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어‧귀촌에 성공한 사람들④] 어선어업 부안 계화면 임종성씨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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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어‧귀촌에 성공한 사람들④] 어선어업 부안 계화면 임종성씨 부부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0.09.14 10:03
  • 기사수정 2021-03-16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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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된 외국계 회사 셀러리맨 생활 그만두고 새내기 어업인 도전
과도한 직장생활 스트레스 짓눌린 것보단 ‘소소한 행복 찾기’ 대만족
낭만적인 인생 2막 대신 철저한 현장 경험 통해 정착성공기 기틀 마련
포기는 절대 용납 안되는 ‘완전 초보 어업인’ 무모한 귀어 귀촌 일기 계속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2019년 귀어한 임종성(40)씨는 과거 규모가 있는 경기도 안산시 소재 외국계 의료기기회사에 다녔다. 재무구조와 월급 등을 고려할 때 시쳇말로 괜찮은 기업이었다.

장장 7년간을 다녔는데, 반복되는 출‧ 퇴근과 과도한 업무, 직장생활 등에 따른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

더욱이 가정생활은 없었다. 아내와의 알콩달콩한 부부생활은 물론 육아 등에 있어 가장의 역할은 낙제점이었다.

월급과 승진을 위해 질주하는 삶에 회의가 밀려왔다. 이런 회의감은 상당 기간 계속됐다.

어느 순간, 직장생활을 지속해야 할 의욕마저 잃었다.

나이가 더 들면 연고지가 없는 곳에 정착하는 것은 어려운 만큼 늦기 전에 삶의 변화를 주자는 생각으로 정리했다.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귀어‧ 귀촌생활’을 하기로 결정했다.

설령 젊었을 때, 실패한다 해도 재기할 기회가 있다는 생각에 무모하리만큼 인생 2막을 향한 도전에 속도를 냈다.

 

/사진=투데이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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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도전에 격려와 큰 힘이 됐던 이는 부인 이보배씨였다. 가히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할 만했다.

이 시기, 보배씨는 누구보다 남편의 삶이 편안하고 행복한 가장이 되길 간구했다. 그녀는 그즈음에 한 TV 프로를 시청했는데 젊은 직장인의 돌연사와 과로사 등을 다룬 내용을 보고 지친 남편의 삶을 고려, 흔쾌히 승낙했다. 아니, 적극적인 성원과 함께 동반자를 자청했다.

2019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직장동료의 부부 모임에 갔었는데 그 당시, 회사 내부에서 남편의 승진 가능성이 컸었단다. 하지만 그곳에서 실상을 본 남편의 승진과정 등에 드러난 직장인의 깊은 애환 등을 우연히 지켜보고 더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부부의 속전속결에 집안 어른들의 반응은 분분했다.

미리 귀촌한 친정집에서는 회사생활에 얽매는 삶보다는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의 첩경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진=투데이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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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자식 부부의 행복을 기원하는 시어머님은 다소 완고했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 졸업과 번듯한 직장생활을 한 자식이 “왜 하필 어촌생활이냐”면서 안타까워했다.

이런 어른들의 반응을 뒤로하고 스스로 다잡으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부부는 의견일치를 봤지만 큰 장애물은 아무래도 아이들을 키우는 문제였다. 아이들에게 사실대로 어촌으로 이사 간다고 설명했더니 두 딸 모두 즐거워했다.

그렇다고 해도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그곳으로 정착하러 갔을 때 아이들의 학교 적응 문제와 학업 문제, 친구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회사에 사표를 던지기 전에 어느 곳을 갈 것인지를 놓고 부부는 토론하며 고민을 거듭했다.

어느 곳으로 가야 실패를 줄일 수 있을까.

주말이면 가족여행 삼아 경기도권 어촌지역에서부터 여러 곳을 방문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경기도 화성과 충남 보령‧서천 등은 물론 군산과 부안 등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오갔다.

처음에는 서울과 근접한 경기도와 충남권까지만 내려가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사진=투데이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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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어‧ 귀촌을 생각한 후 서울 금천구에 있는 종합귀어귀촌센터를 수시로 방문, 상담과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과정에서 한 지자체의 홍보내용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2018년 여름 부안군청 귀어귀촌센터의 송정환 주무관이 군 자체적으로 만든 귀어 귀촌 홍보물을 보고 솔깃했다. ‘바로, 이곳이다’라는 느낌이 왔다.

아내와 두 딸 등과 함께 부안군의 곳곳을 다녀왔는데 지역 인심도 후했고 주민들도 친절했으며 생각보다 수도권에서 가까웠다. 더 좋은 것은 모두가 흡족해했다. 부안군의 팸투어까지 참여한 뒤 귀어‧ 귀촌을 위한 준비는 사실상 마무리했다.

충북 충주가 고향이어서 대전을 거쳐 경기도 안산에서 살아온 종성씨는 도시 등의 삶 이외에 바다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무지에 가까웠고 육지 복판에만 살아왔기 때문에 도시 촌놈이었다 할 수 있다.

