Milwaukee Brewers(양조업자들))’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항구는 양조산업의 최적지라 할 수 있다.

큰 강이 흘러 바다로 이어진다는 것은 너른 평야지대를 옆에 낀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수확된 미곡 등이 항구로 운송돼 신속한 가공을 거침으로써 양질의 원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술의 종류로는 증류주, 양조주, 약소주, 기타 제재주(리큐르= 혼성주의 하나) 등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마산이 1899년 개항된 이후 술과 간장을 만드는 산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군산과 목포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군산은 1906년 이후 일본인들의 경제적 지배가 강화되면서 양조산업이 발달했다. 물론 인천지역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군산에 이주해 온 일본인들은 대체로 생계형이었다. 그들은 행상이나 소매점을 통해 일제 잡화 판매나 주류를 다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양조산업에도 손을 뻗치게 됐다.

군산의 산업 형태상 양조산업으로 탈바꿈한 것은 시간문제였다. 물맛과 쌀과 같은 풍부한 물산, 인구 급증 등으로 주조장 설립이 러시를 이뤘다.

구영7길 주변에 있는 옛 법조타운과 과거 일본식 가옥들로 둘러싸여 있었단다. 인근 현대오솔아파트와 금동 동신아파트 등은 그야말로 100년 전 우리의 전통주를 만드는 주류산업과 전혀 다른 시도가 시작됐다.

월명공원을 끼고 있는 암반에 나온 맛좋은 암반수는 양조산업과 궁합을 맞추면서 도내는 물론 호남 양조산업의 메카로 우뚝 섰다.

묘하게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했다는 점에서 원도심권에 다소 떨어진 공간들을 이끌어내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해서 한꺼번에 다뤄야 이야깃거리가 될듯하다.

낙원 한정식
낙원 한정식

 

월명동 소재 낙원이란 식당은 강 회장의 아들이 한때 살았지만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고 나대곤 회장에게 넘겨져 한때 한정식집으로 영업하기도 했다.

인근 경암 고판남 회장(작고)이 수 십년간 살았던 일본식 고택도 있다.

이곳은 한국합판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고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주인이 바뀌었다.

최근엔 경기도 파주의 사진작가가 매입, 내부를 새롭게 꾸며 거주한다는 얘기가 한 방송 프로에 소개되기도 했다. 고 회장은 경암학원과 페이퍼코리아 부지 등을 다룰 때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고 회장과 약간 떨어졌지만 엄대우 전 국립공원이사장이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고 해방 전후 판‧ 검사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의 선친이 지역 최고의 시계점을 운영, 부를 축적했단다.

이 같은 이유로 이곳 주변은 군산의 경제적인 거두들이 집중적으로 살아 군산의 부촌이자 경제인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한편 군산경제거두들이 살았던 곳 주변에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과거 골목길 형태로 구영신창길이란 이름으로 주민들의 삶의 현장으로 남아 있다.

 

군산, 전국적인 양조산업 메카… 일제강점기 주조장들 우후죽순 생겨나

청주(淸酒)는 쌀로 빚는 양조주다. 말 그대로 맑은 술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다 보니, 청주는 일본식 표현인 '정종'으로 불리고, 일본 전통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청주는 우리 전래의 술로서, 일본에 건너간 술이다. 일본 고사기(古事記)에 관련 기록이 나올 정도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집에서 청주, 약주, 막걸리 등을 빚어 마셨다. 하지만 술빚는 일이 양조업으로서 기업화된 것은 대부분의 다른 업종과 마찬가지로 1900년 이후 일이다. 1909년 주세법이 공포됐고, 각 지방마다 주조장이 세워져 제법 규모화된 생산체제가 이뤄졌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 일제의 쌀 침탈 창구가 되면서 군산은 정미업과 양조업이 성행하는 계기가 됐다.

일본인은 술의 원료가 되는 쌀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또한 양질이 생산되는 호남평야와 인접한 군산에서 양조공장과 주류 판매점을 독점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군산상공회의소 100년사'에 따르면 개항 당시부터 군산에 세워진 주요 회사 및 공장은 1899년 상야주조장, 암본주조장, 1908년 적송장유 주조장, 1909년 향원주조장, 1920년 군산주조(주), 1927년 조선주조(주) 등 양조 업체들이 많았다. 이들 양조장은 대부분 일본인 소유였다.

청주공장 설립은 타지에 비해 늦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청주공장은 1883년 1월 부산에 세워졌고, 이후 인천과 부평, 서울, 마산에도 들어섰다. 군산에 청주공장이 세워진 것은 1917년으로 알려져 있다.

1915년 일본인 니시하라가 충남 논산에 조선주조(주)를 세운 뒤 ‘조화(朝花)’ 상표를 단 청주를 생산했는데, 생산이 늘어나자 1917년 군산에 조선주조 군산분공장을 설립해 경성(서울) 공급 물량을 맞췄다.

당시 전국에는 120여 개의 청주 제조업체가 가동됐으며, 군산의 청주공장은 조선주조 군산분공장을 비롯해 향원양조장, 상야양조장, 암본상점, 군산주조, 일본주조 등 모두 6개였다.

 

해방 후 양조산업 개척자 ‘인당 강정준 회장’… 백화양조의 영광과 좌절

옛 백화양조
옛 백화양조

 

‘물맛- 항구도시- 쌀생산 보고’란 산업적인 배경에서 군산에 양조산업의 기린아가 탄생했다.

