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스마일피처’ 송상복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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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스마일피처’ 송상복 ②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8.21 08:25
  • 기사수정 2022-01-14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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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때 유망주로 떠올라... ‘스마일피처 파이팅!’

군산 제일극장에서 열린 환영식에서(1971년 11월, 왼쪽에서 세 번째 송상복)./사진=군산야구 100년사
군산 제일극장에서 열린 환영식에서(1971년 11월, 왼쪽에서 세 번째 송상복)./사진=군산야구 100년사

 

지긋지긋한 가난은 고교에 진학해서도 송상복 주위를 유령처럼 맴돌았다.

아침저녁 끼니를 국수와 수제비로 때웠다.

생활은 고달팠지만 고마운 급우들이 있어 용기를 잃지 않고 연습에 전념할 수 있었다. 집안 형편을 아는 급우들이 번갈아가며 도시락을 두 개씩 준비해왔던 것.

맛이나 보라며 간식용 빵을 건네주는 친구가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자신감을 얻은 송상복은 1학년(1971) 대통령배 대회부터 릴리프로 등판, 야구인들로부터 미래 유망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무리한 역투로 오른손 중지와 엄지발가락에 상처를 입고 슬럼프에 빠진다.

2학년 때는 최관수 감독 제의로 투구자세를 바꾼다. 최 감독이 지금까지의 오버스로는 몸에 무리가 따르니 사이드스로나 언더스로로 바꿔보라고 권했던 것.

그 후 대회 때마다 날카로운 커브와 사이드스로로 상대 팀 타자들을 제압했다.

1972년 7월 황금사자기 대회에 전북 대표로 출전한 군산상고는 대회 3일째(14일) 경기에서 치열한 난타전 끝에 경북지역 예선 우승팀 영남고를 8-6으로 물리친다.

준결승전(18일)에서는 영남 최강팀 경남고를 만나 송상복이 완투승(3-1)을 거두면서 결승에 진출한다.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는 이변이었다.

중앙 무대에서 기지개조차 제대로 켜지 못하던 호남 야구가 강팀을 꺾고 결승에 진출하는 순간 관중석은 아우성에 가까운 함성으로 가득했다.

다방과 거리의 전파상 앞에 삼삼오오 모여 TV 중계를 통해 군산상고의 결승 진출을 지켜본 군산 시민 100여 명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둬 고속버스를 빌리고 <동아일보> 군산지국에 서울운동장 야구장 입장권 예매를 부탁해 상경한다.

전직 언론인 채규이(78)씨 추억담을 들어본다.

“업무 끝나고 프로펠러 달린 비행기 타고 올라간 사람도 많았지. 대단한 열정이었어."

"근무 중에 응원하러 갈 수는 없잖아. (웃음)"

"호남고속도로가 2차선일 때여서 고속버스도 서울까지 4시간 넘게 걸렸거든."

"대한항공 군산영업소가 중앙로 경찰서 옆에 있었는데 20명이 넘게 예약하니까 시간에 맞춰서 뜨더라고. 그러니 비행기를 전세 낸 것이나 다름없었지."

"군산시 의원도 하고, 의장도 지낸 이만수 있잖아."

"당시 대학생이던 그 친구가 앞으로 나오더니 불꽃처럼 응원전을 펼치면서 분위기를 잡더라고. 말하자면 응원단장이었는데, ‘스마일피처 파이팅!’을 얼마나 멋지게 외치면서 리드하는지, 처음엔 ‘우~’하고 비웃던 부산고 응원석에서 박수를 보내고 호응하는 거야."

"군산상고가 우승하고 이튿날 새벽 군산에 도착했는데 경찰 백차가 전주 IC부터 군산까지 우리를 에스코트했다니까. 지금 생각해도 굉장했어.”

 

기적 같은 역전우승... 영광 뒤에 오는 상처

제26회 황금사자기 대회 입장식. 군산상고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사진=군산야구 100년사
제26회 황금사자기 대회 입장식. 군산상고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사진=군산야구 100년사

 

7월 19일 황금사자기 결승전(군산상고-부산고) 9회 말 1-4로 뒤진 상황에서 선두타자 김우근이 깨끗한 안타로 역전승의 전주곡을 울린다.

1사 만루 찬스에서 김일권의 밀어내기 1점과 양기탁의 2점 적시타로 동점이 되면서 운동장은 광란의 도가니가 됐다.

이어 등장한 김준환의 기적 같은 끝내기 안타는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응원단을 경기장으로 불러들이면서 ‘역전의 명수’를 탄생시켰다.

그 날의 명승부는 군산상고를 호남야구 중흥의 선봉장으로 떠오르게 했다.

그때부터 송상복에게 스마일피처란 애칭이 따라다녔다.

선수들에게는 각지에서 팬레터가 날아들었다. 팬들은 남녀노소 직업을 가리지 않았다.

프로야구 원년 도루왕 김일권은 “동료 중 송상복이 가장 많은 팬레터를 받았다, 팬들의 열기는 부러울 정도였다”고 귀띔한다.

그럼에도 송상복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괴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저를 가리켜 위기에 처해도 웃으면서 투구하는 스마일피처라고 하는데요,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평소 내성적인 성격으로 끝까지 침착하게 던지려고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다진 것이지, 미소를 짓거나 웃으면서 투구를 하지 않았거든요. (고개를 갸웃거림)"

"팬레터는 여학생에게 많이 받았는데, 그게 화근이었어요."

"팬과 선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임에도 괴소문 때문에 두고두고 시달렸습니다."

"그해 한일고교 야구가 끝나고 오른쪽 옆구리가 결리기 시작하더니···.(한숨) 결국 ‘늑간신경통’ 진단을 받았죠. 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통증이 심했는데요,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여자 때문’이라는 괴소문이었습니다."

"특히, 남이 해도 말려야 할 야구 관계자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하는데, 참담하더라고요. (한숨)”

가슴에 태극마크 다는 것이 꿈이었던 송상복은 낙심하지 않고 양·한방 치료를 계속했다.

3학년 여름이 지나면서 그런대로 건강이 회복됐다. 몸은 좋아졌으나 스카우트제의를 받지 못한 그는 졸업을 앞두고 대학과 실업팀으로 진출하는 동료들을 지켜보며 비애감을 느껴야 했다.

진로는 막히고,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졸업 후에는 건축업을 하는 친구 아버지 권유로 주택건축현장 막일꾼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채소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보며 빈둥빈둥 놀고먹을 수는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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