종합귀어귀촌센터의 안내와 각종 프로그램을 이수하면서 어느 정도 준비를 했고 그에 따른 자격증도 취득했다. 동력수상레저조종면허와 소형선박조종면허, 무선통신자격증 등을 차례로 땄다.

/사진=투데이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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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제2의 고향’ 부안군으로 가는 거다!

그때가 2019년 7월.

어선을 부리는 자격증은 있어도 제대로 어촌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어선도 전혀 타본 경험이 없었던 ‘왕초보 어업인의 귀촌일기’가 그렇게 시작된 것.

가족을 두고 먼저 내려온 종성씨는 지인의 소개로 진서면 운호리 왕포마을(새뜰마을)의 베테랑 어부인 김송수 선장의 꽃게 배를 탔다.

새뜰마을이란 지역발전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시작된 사업으로 달동네나 쪽방촌 등과 같이 주거환경이 열악한 지역에 대해 생활기반 시설, 집수리지원 및 돌봄, 일자리 등의 휴먼케어를 종합적으로 지원해주는 사업에서 따온 말이다. 왕포마을은 이런 곳이었다.

예전 왕포는 도내 최고 황금어장인 칠산어장의 고기잡이배들이 몰렸던 포구로 근방의 바다에서 고기잡이 지역으로는 으뜸이라는 뜻에서 왕포라 했단다.

어업이 지금도 활발한 왕포마을에 홀로 내려와 숙소를 얻고 곧 임시 선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 배에서 어선 승선 경험과 각종 선상체험을 통해 그물 손질과 뿌리고 걷는 것은 물론 꽃게 선별작업 등에 이르기까지 고난도의 속성코스(?)를 마쳤다.

김 선장님의 어선(7.93t)에는 그 자신과 김 선장 부부, 다른 선원 등 모두 5명이 탑승했는데 새벽 3시부터 오후 7시까지 어선에서 고기잡이 일을 했다. 이뿐 아니었다. 배에서 내려서 3시간가량 선별작업을 한 후 귀가하는 고난 행군이었다.

꽃게 금어기가 풀린 8월20일부터 10월 말까지 70여 일 동안 그 일은 반복됐고 겨울에도 어촌의 일은 쏟아졌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힘든 노동이 일상화된 삶의 현장에서 중도 포기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단다.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이런 고된 뱃일을 통해 어업인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고 보통 사람들에게 고역이라 할 수 있는 배멀미조차 안 했으니 제법 적성에 맞는 어업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에 주변에서 수산업에 종사하기 위해 좋은 곳이나 주거환경, 교육환경 등을 고려해서 수없이 고심한 끝에 눈길을 끈 곳이 있었단다.

지역 분위기와 의료환경, 교육환경 등이었는데 이런 것을 어느 정도 만족시켰던 곳이 면 소재지와 인접한 계화면 창북리였다.

도시전문가 표현으로 한다면 행정타운이 밀집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집주변에 면사무소와 우체국 등 관공서, 금융기관, 상가, (병)의원들까지 몰려 있다. 어촌지역에서 보기 드문 곳이어서 종성씨 부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지난해 귀어 귀촌지원자금이 나와 신규 어선(2.97t) 구입(2억8000만원)까지 한데 이어 아담한 집도 신축했다. 재산목록 1호인 어선은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을 따서 ‘보배호’로 명명했단다.

작년 5월 온가족의 둥지인 전원주택으로 이사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꼼꼼한 성격답게 철저하게 준비했지만, 초보는 역시 초보였나 보다.

예상외의 곳에 빈틈이 생겼다.

기대감 속에 귀어‧ 귀촌생활을 했지만 적자였다. 처음에는 수입이랄 것도 없었고 지난해 가을 성어기에 3400만원의 매출을 올렸을 뿐이다.

보배호에는 종성씨 부부와 외국인 선원 등이 승선해 무작정 먼바다로 향했지만 거의 허탕 수준이었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나름의 결과물은 있었다.

/사진=투데이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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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일을 처음 해봤지만 힘들었다는 생각보다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월급쟁이들의 삶은 월 단위로 이뤄지는 형태이지만 하루하루가 호주머니에 현금이 들어오니 쏠쏠한 재미였다고 할 수 있었지요.”

이들 어업 새내기 부부는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시행착오가 좋은 스승이었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 초짜 어업인 생활을 나름 즐기고 있다.

꽃게를 잡아서 수협위판장에 위판하지 않고 도매(활어차)하는 방법도 체득하며, 그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도 알아냈고 꽃게잡이를 하는 방법도 꽃게의 움직임을 고려해서 나가야 한다는 것 등도 터득했다.

어업 초보들이 한꺼번에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물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배어업인들과의 교류가 절실함은 깨닫고 있었다. 어떤 사업이든지 사람을 아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라 할 수 있다.

