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어‧귀촌에 성공한 사람들⑦] 자망어업 옥도면 양선옥‧ 김완호씨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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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어‧귀촌에 성공한 사람들⑦] 자망어업 옥도면 양선옥‧ 김완호씨 부부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0.09.21 09:14
  • 기사수정 2021-03-16 09:2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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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청도 억척 어업인 부부 탄생… 자망어업 종사 2년째 재미 ‘쏠쏠’
부인 양선옥 생소한 어업인 삶을 살고 있지만 하루하루 즐거운 인생
아픔 이겨내고 재결합 통해 자녀들 잘 키워 부모 역할 톡톡
SNS와 인터넷 판매 통한 유통망 적극 활용 계획도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천혜의 섬 어청도에 살어리랏다.”

수년 전에 어청도로 귀어‧ 귀촌한 양선옥‧ 김완호씨 부부는 동네가 다 아는 억척 부부다.

익산에 살았던 양선옥(48)씨와 어청도가 고향인 남편 김완호(52)씨는 2015년부터 어청도에서 예비 어업인으로서 재미나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국적인 풍토를 고려한다면 남편이 먼저 소개되는 일이 통상적인 접근일 것이다.

부부 중에서 부인의 활동을 중심으로 취재한 이유는 간단하다. 육지에 살아서 바다와 관련된 일은 매스컴에서 보는 것이 전부였던 부인 선옥씨에게는 제2의 고향 어청도와 그곳에서 일어나는 광경은 흥밋거리요, 재미난 일상들이다.

선옥씨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작은 단초가 ‘새내기 여성 귀어‧ 귀촌인’이라는 ‘휘발성 화젯거리’란 점을 고려했다. 이점은 완호씨도 충분히 이해했을 터.

‘늦깎이 어업인’ 선옥씨는 수년 전 남편 완호씨와 만나 그때부터 바닷일을 경험하며 재미 삼아 살아가고 있는데 매사가 긍정적이다. ‘긍정 바이러스’가 넘쳐난다는 말이 아마 더 정확한 단어일 것이다.

선옥씨가 어청도로 시집온 사연은 우연한 기회에서 비롯됐다.

우여곡절 끝에 홀로 아이들을 키워왔는데 지인으로부터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줄 테니 꼭 만나보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잦은 만남을 통해 일종의 동병상련(同病相憐) 때문인지 몰라도 가까워져 갔다.

선옥씨는 과거 익산에 살았을 때는 직장과 집, 아이들만 아는 도무지 세상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 집순이(?)였다. 이런 그녀에게 어느덧 인연으로 다가온 남편은 “그 당시를 얘기하며 우물 속에 있는 사람을 (자신이)세상 밖으로 이끌어 준 은인”이라며 으쓱해 한다고.

그런 만남이 이어지면서 믿음이 쌓이고 쌓여 얼마 후 결혼에 골인했다.

처음에는 귀어‧ 귀촌까지 생각하지 않고 군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살아가면 먹고사는 것에는 지장이 없을 듯했다. 남편이 구해온 신선한 생선을 활용한 마케팅을 하면 더욱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남편 완호씨가 어청도 출신이고 시어머님까지 살고 계시는데 정부에서 장려하고 있는 제도를 활용하지 않고 있느냐는 주위의 성화를 듣고 고민을 거듭했다. 실제로 남편 완호씨는 그동안 운반선이나 각종 어선 등을 다루면서 생활하고 있었고 때로 전어 및 낚시배 등을 타는 베테랑 선장이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얘기였다.

완호씨가 몰던 배에서 잡은 각종 어류들로 넘쳐났다.

문제는 월급장이 선장이었다. 처음에는 월급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것이 안정적이어서 그동안 단순하게 살아왔는데 실적이 좋든, 좋지 않던 그에게 떨어지는 수익은 고정불변이었다. 주변 지인들은 ‘(그에게)왜 남 좋은 일만 하느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른바 남의 집 생활로 그렇고 그렇게 산다는 입방아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거듭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런 삶을 도전하려면 딱히 벌어놓은 것이 없는 그들 부부에게는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더 늦기 전에 뭔가를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는 계속됐다. 이때 가장 알찬 정보와 상담을 해준 곳이 전라북도 귀어귀촌종합지원센터였다. 그곳에서 상담을 통해 곧바로 결행에 옮겼다.

이렇게 시작해서 귀어‧ 귀촌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하느라 전력을 다했다. 예비지식을 얻어 수협 등 관련 기관 정책자금 대출방법 및 그 한도액 등은 물론 주변 선배들에게 정보를 하나둘씩 수집하며 도상연습을 끝냈다. 이런 정도면 충분한 준비를 한 것이라 생각했다.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하지만 혹독한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겨우 적당한 배를 찾아 구입조건 등을 맞춘 후 드디어 꿈에 다가가는가 싶었다. 아니 잠을 자면서도 꿈을 꿀 정도로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완호씨가 군산수협 조합원이었던 만큼 그곳에 달려가 무턱대고 문을 두드렸다.

