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어‧귀촌에 성공한 사람들⑧] 낚시어업 군산 비응도 김형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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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어‧귀촌에 성공한 사람들⑧] 낚시어업 군산 비응도 김형준씨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0.09.22 16:26
  • 기사수정 2021-03-16 09:23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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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귀어‧ 귀촌 준비 통한 어업 종사 2년째 재미 ‘쏠쏠’
군장교생활‧ 음식점사장‧ 골프장 근무‧ 공시족 등 거쳐 안락한 어업인 삶 만족
매일 새벽 2시30분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일 소화… 비응도항 최고 바쁜 사나이로 등극
블로그 작업 등 SNS 활용 영업전략 극대화… 늦어도 올해 말엔 신혼의 단꿈도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그날 일어난 낚시객들의 생활상과 자신의 어선 운항 경험담을 담은 일종의 바다 일기를 쓰는 40대 초반의 선장이 있다. 바쁜 일정에도 낚시 관련 블로그를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열혈 귀어‧귀촌인의 얘기다.

그 주인공이 군산 다온호(9.77톤급)의 선장 김형준(43)씨다.

9월 21일 오전 비응도항에서 연중 가장 바쁜 어촌 생활중에 있는 형준씨를 만났다. 보통은 가을철이 시작되면 그는 물론 일반 어업인들과의 약속하는 것도, 만나기도 힘들 때지만 다행스럽게 선체를 점검하기 위해 짬을 내 뭍으로 나왔다는 소식에 비응도항의 일명 부잔교에 정박한 다온호에 승선, 인터뷰를 청했다.

처음에는 키가 크고 무뚝뚝한 인상의 어업인이라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얘기를 건넸는데 이른 새벽부터 일해온 터라 몸이 극도로 피곤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됐다.

본격적으로 형준씨와의 대화가 무르익자 처음 이미지와 달리 청산유수처럼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쏟아냈다.

그의 어업인으로 사는 인연과 에피소드, 다른 직업을 전전했던 인생이야기 등등…

그는 어렸을 적에 다른 친구들을 이끄는 타고난 리더십을 갖고 있어 고향인 경기도 동두천시의 한 고교를 다닐 때 학생회장 선거에 나서는 등 학창시절 내내 그런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단다.

대학 진학 후에도 그런 성격은 그대로 발산됐다.

사범대로 진학, 교사를 꿈꾸면서 ROTC(학군단)생활을 했고 졸업과 함께 장교로 임관됐다.

최전방부대에서 28개월 간의 군 생활을 했었는데 장교로 근무한 경험이 자신의 인생 좌표에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그 생활로 얻었던 통솔력과 책임감은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만든 중요한 자양분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군 생활을 하는 중 대학 시절의 낭만적인 생각과 달리, 교사로 직업을 선택하기보다는 다른 일을 꿈꾸기도 했다. 제대 후 고향에서 식당일을 하신 어머니를 돕는 자영업자로 사회의 첫발을 내디뎠다. 모친이 운영하신 음식점은 닭갈비집이었다. 처음에는 장사가 제법 되는 편이었지만 이 분야에 부족한 경험이 발목을 잡았다.

더 이상 음식점을 운영할 수 없어 부동산 관련 영업직으로 직업을 바꿨다.

오피스텔과 같은 부동산 매매는 물론 경매 등에 눈을 떠서 돈을 꽤 벌었고 더 나아가 토지 보상 업무 분야까지 발을 넓혔다. 적극적인 성격과 꼼꼼한 일 처리 능력 때문에 그 분야에서 상당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변화무쌍한 업무 성격상 평생 직업으로 삼기에는 뭔가 채워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움푹진푹하는 삶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끝없이 밀려왔고 다른 분야로의 도전도 계속됐다.

다시 안정된 생활을 꿈꾸면서 취준생의 길도 도전했다.

이른바 공시족(公試族)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힘든 수험생활도 문제였지만 공직자가 되기 위해선 엄청난 기회비용이 필요했다. 분야별로 다를 수 있겠으나 높은 경쟁률과 나름의 운(運) 등에 좌우되는 결과도 적지 않아 수년의 세월만 흘러보내고 공시(公試)와 이별했다.

그 기간 내내 돈을 벌면서 생활해야 하는 취준생 신분은 고시원 총무 등으로 기본적인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나이가 들수록 고역이자, 어려운 인생길이었단다.

더 늦기 전에 천직을 구해야겠다는 절박감이 커졌지만, 손에 닿지 않았다.

그동안 부동산업무나 군 장교생활 등을 담은 이력서를 내밀었더니, 고향 인근에 있는 큰 규모의 식당과 함께 골프장을 운영하는 어느 기업인이 괜찮은 조건을 제시하며 같이해보자고 제안했다. 연봉 등에 끌려 그 회사에 근무하게 됐는데 고된 생활, 연속이었다.

새벽 5~ 6시부터 늦은 밤까지 일해야 했을 뿐 아니라 주말에는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일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단다. 전문적인 부동산업무 경험 등을 살려 전임자들이 하지 못한 난제 20~ 30가지의 업무를 순조롭게 처리,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인정도 받았다.

