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맛' 대첩] 군산 떡갈비의 역사는?(6A)
상태바
[군산 '맛' 대첩] 군산 떡갈비의 역사는?(6A)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0.02.19 13:53
  • 기사수정 2022-01-14 1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전적인 갈비: 조선 인조때- 20세기 초- 1920년대 중반- 1940년대
현대적 갈비: 해방전후(군산의 갈비 시작)- 1950년대- 1970년대- 2000년대
지역대표 주자 완주옥의 떡갈비와 그 후예들로 나누는 척도
군산의 대표적인 떡갈비 '완주옥'/사진=투데이 군산 DB
군산의 대표적인 떡갈비 '완주옥'/사진=투데이 군산 DB

 

떡갈비, 갈비, 순대, 국밥, 통닭…

우리의 국민음식으로 등장한 이 음식들은 언제 시작됐고 어떻게 확산, 전국화되는 과정을 겪어왔을까.

오늘날 각광을 받은 음식을 만드는 곳이 집중된 군산의 골목길들은 여러 군데다.

국민은행 군산지점의 오거리에서 주변 소로 중 하나가 큰샘길이다.

이 구간은 개복교회 주변의 중앙로~ 구시장로가 연결되는 수백 미터 구간을 지칭하는 곳인데 이 주변에 다양한 맛집들이 포진돼 있다. 그야말로 월명동 원도심권의 맛집 골목길과 비견될 정도다.

어느 골목길이 군산의 대표 맛집들이 많을까. 시민들과 음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팽팽하다.

군산의 떡갈비 등장은

일제강점기 말과 해방직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 갈비와 현대적 갈비를 이어주는 시기였다

하지만 분명한 맛집 중 하나가 ‘완주옥’이다.

완주옥은 군산떡갈비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독특한 맛을 자랑한다. 물론 다른 후예들의 맛 도전도 거셌다. 이런 흐름 때문에 과거 문동신 시장시절에 이를 특화하는 방안도 검토했었다. 이 방안이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군산의 맛집들을 육성하는 차원에서 의미는 적지 않았다 할 수 있다.

완주옥
완주옥

완주옥의 떡갈비.

어디에서 왔을까. 이에 우리나라 갈비의 유래와 다른 지역의 갈비 역사를 다뤄보자. 그리고 군산의 떡갈비의 역사와 그 후예들의 도전기를 살펴보고 새로운 군산만의 음식을 기행해보고자 한다.

군산의 떡갈비 등장은 일제강점기 말과 해방직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 갈비와 현대적 갈비를 이어주는 시기였다 할 수 있다.

굳이 떡갈비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나누면 이렇다.

고전적인 의미로는 조선 인조때- 20세기 초- 1920년대 중반- 1940년대였다 할 수 있지만 오늘날의 갈비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직후였다고 볼 수 있다. 현대적 갈비의 시작인 해방전후(군산의 갈비 시작)- 1950년대- 1970· 80년대- 2000년대 등의 시기를 거쳤다.

이런 시기별 기준으로 군산의 떡갈비 시작은 고전과 현대적인 의미를 교차하는 시점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으로 본다.

평양갈비

수원 왕갈비

부산과 서울 갈비 

◆乫非가 오늘날의 갈비?… 그 탄생은 언제?

조선 인조 17년(1639년) 6월24일자 승정원일기(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날마다 다룬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에 갈비(乫非)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조상 때부터 갈비를 좋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갈비가 본격 외식문화로 자리 잡은 것은 1920년대 중반 이후다.

이 시기의 갈비는 대중 선술집에서 먹는 저렴한 서민음식이었다.

갈비가 새로운 변신한 것은 일제강점기 후반부다. 1940년대 이후 요정 등과 같은 고급식당에서도 파는 비싼 요리로 몸값을 한 차원 높인다. 불고기, 스키야키(일본식 전골요리) 같은 요리와 비슷한 가격에 팔렸단다.

본래 갈비찜과 갈비탕은 질긴 갈비를 먹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다.

1980년대 소비수준과 식습관 변화 등으로 갈비가 가족외식의 중심으로 입지를 확고히 한다. 양념을 하지 않고 굽는 생갈비는 1990년대 본격으로 등장하고 각종 변형된 갈비들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런 흐름은 군산도 흡사했지 않았을까.

평양갈비… 음식문화의 선도

본격적 외식으로 본 갈비문화는 평양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자 대체적인 시각이다. 20세기 초 이미 평양에 ‘평양우(牛)’라는 농사에 쓰는 일소가 아닌 고기를 생산하기 위한 육우(肉牛)가 있었단다.

갈비는 불고기와 더불어 평양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외식용 음식이었다. 1929년 잡지 ‘별건곤’(1926년 11월 창간된 월각문학잡지로 1934년 101호만에 폐간됐다)에 따르면 평양에 갈비집이 생긴 것은 1920년대 중반이후라고 나온다.