인근 금융기관을 방문, 상담을 통해 어느 정도 대출금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이제야 되는가 싶었는데 황당한 얘기가 들려왔다.

수개월 동안 중고 자망어선(4.99t)을 사기 위해 곳곳을 누비면서 쉴새 없이 찾아다녔는데…….

그 금융기관은 사정이 좋지 않아서 대출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온몸에 힘이 탁하니 빠졌다. 하지만 여기에서 꿈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주 소재 수협중앙회까지 찾아갔으나 이번에는 신용등급이 발목을 잡았다.

지인들이 그러지 말고 김제수협이나 고창수협도 관련 대출업무를 하니, 찾아가서 상담을 받아보란 조언을 했다.

가는 곳마다 분통 터지는 상황만 생겼다.

‘돈’ 얻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 어려웠고, 그야말로 홀로 첩첩산중에 있는 것 같은 중압감이 몰려들었다.

한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한 끝에 고창수협에서 대출을 해주겠다는 희소식이 왔다. 부부는 손을 잡고 기쁨과 환호를 내지를 정도였다.

이런 들뜬 마음도 잠시였다.

문제는 대출액이 턱없었다.

중고어선이어서 그렇다니, 톤수에 따라 달라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등과 같은 대출담당자의 설명이 아닌 최종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배는 겨우 마련했는데 어선을 활용할 그물과 같은 필수 어구를 계산에 넣지 않아 또 다른 돈을 얻기 위한 고행은 계속됐다.

귀어‧ 귀촌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아니, 돈을 빌리기 위한 고달픔의 연속이었다는 말이 더 맞는 소리였을 것이다.

부족한 수천 만 원도 사채를 얻어 겨우 채웠는데 확정된 대출금도 원래 어선 주인에게 직접 송금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와 달리 이렇게 제도가 변경된 것은 그동안 일부 대출받은 어업인들이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많아 그렇게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선옥‧ 완호씨 부부들처럼 귀어‧ 귀촌을 하려는 초보 어업인들에게는 고행길이자, 금융 장벽은 너무도 크게 다가왔다.

“귀어‧ 귀촌 생활을 수년간 준비해왔는데 이렇게 어렵다니, 참으로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정책자금 등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목적이겠지만 이 제도의 취지와 동떨어져 말이 제대로 안 나올 정도였어요.”

이들 부부에겐 지금도 그때의 절박한 상황을 생각하면 가슴이 짓눌려 올 정도란다.

선옥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대출금 때문에 꿈을 포기하려는 마음을 하루면 수없이 했을 정도니, 다른 예비 귀어‧ 귀촌자들의 아픔은 말해 뭐하겠는가.

이런 고통은 이들 부부에게 백신이자, 더욱 더 노력하라는 채찍으로 작용했다.

그동안의 힘겨운 상황은 귀어‧ 귀촌의 안착을 위한 또 다른 과정이었나!

드디어 수년간의 귀어‧ 귀촌 준비를 끝냈다.

이때가 2019년.

왕초보 어업인의 꿈이 그렇게 이뤄진 것이다.

특히 섬 생활이 어업인으로서 적성이 맞는 것 같다는 선옥씨는 여느 날 사리 때면 마을 공동어장에 나가 홍합‧ 해삼 채취에 나서고 있는가 하면 계절별로 바지락 따는 일에서부터 김 채취 등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평생 살아온 동네 아낙처럼 변해갔다.

동네 사람들과 교류하며 공동작업을 하는 일과에 푹 빠졌다. 자신의 부지런함을 가지고 있으면 잘살 수 있다는 이치가 맞아 들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즐겁게 이웃과 소통하고 소통한다.

남편 완호씨는 어청도에서 크고 자랐지만 처음 어선을 부리는 바람에 독립어업인으로서 첫해인 작년에는 그물망 50개만을 가지고 용감하게 출어했다. 바쁘기만 했지 소득은 그저 그랬다.

이런 경험을 살려 올해는 그물망을 약 20배 가까이 준비한 결과 광어, 도다리, 꽃게, 물메기 등 상당한 수확을 올렸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일취월장이란 말이 제격이었다.

덕분에 비응도 수협위판에 나섰으나 이번엔 긴 위판 대기시간 때문에 제때 물건을 팔지 못하는 시행착오까지 겪어야 했다.

이것이 초보의 한계 때문인가라는 서러움이 몰려왔다.

주변 선배 어업인들은 수협위판과 도매상(사매매) 등을 통해 잽싸게 팔아치우고 머무는 시간을 크게 줄여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시간이 돈이었다.

