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어‧귀촌에 성공한 사람들②] 낚시어선업 군산 옥도면 김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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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어‧귀촌에 성공한 사람들②] 낚시어선업 군산 옥도면 김현씨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0.09.08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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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소중한 나의 삶터… 인생2막 도전에 ‘희망의 찬가’
작은 아버님‧ 선배 어업인 등 멘토들 조언 따르며 새로운 인생 개척
평범한 회사원에서 낚시어선 선장 도전… 쉬는 날조차 바다에서 실전 연습
소년시절부터 신문 관리소장 등 경험하며 홀로서기 일군 청년 어업인

 

바다에 나가서 일하는 어업인의 삶이 운명이었나 싶을 정도로 제2의 고향 군산시 옥도면 고군산군도에서 요즘 단재미 속에 푹 빠져 살고 있는 청년 어업인.

젊은 나이에도 20~30가지의 직업을 경험해 본 김현(40)씨는 바다에서 생활하는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즐겁단다.

막 40대라 삶에도 온갖 일들을 경험했으니 그동안의 인생이야기는 인생극장에나 나올 법한 것들로 수두룩하다. 이런 생활에도 결국 ‘기-승-전- 어업인’으로 모아지는 삶의 궤적을 갖고 살아온 오롯이 바다 사나이다.

그의 청소년기는 혹독했다.

부친을 따라 고향 충남 보령시 남포면을 떠나 서울에서 정착했는데 중학교 때부터 신문배달을 하며 동년배들과 전혀 다른 생활을 해야 했다.

부친이 낙향한 이후에도 가족과 이별 아닌 이별을 한 것은 그가 서울 생활을 계속하겠다고 고집했기 때문.

서울 목동과 화곡동 등지에서 신문사의 배달일을 하면서 중‧ 고등학교를 그렇게 다녔다. 중앙일보와 한겨레신문의 지국 등에서 생활을 하며 배달 소년에서 관리소장까지 올랐다. 자신이 혼자 살아가겠다고 고집한 만큼 교복과 학비 등은 물론 홀로 대부분의 생활을 유지했다.

심지어 어린 나이에도 방을 구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으니 또래들과 전혀 다르게 풍파를 겪었다.

 

 

이런 일은 중고교를 졸업한 후 군 생활을 마친 24살까지 계속됐다. 거의 10년의 생활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제대했는데 이후 2년가량 더 신문사 지국에서 관리소장을 했다. 제대 후 주변에서 관리소장직을 더 맡아줄 것을 제의했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원금만 갚아도 된다’는 호조건이었지만….

문제가 생겼다.

어린 나이부터 10년간 신문배달일을 하는 바람에 건강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매일 오후 11시에서 시작한 하루 일과가 늦은 아침때까지 지속되면서 숙면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일어났다.

배달사원 약 20명을 관리하는 일은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배달 준비에서부터 배달, 배달사고가 난 곳 해결까지 일일이 챙겨야 했을 뿐 아니라 신문 대금 받는 일은 덤으로 해야 했으니 말해 뭐겠는가.

이보다 더 큰 고민은 이 시기에 신문시장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경험을 고려해볼 때 인터넷 등의 보급으로 매출액의 급감 현상은 이곳저곳에서 나타났다. 사업의 한계상황이 신문(배달)시장 전반으로 확산되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이를 더 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서울 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쉬는 날이면 한강 등을 보면서 지친 심신을 달랬고 때로는 서울 근교 산들을 등산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동경했다.

 

 

이제, 정든 직업과 결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새로운 직업을 고민하고 있는데 작은 아버님으로부터 낚시어선업 등과 같은 어업인의 삶을 권유받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 친구 어머님으로부터 자신의 회사에 다니면 어떻겠냐는 등등의 일들을 놓고 인생 좌표 설정에 고민을 거듭했다.

대학을 진학하지 못해 선택의 폭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집안 어른들에 의존하는 삶 대신 친구 부모님이 운영하는 회사 다니기가 더 편할 것 같아 그렇게 맘을 먹었다. 자동냉각기 제조회사였는데 2년가량 다녀보니, 본래 생각과 세상은 크게 달랐다. 그곳에서 30년 동안이나 근무한 한 숙련공 선배님이 전문인으로서 보수 등에 있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 것 등을 보고 극도로 실망감을 느낀 나머지 2년 만에 접었다.