평양갈비는 암소 갈비를 크게 썰어 설탕을 쓰고 않고 굵직굵직한 석쇠로 굽는 것이 특징이다. 평양갈비가 판매된 이후 갈비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지역의 특성을 살린 갈비들이 각지에서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예를 들어 수원 왕갈비, 포천 이동갈비, 안동갈비, 담양 및 광주갈비, 함안 안의 및 거창 원동갈비찜 등으로 분화했다. 이런 물결이 오늘날의 우리나라 갈비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군산의 갈비역사는 1950년 안팎에 완성되는 단계였을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의 기억에서 가장 오래된 갈비집의 대표는 누가 뭐래도 완주옥이다.

당시 물산이 풍부한 군산의 특성으로 볼 때 일제강점기에 자리 잡은 것이 지금의 갈비 직계 조상격일 것으로 추정된다.

소금으로 간한 수원 왕갈비

수원 싸전거리에 있던 해장국집 ‘화춘옥’은 1950년대부터 갈비를 숯불에 구워 팔았다. 이곳에서 시작된 수원식 갈비는 길이 12cm정도로 크게 썬 왕갈비를 소금으로 기본 간을 해 굽는다.

1924년 이용기가 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옛날 갈비 고명은 간장을 쓰지 않고 소금을 기본양념으로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오늘날의 수원갈비와 흡사하다.

화춘옥 주변에 갈비집이 하나 둘씩 생겨나면서 1960~ 70년대 수원싸전거리의 갈빗집들은 군락을 형성한다. 1970년대 말이 되자 수원에도 불어온 재개발 덕에 싸전에 이던 갈빗집들은 수원지방법원 주변으로 대거 이동하게 된다.

1980년대에 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자가용을 가진 마이카족이 등장하면서 수원근처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과 민속촌 등에서 여가를 보낸 사람들이 대거 수원을 찾아 수원갈비를 먹고 돌아갔다.

이런 과정에 수원갈비의 전성시대가 열렸고 전국적인 갈비중심도시로 우뚝 섰다.

부산 다이아몬드 커팅의 시작

간장 양념이 배이도록 갈빗살에 지그재그 칼집을 넣는 다이아몬드 커팅 등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소갈비 문화의 기본은 부산에서 시작됐다.

부산갈비문화를 이끄는 양대 축 중 하나는 국제시장.

시장에는 1952년부터 암소갈비 전문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릴 정도였다. 국제시장 안쪽 신창동 3가 주변에는 쇠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모여 있다.

1950년대 후반에 개업해 지금도 영업하고 있는 평양갈비는 석쇠에 간장을 기본으로 한 소갈비를 구워 판다.

국제시장과 함께 부산의 갈비문화를 이끈 쌍두마차는 해운대였다.

1975년 당시 부산의 쇠고기 소비량은 서울(1인당 3.22kg)보다 많은 3.38kg으로 전국 최고를 자랑했을 정도다. 해운대 소문난 암소갈비는 1964년 지금 자리에서 창업했다. 간장을 기본으로 했지만 생갈비처럼 보일 정도로 살짝만 간한다. 다이아몬드 커팅 유행도 이 집에서 주도했다. 갈빗집을 창업하기 전 동래 요정에서 일본인들에게 칼집 내는 것을 배운 창업자의 기술이 깃든 조리법이다. 하루정도 숙성시킨 갈비를 숯불에 전골 불고기 불판처럼 생긴 오목한 철판을 얹고 굽는 것도 이집만의 특성이다.

서울식 갈비의 탄생

1929년 9월27일자 별건곤에 따르면 ‘3년 전 전동 대구탕집에서 갈비 구워 팔기 시작한 뒤로 여러식당이 생겨 사진판에 박은 것처럼 의례 대구탕‧ 백숙연계‧ 군갈비를 팔게 됐다’고 적고 있다.

1946~ 1950년 소위 해방공간에 발행된 신문에는 고급 요릿집에서 파는 갈비탕과 갈비구이, 갈비찜 같은 갈비가 메뉴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1953년 문을 연 연남서식당은 서민적 갈비문화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갈비 기름과 심줄을 제거해 간장으로 인한 양념 갈비를 판다. 창업 때부터 서서 갈비를 먹는 방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격적으로 가든(Garden)형 갈비문화는 1981년 강남 논현동에 문을 연 삼원가든에서 시작된다.

삼원가든의 성공은 1년 만에 강남에 갈비 가든 시대를 활짝 열었단다. 이 식당의 창업주는 강남 땅 부자들의 공한지를 싸게 빌려 정원형 가든(Garden)을 지었다. 초기에 서울 대형 갈빗집에서는 수원의 갈비 기술자를 많이 고용했지만 간장을 많이 쓴 서울의 먹을거리 방식이 결합해 달달한 간장양념을 사용했다.

갈비를 양쪽으로 갈라내는 양 갈비에 다이아몬드 형태로 칼집을 낸 갈비가 만들어졌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마블링이 가득한 고급 쇠고기가 등장하자 생갈비 문화가 본격화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밖에도 포천이동갈비와 대구 경북갈비 등도 전국적인 흐름 속에 있지만 이중 대구의 경우 진갈비와 1970년대 전국 처음으로 생갈비 명가(名家)들도 대단한 지역의 맛을 대표했단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