선옥씨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미리 준비한 통신판매업이란 카드를 꺼내들었다. 물론 아직은 물량 때문에 밴드 등을 활용, 준비한 양만 주변 지인들에게 판매해 쏠쏠한 수입을 올리고 있단다.

그래도 가장 알짜 일은 꽃게잡이다. 시기별로 다르지만 명절 등 특수를 맞으면 기대 이상의 이익을 창출하기 때문에 금어기 전후 비응도에서 먼바다로 옮겨가는 꽃게 무리를 따라 어획하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9월 초에 만난 선옥씨는 태풍 마이삭 때문에 잠시 피항하고 있지만 마음은 바다 너머에 있어 보였다.

올해도 날씨만 허락한다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에 차 있다.

그동안 흔들리던 자녀 4남매도 부부의 재결합으로 안정된 가정을 얻었을 뿐 아니라 자녀들 모두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당장의 고민은 없단다. 연말에 큰딸은 결혼을 앞두고 있을 정도니 선옥‧ 완호씨 부부는 행복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매사가 즐겁다. 아이들이나, 남편 일이나, 자신조차도 ….

앞으론 계절별 품목들을 잡거나 채취해서 수협위판과 사매매(도매상) 등은 물론 인터넷 판매망을 구축해 더욱 살림을 키운다는 야심찬 계획을 하나 둘씩 실천에 옮겨가고 있단다.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다가오는 풍어의 기쁨을 만끽하며.

‘고대 중국과 과련된 전설의 섬’ 어청도는 … 한때 ‘고래 하이웨이’ 각광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는 군산에서 북서쪽으로 77㎞ 떨어져 있는 외딴 섬이다. 뱃길로 꼬박 2시간30분이나 달려야 만날 수 있는 절해고도(絶海孤島)다.

동서 3㎞, 남북 5㎞로 여의도 5분의 1 크기의 작은 섬이지만 풍랑이 불면 인근 선박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는 피항섬이자, 서해를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로 해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또한, 선박뿐 아니라 철새들도 쉬어가는 중간 기착지다.

중국의 산동반도와 가까워 최근엔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고대에는 중국 관련된 전설도 간직한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귀양지였고 오랫동안 고래의 산란장소이자 거대한 고래 무리들이 질주하는 ‘고래 하이웨이’가 인접해 있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고래의 섬’이었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는 고래를 잡기 위해 몰려든 40여 가구 약 200 명의 일본인들이 거주했을 정도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오늘날까지 적산가옥이 남아 있을 정도다.

이 시절부터 안전한 입출항을 위해 방파제가 만들어졌고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선박의 안전을 위해 등대가 세워졌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국가등록문화재 제378호 어청도 등대’다.

1970년대까지만도 바다어시장인 파시가 열렸을 정도로 번성했다. 선술집과 다방은 호황을 누려 이곳에만 약 2000명의 주민이 살았으니 그 영화는 상당했다. 오늘날 180여가구 300여명에 비하면 엄청난 인구가 살고 있었던 것.

쇠락의 시작은 1980년 포경 금지와 새만금방조제 공사, 인근 바다의 골재채취 문제 등으로 어획량이 크게 줄어들면서부터다.

새로운 흐름이 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지자체의 엄청난 치어를 방류한 뒤 고기가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고 철새의 중간 기착지로 널리 알려지면서 생태섬으로 거듭났다.

이곳의 보물들은 곳곳에 있다.

마을 안쪽에는 중국 한 고조(유방)와 천하를 다투다 패한 항우의 신하 전횡의 망명지라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다 위에 안개가 살짝 끼어 있었는데 갑자기 푸른 섬 하나가 나타난 것을 보고 ‘어청도(於靑島)’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를 기린 치동묘에는 전횡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는데 이곳에서 고래잡이와 풍어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일종의 어부의 수호신을 모셔지는 이가 전횡이다.

섬 전체가 바다낚시 포인트로 선상에서 농어, 우럭, 광어, 참돔, 감성돔 등 다양한 물고기가 잡힌다. 어청도의 백미는 청정해역에서 잡아 온 제철 생선이다.

하늘에서 본 어청도는 ‘ㄷ’자 형태로 안산, 검산봉, 돛대봉이 병풍처럼 포구를 감싸 안은 섬으로 남쪽으로만 뱃길이 열려 있다.

북방파제에는 탑 모양의 등대가 서 있고 그 뒤편 서방파제가 길게 뉘어있는 모양새다. 탐방객들이 이어지면서 북쪽 해안쪽은 탐방데크를 조성, 포구 전경을 조망하면서 해변을 산책할 수 있도록 꾸며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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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댁 2020-09-21 12:10:54
멋있고 감동적입니다. 응원합니다!

천안사람 2020-09-21 12:06:30
와 군산 자주가는데 요즘 같은 시대에 어업하시는거 쉽지않은데 두분 너무 보기 좋아보여요
사업 번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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