어린 나이 때부터 시작한 타향살이에 지친 그에게 고향에서의 손짓은 그야말로 포근함, 그 자체였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서울 생활을 접고 보령의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낙향한 후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이번에도 숙부는 자신처럼 낚시어업에 종사하는 것을 재차 권유했다. 그분은 보령시에서도 선구적으로 이 낚시업종에서 일해왔을 뿐 아니라 해박한 지식을 습득, 오늘날 이 업종에서 일한 분들의 다수가 그의 제자이거나 후배 격이라 한다.

숙부는 충남 최초로 낚시어업(9.77t)에 종사했던 분으로 제대 후에 낚시점과 낚시 분야 등에 그에게 종사해보라는 권유를 끊임없이 해왔던 진정한 그의 멘토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숙명적인 직업과는 여전히 거리를 뒀다.

 

 

다른 일들이 나를 기다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일 저일을 섭렵했다. 그렇게 작은 아버님의 후광과 도움을 뒤로하고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시간을 허송했는데 ….

어쨌든 오랜만에 귀향했다.

그런 사이에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활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 절박한 마음으로 직장을 찾았다. 새로 찾은 직장은 부여군에 있는 정관장의 계열사였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했고 천직인 낚시어업을 향한 알 수 없는 이끌림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아니 어떤 보이지 않은 힘이 그의 천직을 향해 작용하고 있었다고 해야 더 맞는 말일 것이다.

그 구심력의 시작은 집안 어르신들이었다.

충남 보령에서 활동하시던 숙부가 군산에서 낚싯배를 건조한 뒤 큰 숙부와 독립하면서 그를 자연스럽게 지금의 천직으로 끌어들였다.

2014년이었다.

숙부는 “결혼도 이제 했는데 작은 회사봉급으로 그렇게 사느니, 낚시어업을 한번 해보라”는 말로 강권하다시피 했다. 더 피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마냥 피하기보다는 “이제 뛰어들어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을 굳게 먹고 미지의 세계로의 여정에 몸을 맡겼다.

 

 

한번 결심한 이상 나의 사전에서 실패란 단어는 없다는 마음에 차근차근 준비하면서 각종 관련 면허를 하나둘씩 취득했다. 소형선박조종면허(해기사), 무선종사자기술자격증, 동력수상레저기구(1,2급)조종면허 등을 따면서 귀어‧귀촌사업계획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어업인이 되더라도 본래는 고향 보령시 무창포에서 시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내 숙부의 군산 이주와 함께 큰 숙부까지 합류, 가족 다수가 대이주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김씨 집안의 충남 보령시대, 아듀였다.

군산으로의 이주 후 숙부와 조카(김현씨) 등은 함께 뭉쳤는데 생각했던 만큼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해 각자의 길을 가자며 논의 끝에 분화와 독립을 거듭했다. 비록 독립했지만 끈끈한 가족애를 발휘하며 서로 도와가며 독자적인 삶을 사는 방식으로 가닥을 잡은 것.

김씨가 군산시 오식도동으로 옮긴 때는 2015년도였는데, 그 이듬해부터 귀어‧ 귀촌 문제를 착실히 준비해서 드디어 천직과의 동행이 시작됐다.

2017년 8월이었다.

그동안 모은 돈과 귀어귀촌지원자금 등을 받아 낚시어선(7.93t)을 구입했다.

시작 첫해에는 초년생이어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주꾸미 어획으로 단돈 1000만원 만을 벌었는데 순수입을 고려하면 고민이 엄습해왔지만 큰 숙부와 선배 어업인들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초보 어업인의 딱지를 떼어갔다.

그는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했다.

2018년(2년차)부터 매출이 꾸준히 오르는 등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성장세도 중요한 일이지만 코로나 19 창궐이란 어려움 속에서 거둔 실적이어서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다.

앞으로의 꿈은 낚시어업 이외에도 새로운 분야로 진출을 꿈꾸고 있다.

남은 귀어‧ 귀촌자금 대출금 상환은 물론 작은 어선을 구입, 어선어업 분야로 진출도 모색할 목표로 하루하루를 일궈나가고 있다.