아직은 눈동냥과 귀동냥으로 배우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

물론 외국계 회사에서 다닌 경험을 살려 인간관계의 중요함과 철저한 분석(기록 정리) 등을 통해 부족함을 조금씩 메워가고 있다.

어떤 이처럼 귀어 귀촌일기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전표정리는 물론 꽃게의 움직임, 주요 포인트 등을 꼼꼼히 적어 놓고 다음 해를 대비하고 있다.

올해에는 꽃게 씨알이 작은 것은 부안쪽이나 고군산군도 등 도내 연안지역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가 교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때, 알고 지낸 분이 추천해 가력도어민협회의 부총무로 활동하고 있고 더 나아가 가력도청년회의 재무, 부안군어업인협회의 총무 등을 도맡고 있다. 이들 단체 회원들과의 빈번한 모임을 통해 그들과 벽을 허물어가고 있다. 일종의 현지인처럼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도움을 받아가고 있다.

지난 9월8일 종성씨 부부댁을 방문, 취재 과정에서도 이런 모습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투데이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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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계속 울리더니) 같이 그물 작업을 하러 나가자”는 지인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종성씨는 준비를 하고라도 있었다는 듯이 잽싸게 배가 정박한 항구로 떠났다. 보배씨도 일반적인 사람들과 같았으면 말리는 분위기였을 것이었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어 남편 대신 취재에 응한 보배씨의 얼굴은 평온함을 유지하며 담담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나갔다.

여기에 이사 오기 전에는 서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았던 그녀는 그동안의 어촌생활에 지치기보다는 소소한 행복에 젖어 있었다.

“이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큰딸이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가던 때라 교육 문제에 고민이 컸다”는 그녀는 다행히 학교와의 거리나, 항구와의 거리가 매우 중요한 요소였는데 적당한 곳이 나와 계약, 신축하게 된 곳이 지금의 집이었다고 덧붙였다.

2년째 부안 생활이지만 당초 걱정과 달리, 시골 마을인데다 또래 아이들이 순박하고 순수해서 교우관계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꽃게잡이를 위해 이른 새벽부터 부부가 배를 타야 하는 상황이면 걱정이 앞선다고. 집에 홀로 남아 있는 아이들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이런 날들을 제외하면 아이들과 함께하는 목가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마음이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시 아파트 생활과 달리,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있을 뿐 아니라 고양이와 강아지 등과 같은 애완동물을 키울 수 있는 곳까지 마련돼 있다는 점에서 아이들에게 축복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여기에다 바다와 들판 등을 마음껏 누빌 수 있는 보너스까지 있으니….

이들 부부는 과거 정착을 고려했던 왕포마을에 비해 포근한 마을 분위기와 젊은 층이 다수 사는 계화면은 자신들과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이다.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살고 있어 개방적이면서도 여느 동네 텃새(?)와 같은 해묵은 장벽도 없으니 도회지 생활을 접고 이곳으로 온 소소한 행복을 한껏 누리고 있다.

보배씨는 처음에는 어구와 같은 뱃일 용어를 몰랐는데 이제는 제법 용어적인 면에서 초보 딱지를 면할 정도는 된다면서 작은 목표를 갖고 있다.

자신이 사는 항(港)에서 1등 수입을 올리는 고기잡이 어선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배워나가고 있다. 이런 행복의 나날들이 이어지길 바라며 바다로 향한다.

/사진=투데이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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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 계화도는 어떤 곳

계화도는 원래 섬이었으나 1963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사업으로 육지가 됐다.

돈지-계화도-문포간에 9,254m에 달하는 제2호 방조제를 쌓아 예전에 바다였던 곳을 지금의 광활한 평야로 만들었다. 그 유명한 계화도 간척지 쌀은 이렇게 조성된 계화도 간척지에서 생산된다. 본래 행안면 계화리였는데 간척사업이 마무리된 이후 1983년 2월 독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변산반도의 북단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다. 동쪽은 동진면(東津面), 남쪽은 행안면(幸安面)·하서면(下西面)과 접하고, 북쪽과 서쪽은 서해바다에 접해 있다. 모두 5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1968~ 1978년의 10년간에 걸쳐 이들 방조제 안쪽에 조성된 간척공간에 대해 청호저수지와 동진도수로, 조포지구 개답‧ 계화지구 개답(開畓) 및 취락건설사업 등이 모두 마무리돼 계화도 주변 간석지는 미곡생산농경지로 변모했다.

제1 방조제와 계화도가 맞닿는 곳에는 제1 배수갑문이 설치되고 갑문 밖으로는 소규모의 어촌(양지항 주변)이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다. 이 갑문을 중심으로 주위에 생선 횟집 등이 집결되어 있다.

주민들은 연근해에서 어업과 간석지에서 백합, 바지락, 굴, 새우잡이, 꽃게잡이 등에 종사하고 있다.

새만금방조제 건설사업이 완공되면서 변산면과 동진면 등과 함께 인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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