문제는 휴식 시간에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곳이었는 데다 그곳의 직장 선배는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도 그만두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오너의 전횡도 만만치 않았단다.

휴식도 없는 회사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서글픈 생각들에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 나왔을 때도 있었다.

선배들처럼 그 나이에 "(내가)명퇴당한다면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고, 어떻게 노후를 준비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걱정 아닌, 걱정이었다.

/사진=투데이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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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그런 바쁜 나날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도 틈틈이 강태공(?) 생활을 취미로 삼았다. 그 여유는 톱니바퀴와 같은 바쁜 직장생활에도 나름의 활력을 더해줬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자 인생의 틈바구니였다.

이 무렵, 솔깃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충청권으로 귀어‧귀촌한 아는 선배가 자신에게 어업인의 길을 걸어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를 했는데, 그 무엇인가가 내면 깊은 곳을 강타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다 내려놓고 지금 하는 일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폭풍우처럼 몰려오면서 더 늦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서자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즈음이 38살(2016년쯤) 되던 때인 지라, 주변의 만류도 상당했다.

특히나 그를 아끼는 친구들의 반대는 극렬했다. 스펙과 능력을 갖춘 그가 인생의 절정기에 미지의 직업을 갖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일이라는 우정어린 걱정이 그 이유였다.

의외로 어머님과 동생은 담담했다.

30대 초반까지는 하루빨리 결혼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어머니는 ‘이젠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며 이해를 해주셨고, 결혼한 동생도 그를 응원했다.

이런 결단에 영감을 준 선배가 있는 ‘충남 보령시 무창포로 갈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고민을 거듭했다. 충분히 물색하고 검토해야 실패를 줄일 수 있다는 주변의 충고와 경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제주도와 여수 등지는 물론 부산에도 수차례에 걸쳐 오갔다.

귀어‧귀촌의 삶을 확고하게 결정한 후에 부산광역시 기장군에서 귀어‧귀촌 교육 및 프로그램 등을 이수했다.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수도권에서만 살아온 형준씨는 무턱대고 제2의 고향에서 천직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매사가 불여튼튼이라!

부산지역을 다녀온 뒤에 제대로 배우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그는 연고가 전혀 없는 군산시 옥도면 비응도항에서 낚시 어선의 사무장 일부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이 후에 좋은 경험이 될 거란 막연한 생각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멘토가 없는 바다 생활은 다양한 경험이 매우 중요하지만, 자칫 귀어‧ 귀촌의 호기를 놓칠 수 있다는 문제점도 항상 뒤따랐다. 직접 해보는 것과 남의 일을 보조적으로 하는 그런 일은 전혀 다른 성격이란 점에서 그렇다.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단순한 사무장 생활을 하면서 3년의 세월을 그렇게 허비해버렸다.

물론 실전에서 배를 조종하는 방법과 낚시 손님들을 응대하는 법이야 배웠다지만 어선 선장의 노하우(?)를 터득하는 것과는 멀어도 한참 먼일이었다.

그런 시기에 제대로 된 귀어‧귀촌 어업인 선배를 만났더라면 적어도 불필요한 일들이나 시간을 허송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동안의 인생 풍파를 흘러 보내고 본격 귀어‧ 귀촌 생활에 돌입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바다는 곳곳에 암초가 있어 생각대로 모든 문제가 풀어지는 게 아니었다. 귀어‧ 귀촌 준비를 마치고 배의 건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업허가 규정이 바뀌는 바람에 예정보다 진수가 두어 달 늦어진 것이다. 당장 생활하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는데, 이를 알게 된 지역 낚시협회장님의 소개로 임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난 분이 오드리호 서용석 선장님이었다.

그 배의 사무장으로 약 40~50일간 일을 하게 됐고 그분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가 마침 9월 주꾸미 출어 시즌이어서 건조된 배를 가져올 수 없을 만큼 바빴는데도 그분이 친히 목포까지 내려와 주셔서 비응도행이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그 때의 인연으로 그분은 수시로 살뜰히 챙겨주시는 등 멘토 역할을 자청해주셨고 그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고.

형준씨는 이때 그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하는 아찔한 기억들이 지금도 떠올려지곤 한다. 물론 평생 빚으로 알고 친형님처럼 모시며 은혜를 갚아나가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드디어 2019년 10월 초 어선의 선장이 됐다.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그의 오랜 꿈이었던 어선을 구입한 뒤 ‘모든 복이 온다’는 말을 의미하는 ‘다온’의 뜻을 살려 자신의 꿈을 향해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자신의 애마이자 전부라 할 수 있는 ‘다온호’의 선장이 된 것이다.

“충남 보령시 무창포 등보다는 군산 연‧ 근해의 여건은 훨씬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다른 구역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어족자원이 있어 어업인에게는 미래의 희망이 창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곳에서 열심히 일하면 먹고사는 것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

그가 이곳저곳을 오가며 들었던 소중한 말이었다 할 수 있다. 언젠가, 비응도에서 낚시배를 운영하는 한 선장님을 만났는데 그분의 금과옥조와 같은 분석을 새겨들었다.