해방을 맞아 고 강정준(호원대 설립자) 백화 회장이 백화를 설립하면서 군산이 현대적인 의미의 양조산업으로 한 차원 높게 성장, 발달한다. 그는 해방 후 열악한 국내 양조산업을 현대화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백화양조 창업주 인당(仁堂) 강정준(姜正俊) 회장(전 호원대 이사장· 2001년 4월 작고)였다.

해방 후 백화양조를 창업, 굴지의 주류기업으로 성장시킨 강 회장은 1915년 6월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강인지는 호조참판을 지냈고, 부친 강덕찬은 농업을 경영하면서 넉넉한 가세를 유지했다. 강 회장은 유복한 집안 환경 속에서 자라던 중 1931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했고, 와세다대학 상과에서 기업인의 꿈을 키웠다.

청년 강정준은 25세이던 1940년 귀국 후 조선주조 군산분공장에 취직, 일하던 중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일본인 공장장 다음 서열의 부책임자가 됐다.

군산분공장에서 경리와 판매책임을 맡아 일했던 강정준은 미군정청의 적산기업 관리방침에 따라 책임자로 선임됐고, 공장 내부를 정리한 후 1945년 11월 1일 청주 생산을 재개하는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아울러 귀속기업 불하를 겨냥, 새로운 회사 설립 작업을 벌였으며 1946년 5월 조선양조주식회사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대표 취체역에 선임되는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구영 신창길
구영 신창길

조선양조는 주질본위의 경영방침을 고수하며 품질향상에 힘쓰는 한편 49년 7월에는 자본금을 크게 늘렸다. 이어 새로운 주세법 시행으로 양조의 쌀 사용조치가 완화되자 1950회계연도에는 청주 생산을 확대했다.

특히 1950년 5월 8일 열린 제1회 전국 주류품평회에서 최우등상, 전국상공장려관 개관 전시회에서 우등상을 잇달아 수상하며 청주 전국 제패의 서곡을 올렸다

백화의 산실은 월명동 오솔아파트 등이 들어선 곳이다.

본래 강 회장은 메인 상표와 다르다고 해서 회사명을 바꿨다.

강 회장은 이 과정에서 ‘조화(朝花)’라는 회사명에 애착을 보였지만 논산의 동종 사업가와 분쟁에서 어려움을 겪자 ‘백화(白花)양조’로 정하고 본격적인 사업에 확대에 나섰단다.

특히 오솔아파트 주변은 호남의 술 전성시대를 열었던 곳. 다시 말해 군산의 위용이 전국적인 수준에 올랐을 때, 지금의 원도심은 수많은 업종(협력업체) 인사들이 오간 번화가였다.

금동의 88한신아파트 부지에 있었던 고려주조장은 백화에서 인수만 해놓고 별도로 활용은 거의 않았다. 그 주위에는 사이다를 만든 공장(삼양사이다)이 있었다 한다.

오솔아파트 주변 조형물
오솔아파트 주변 조형물

또 신흥주조장(양조장)이 있었던 금동의 동신아파트 부지를 기반으로 기타 재제주(위스키, 인삼주, 보드카) 등을 생산해왔지만 장소가 협소, 이전이 불가피했다.

70년대 경제 개발 시기, 경제인들은 접대할 곳이 많아졌고, 접대받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당시 조니워커가 접대용으로 크게 활용됐지만 가격 문제로 부담스러웠으므로 국산 양주의 개발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당시 여종업원의 팁이 3,000원이었고 국산 양주는 4,000원이었단다.

이 당시 가격대의 결정을 놓고 내부관계자들의 고민은 적지 않았다. 너무 싸도 제품의 질과 위상에 문제가 될 것 같아 첫 국산양주가격을 결정을 했다는 것. 나중에는 1만 원까지 올랐다.

백화는 이 때문에 인근에 있는 다원파크빌(과거 북중(오늘날의 중앙중)이 있었음)로 확대 이전한 뒤 우리나라 최초의 위스키를 출시한데 대량생산체제를 갖췄다.

이런 수요에 맞춰 나온 것이 1976년 ‘조지 드레이크’였다. 2년 뒤인 1978년 베리나인 골드는 84년까지 국내 위스키시장을 싹쓸이할 정도로 대히트를 쳤다. 이 양주들은 모두 원액 함량 100% 위스키가 아니라 수입한 위스키 원액에 주정을 섞은 술이었다.

당시 베리나인의 맛이나 패키지가 발렌타인을 모방했다 해서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발렌타인을 애호했단다. 그런 연유 때문에 아직까지 무의식적인 친근함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얘기도 있다.

현대오솔아파트가 위치한 곳에는 백화의 청주공장이 있어 오늘날 소룡동 소재 롯데주류공장(과거 두산공장)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이때 백화는 대명동 33빌딩 부지에 소주와 주정을 생산하는 공장을 가동했으나 소득수준에 따라 고급주 중심으로 시장이 변화될 것으로 보고 소주 사업권을 반납한데 이어 강 회장의 아들의 사업실패 등으로 급격히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된 것이다.

묘하게도 강 회장의 아들과 관련된 해괴한 살인 사건(?)이 발생,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백화의 쇠락을 불러온 전조처럼 보였다.

1973년 미원에 백화의 지분 3분의 1을 매각했고 두산에 1985년 12월 완전매각하면서 정은학원 만 남기고 사업에서 손을 놓게 됐다. 두산주류가 철수, 롯데주류로 넘어가 그 잔영들이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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