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희의 예술문화+] 가부장적인 사회속 예술가와 결혼한 아내들의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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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희의 예술문화+] 가부장적인 사회속 예술가와 결혼한 아내들의 삶은?
  • 투데이 군산
  • 승인 2020.09.01 1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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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OECD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오래 전 유럽의 저출산과 비혼(非婚)여성들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 이유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와 가사노동에 자신이 가진 시간과 에너지의 9할을 할애하고 자신의 커리어는 자투리 시간을 찾아 쌓다 보니 자연스레 경쟁에서 도태되고 경력을 쌓을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예술가와 결혼한 아내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터.

“여름휴가는 오로지 그의 일과 건강과 조용함을 유지하는 데 바쳐졌다. 그것은 바로 숨을 죽이고 사는 생활이었다. (중략)"

"아이들은 자기 방에 갇히고 나도 피아노를 치거나 노래를 해서도 안 되고 부엌에서 요리 소리를 내서도 안되었다. 이렇게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으면 이윽고 일을 끝낸 그가 나타난다. 그러면 우리는 해방이 되는 것이다. (중략)"

"그의 머리는 자기의 일로 가득 차 있으며 조그마한 일이라도 방해가 되면 화를 냈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 알마가 쓴 <회상록> 중 일부다.

알마는 글에서 천재 예술가의 아내로 살아가는 고통을 세세히 털어놓고 있다. 문제는 알마 역시 10대 때부터 재능을 발휘한 작곡가였다는 점.

그러나 말러는 그의 아내 알마가 작곡가로 활동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알마의 시간은 오직 말러가 집안일과 아이들 문제에 신경을 뺏기지 않고, 창작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내조하는 것에 쓰여야 했다. ‘자신만을 위한 시간’은 남편에게 다 퍼주고 남은 자투리를 쓸어 담아야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알마의 창조력은 시들어 갔고, 우울증이 그의 마음을 잠식해갔다.

구스타프 말러에게 알마는 더없는 헬프메이트(helpmate)였다. 헬프메이트의 사전적 의미는 ‘아내’다. 아내가 남편 성장의 도구가 된 역사가 단어에도 흔적을 남긴 셈이다.

알마가 그랬듯이, 미술계에도 남편의 헬프메이트 노릇에 인생을 갈아 넣은 아내가 있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스위스의 천재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아내 아네트가 그 주인공이다.

자코메티는 가늘고 긴 인체 조각상으로 큰 명성을 얻은 작가다. 사람들은 그의 조각상에서 1, 2차 세계대전 후 앙상해진 인간 실존을 보았다. 하지만 그 명작의 탄생을 위해 자코메티의 가정에서 한 여성의 자아가 더없이 앙상해져 갔다는 사실을 대중들은 알지 못했다.

1943년 제네바 국제적십자 인명구호 위원회에서 비서로 일했던 스무살의 아네트는 22살이나 연상이었던 자코메티를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 일까지 그만두고 자코메티가 있던 파리로 간 아네트는 1949년 자코메티와 결혼한다.

아네트라는 헬프메이트를 얻은 자코메티는 그 기쁨을 어머니에게 편지로 전했다.

“아네트는 제가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예요. 제가 작업에만 전념해서 결국 도달하게 될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거든요. 결혼하면 오히려 모든 일이 단순해지고, 외부 일도 더 잘 풀릴 거예요. 어머니도 아네트를 알고 나면, 제 결정이 옳았다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편지 내용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자코메티는 강박적으로 검소한 삶을 살았다. 수도도 실내 화장실도 없는 7평 남짓한 그의 작업실은 ‘파리에서 제일 비참하고 더러운 아틀리에’로 유명했다.

이 점이 그의 명성과 아우라를 강화시킨 것은 물론이다.

문제는 아네트도 이 생활을 그대로 감당해야 했다는 것이다. 아네트는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바닥 타일을 마분지 조각으로 대충 메운 채 살았고, 자코메티가 자는 동안 춥지 않도록 아틀리에에 불을 지폈다. 자코메티는 바닥에 쌓여 있는 석고 부스러기도 일부러 치우지 못하게 했는데, 한 번씩 ‘허락’이 떨어지면 청소 역시 아네트의 몫이었다.