이곳으로 온 것도 전적으로 그분의 조언 덕분이었다.

고군산군도의 어족자원은 과거 칠산어장의 황금기보다는 못하지만, 광어‧ 돔·우럭‧ 주꾸미‧ 갑오징어 등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어족자원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게다가 꽃게와 함께 최근에는 문어, 멸치까지 잡히고 있어 먹고 사는 데 문제는 없어 어업인 선배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행운이 따랐다는 생각이다.

첫해인 작년 수입은 생계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2019년 12월까지는 어느 정도 수입을 창출했으나 비수기에는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들었단다.

기름값과 대출금 등을 고려해서 고기를 잡지 못하는 때에는 대리운전이나 막노동 등 일종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보충하며 겨우겨우 지탱했다. 그래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어서 심신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단다.

어떻게 시작한 일인데. 정책자금과 친지‧ 친구 등의 소중한 돈을 빌려 겨우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됐는데 ‘힘든 일 때문에 내 운명을 절대 포기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며 마음을 곧추세웠다. 아니, 다잡고 다잡았었다.

그래도 고군산군도의 부속 도서인 비응도는 자신의 소중한 꿈을 가꾸는 낙원과 같은 곳이리라!

첫해 경험을 살려 올해는 강렬한 젊음으로 맞섰다.

낚시성수기가 되면 새벽 2시30분에 일어나 일과를 시작했고, 늦은 밤까지 강행군을 소화했다. 비응도에서 가장 빨리 일어나 가장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통하고 있다.

올해도 어느덧, 9개월이 넘어서는 시점에 비응도항의 낚시 어선들중 중간 정도의 수익을 올리는 어업인으로 성장했단다. 초보 어업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진정한 맛을 알아가는 2년 차 어업인의 삶에 자족하고 있단다.

성실하고 부지런함이 필요요건이라면, 그 분야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와 공부하는 자세가 필수적인 일이라고 그 나름의 성공의 조건을 정의하고 있다. ‘고객들이 낸 수고비만큼 고기를 잡지 못할 때는 최소한 그들이 만족할 정도로 곳곳을 오가는 친절함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그만의 철학이다.

그만의 안착 비결은 그날그날의 조업이나 손님의 일상을 다룬 내용을 부지런히 블로그에 올리고 있는데 그 반응도 상당하다. 조횟수만도 매번 200~ 300건씩 올라온다는 귀띔이다. 이런 성실함과 노력 등이 알려지면서 새내기 어업인의 딱지를 뗄 수 있을 정도로 고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운도 실력이란 말이 맞는 걸까.

자신이 얼마 전 태풍 때문에 피항하고 있던 때에 우연히 핸드폰 벨이 울렸는데 내용인즉, 그의 차를 주차장에서 실수로 부딪쳤다는 것이었다. 일을 마치고 충돌 부위를 확인 후 “극히 경미하니, 비응도항에 오시는 길이 있거든 캔커피라도 사주시면 좋겠다”고 농담하고 흔쾌한 답을 보냈다. 그분이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하더니 알아듣고 껄껄 웃는 것이었다.

이런 에피소드를 잊고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뜻밖의 손님들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8.15 집회 이후 코로나 19 전국 확산으로 심각한 상황으로 내몰릴 때였다. 후에 그 원인을 알게 됐는데 교통사고와 관련된 진객의 호의 때문이었다.

당연한 판단이었는데 이런 복으로 오다니……스스로가 더 놀랐다.

형준씨는 다른 곳과는 달리 자신은 밀려드는 낚시 손님들로 일손을 멈출 수 없을 정도라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조금씩 사업이 안정기로 접어들지만, 요즘도 두 가지 원칙만은 꼭 지켜 간다고.

일할 땐 최선을 다하되 5~ 6일에 적어도 한 번은 반드시 휴식을 취하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돈을 버는 일도 중요하지만, 소중한 귀어인의 길을 선택한 제1의 목적은 여유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방편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또한, 그가 사무장 생활을 하면서 배운 소중한 자산은 ‘바다를 두려워(또는 무서워) 해야 한다’는 어느 선배 선장의 충고를 가슴에 깊게 새겨 두고 있다. 바다는 엄청난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와 조심스러운 항해를 해야 한다는 말, 다름 아니다.

형준씨는 처음 뱃일을 이곳에서 시작했을 때 서러움 등을 생각하면서 길잡이를 해줄 수 있는 여건 조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며 인터뷰 내내 새내기 어업인들의 귀어‧ 귀촌인들의 안착을 위한 멘토제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자신도 초보 어업인일때 큰 도움이 됐던 것처럼...

안착된 어업인의 삶이 서서히 다가옴에 따라 연말께 신혼의 단꿈도 계획하고 있단다. 아등바등 살기보다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꿈꾸며 오늘도 고군산군도 앞바다 곳곳을 누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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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2020-10-11 04:06:18
멋진분 이니다
화이팅하세요

김경태 2020-10-11 10:49:38
12월 결혼 축하 합니다.
삼락 피싱클럽 왕조아

마구자비 2020-10-11 11:27:26
최선을 다하는 선장님,많은사람들이 찾아주는 선장님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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