오늘의 그가 있었던 데는 두 가지를 빼놓을 수 없다 하겠다.

정신적인 지주가 그를 이 직업으로 안착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그의 제1 스승인 큰 숙부와 귀어‧ 귀천에 성공해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선배 어업인인 이라우(50)씨의 도움이 무엇보다 컸다.

이씨는 과거 의정부에서 자동차 정비와 중고자동차매매상사를 경영하던 분인데 5~6년 전부터 귀어‧귀촌에 성공해서 새내기 어업인들의 롤 모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특히 이씨는 귀어‧ 귀촌 후배들의 적극적인 후원자로 잘 알려졌다.

그는 미래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는 이유는 귀어‧ 귀촌 과정의 장벽과 자신이 겪었던 힘든 날들을 생각하며 최대한 시행착오를 줄여나가 후배들의 정착에 도움이 되도록 이런저런 팁들을 아낌없이 전수해주고 있다.

 

 

초짜인 김씨가 원만하게 귀어‧ 귀촌에 안착했던 것은 멘토들의 덕분만은 아니었다.

특유의 인내심에 기반한 정직함 덕분이라는 게 그를 아는 이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그는 누구보다 혹독한 청소년기를 거치면서도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그가 금과옥조로 삼은 철칙은 말보다는 정직을 신념으로 삼았다.

그의 인내심이 진가를 발휘했던 한 일화를 소개하면 그의 평판이 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고도 남는다.

최근 그의 배에 부부 낚시객이 탔는데 자신의 사무장과 띠격 태격하는 모습이 진상(?)을 연상케 했지만 모른 체하고 묵묵히 포인트들을 오가면서 바다로 향했다.

낯설은 손님이었는데 “오늘 고기를 잡지 못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등등의 말들을 쏟아냈지만 참고 참았다.

이를 지켜본 그는 거북한 생각이 가득했으나 조용히 키를 잡은 지, 얼마나 흘렀을까.

이곳저곳의 포인트를 안내하던 중, 땅의 어초와 같은 물체를 건드리는 것 같다는 말에 직감적으로 뭔가 걸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그 남편분을 안내와 응원하면서 서서히 끌어올렸더니 엄청난 것이 나왔다.

무려 80cm짜리 대형 자연산 광어였다.

그때서야 이들 부부는 “야~ 호!”하는 환호성을 지르면서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 그분들은 선장님에게 연신 감동받았다는 등의 사의를 표했다. 아직 젊지만 이런 성격 덕분에 주변에 사람들이 늘 그를 찾곤 한다.

그의 숨겨진 충청도 양반 기질은 한 몫을 더했다.

손해를 보더라도 좋은 포인트를 찾아주는 친절함을 유지하며 실천하는 김씨의 넉넉함은 다른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보통 낚시어선을 하는 사람들은 18인승 기준으로 만선을 하지 않을 땐 다른 배로 합류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았었다. 적은 낚시객들이 탔더라도 손님들이 가득한 배처럼 최대한 서비스를 하면서 친절하게 안내했다. 영업적인 측면에서 (주변에선) 기름값도 안 되는 일을 하는 그에게 손가락질하기 일쑤였고 때론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원칙을 지켜왔다.

이런 소문이 서서히 쭉 퍼졌다.

그의 서비스에 만족했던 낚시객들이 자신들의 밴드와 동호인들에게 너나 할 것 없이 알리면서 입소문은 사방으로 났다.

그에게는 단순한 홍보보다 이 같은 작은 실천이 고객들의 감성을 불러일으켰고 더 이상 손님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변했다.

고군산군도 최고의 낚시어선을 꿈꾸는 김씨는 오늘도 바다로 멀리멀리 향하고 있다.

그는 이런 소소한 내용에 만족하지 않고 날씨 좋은 날이면 바다에서 조류와 안전한 조종법, 물 때 읽는 법 등을 연구하는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그가 오매불망한 것은 가족들과의 재회다.

코로나 19 창궐로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부인과 딸(3)의 무사 귀환을 기다리면서 가족의 행복한 날들을 기약하며 내일의 향한 다짐도 거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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