1959년 10월 아네트의 일기에 삶의 고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아틀리에에 있는 석고 부스러기를 치웠더니 무려 다섯 자루나 나왔다. 석고 조각상들 외에도 온갖 것들이 아틀리에에 가득했는데, 이젠 점토로 만든 새 작품들까지 생겼다.”

뿐만 아니라 아네트는 대여섯 시간 동안 꼼짝 없이 포즈를 취해주는 성실한 모델이었고, 남편의 글을 다듬고 타자로 쳐주는 조수, 전시회 팸플릿에 실을 사진을 선택하는 비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코메티는 이런 아내에게 더없이 잔인했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수집하던 미국의 기업가가 드레스 맞춤용 고급 옷감을 아네트에게 선물했지만, 자코메티는 옷감을 못으로 벽에 박아버렸다.

아내의 허영심을 자극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네트는 늘 흰 셔츠에 치마, 짧은 양말과 낮은 구두를 착용해야 했다. 머리카락은 표정과 시선에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모델 역의 아네트에게 삭발을 강요하기도 했다.

자코메티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이런 아네트의 인생이 1961년 작 <아네트>의 초상에 가감 없이 담겼다. 38살이 된 아네트는 환갑의 남편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늘 그랬듯 남편이 아네트의 이미지를 캔버스에 성공적으로 고정하기까지 그는 몇 시간, 며칠, 몇 주 동안 박제된 동물처럼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림 안에 또 다른 틀이 있어 마치 아네트가 진열용 유리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홉뜬 눈, 살짝 벌린 입술, 힘 빠진 얼굴 근육은 그녀의 영혼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가부장제가 아내를 자양분 삼아 성장한다는 사실을 자화상으로 증명한 화가도 있다. 덴마크의 화가 마리 크뢰위에르(1867~1940)는 어릴 적부터 화가로 성공하겠다는 야망이 컸다. 예술가가 되려는 여성을 받는 공립학교조차 없던 1888년에 프랑스 파리의 사립 미술학교로 유학까지 갈 정도였다.

하지만 이듬해 페데르 세베린 크뢰위에르(1851~1909)와 결혼하면서 마리의 경력은 제대로 시작도 못 한 채 꺾였다. 16살 연상인 페데르는 이미 대가였기 때문에, 마리가 남편의 작업을 위해 내조에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상가상으로 페데르는 정신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의 도움이 더욱 절실했다.

페데르가 그린 마리의 초상화를 보자. 초상화 속 마리는 더없이 빛나 보인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남편을 향해 고개를 돌린 마리의 모습은 순진하고 착한 아내, 아름다운 뮤즈 그 자체다. 하지만 같은 시기 마리의 자화상은 동일인인지 갸우뚱할 만큼 낯설다. 자화상 속 마리의 얼굴은 뭉개져 있으며, 그늘이 가득하다. 마리는 일기장에 자신의 멍든 내면을 그대로 옮겼다.

“나는 때때로 이 모든 노력이 헛되고, 극복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림을 그린다 해도 나는 결코, 정말 위대한 것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그는 남편을 돕고 남는 시간을 짜내 그림을 그렸지만, 역시나 재능을 맘껏 불태울 수는 없었다. 반사광은 불꽃을 일으킬 만큼 충분히 뜨겁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남편의 돈을 쓰는 아내에겐 냉혹하다. 반면 아내의 시간을 가로채는 남편에겐 한없이 관대하다.

오히려 아내의 삶과 시간을 많이 착취하는 남편이 더 성공하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아내의 헌신을 미화하며 독려한다. 가부장제 속 여성의 삶에 있어 결혼은 곧 경력의 단절일 뿐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삶은 포기해야하는 무덤과도 같다. 

바로 이것이 비혼 여성에게 ‘이기적’이라고 결코 손가락질할 수 없는 이유다. 어느 누가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시작하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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