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맛' 대첩] 군산의 호떡 전국을 불냈다(5)
상태바
[군산 '맛' 대첩] 군산의 호떡 전국을 불냈다(5)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0.02.06 14:56
  • 기사수정 2022-01-14 1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동호떡 군계일학 우뚝 … 3대째 77년째 이어온 맛
민주네 씨앗호떡 등 다른 호떡집들도 맛 개발 입맛 잡기 앞장
임오군란 때부터 중국인들로부터 전수 ‘토착화된 우리 음식’
중동호떡
중동호떡

 

차가운 날이면 가장 인기 있는 간식은 뭘까.

아마 전통음식처럼 변한 호떡을 꼽지 않을까 싶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맛도 좋아 누구나 좋아하는 겨울철 대표 간식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호떡집에 가면 줄까지 길게 늘어서 있는 광경이 그 맛을 보여주는 징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런 호떡이 사계절 음식으로 변모하고 있고 군산에도 맛 투어 대표주자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물론 실내는 물론 다양한 포장마차에서 호떡을 판매하는 경우도 겨울의 일반 풍경 중 하나다.

군산을 대표하는 호떡은 대체로 중동호떡이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최근에는 거리에 나와 있는 호떡 맛집들도 상당하다.

중동호떡 내부
중동호떡 내부

그러면 호떡은 우리 고유의 음식이었고, 아니면 다른 나라의 음식이었을까.

◇ 호떡의 역사

호떡은 보통 길거리 음식이거나 중국에서 전해진 시장 음식이라 생각하기 쉽다.

‘호(胡)’는 오랑캐를 뜻하는 만큼 여기에서 유추하면 호인(胡人)들이 만들어 먹던 떡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라 의역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지금의 중앙아시아와 아랍인을 지칭해서 호인이라 불렀던 만큼 그 유래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찾은 듯하다.

이들 호인들은 밀 생산지에 살았던 까닭에 밀가루를 반죽해 화덕에 굽거나 기름에 튀겨 먹었는데 이것이 ‘호떡’이다.

후한서 ‘오행지’에는 서역의 풍속에 빠져 지난 후한의 황제 영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서역인의 옷을 입고 호떡을 먹었고 황실의 친척과 귀족들이 모두 그 모습을 따랐다고 한다. 중국에 들어왔던 당시에는 호떡은 일종의 귀족의 음식이었지만 차츰 일반 음식으로 변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호떡은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오기까지 머나 먼 길을 걸어왔다.

​겨울은 그야말로 호떡의 계절이다. 하지만 호떡이 국민 간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4계절 음식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진은 중동 호떡./사진 출처=제주 올레 홀릭 카페(http://cafe.daum.net/jjdgol)
​겨울은 그야말로 호떡의 계절이다. 하지만 호떡이 국민 간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4계절 음식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진은 중동 호떡./사진 출처=제주 올레 홀릭 카페(http://cafe.daum.net/jjdgol)

◇ 우리나라 호떡 유래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화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어 진다. 임오군란(1882년)이 일어나자 청나라가 군대를 파병을 했는데 그 시기에 청나라 상인들도 함께 들어왔는데 이 시기에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청나라 군인들은 철수한 이후 이 상인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생계를 위해 음식점을 열고 만두와 호떡 같은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이들은 점차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 맞게 조리법을 변형해서 호떡 안에 조청이나 꿀, 흑설탕 등을 넣어 팔았다.

제물포에서 처음 만들어 팔기 시작한 우리나라 호떡은 서울 명동 중국 대사관 주변과 종로거리 등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대중화된 시기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 때였다.

이 시기에 일제가 우리나라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각종 대형건설사업에 나서면서 짐꾼과 광부, 인력거꾼 등의 노동자를 일컫는 쿨리들이 중국에서 대거 넘어왔다. 한국에 정착해있던 화교들이 재빨리 팔기 좋은 음식이 호떡이었는데 이들에게 팔았다. 쿨리들이 떠난 후에도 우리 입맛에 맞게 다양하게 변형을 시도하면서 우리의 국민 간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 호떡의 새로운 인기

호떡은 주식은 아니었지만 열량이 많아 배고픈 시대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온 피난민들이 호떡 안에 여러 종류의 곡물을 넣어 먹기 시작했다. 그것이 유래되어 1980년대 후반 남포동에서 각종 견과류를 넣어 판매하면서 씨앗 호떡이란 이름으로 탄생하게 된 것.

지역별로는 군산의 중동호떡, 아산의 삼색호떡, 속초의 찹쌀씨앗호떡 등도 지역을 대표하는 호떡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중 일부가 군산에도 들어왔는데 1940년대에는 어느 정도 대중화 단계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중국사람들도 팔았지만 이를 받아들인 우리나라 사람들도 우리의 입맛에 맞게 개발, 토착화되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곳이 중동호떡.

군산의 경우도 중국집들에서 초기에는 팔았겠지만 1940년대를 넘어서면서 호떡 전문집이라 할 수 있는 중동호떡과 그 주변에 다수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촌로들의 얘기이다.

중동호떡이 처음에 있었던 곳에 과거 공설운동장이 있어 많은 인파들이 오갔을 것이고 이를 영업의 장으로 십분 활용, 이곳 주변에는 호떡집 뿐 아니라 다양한 가게 음식점들이 즐비했단다.

이곳 외에도 학교 앞에는 어김없이 호떡을 판매할 정도로 성업 중이었다.

어린 시절에 이곳을 오갔던 한 50대 후반인사는 “당시 먹을 수 있는 간식들은 많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중동호떡이 있었던 곳 주변에는 운동장이 있어 잦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고 호떡집 등도 우후죽순으로 영업하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그 많던 호떡집들은 우리 주변에서 갑자기 사라졌을까.

국민들의 식생활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을 것은 추정된다.

밀가루 음식의 대명사인 각종 제과류들이 등장하면서 이 맛에 길들여진 신세대들은 전통적인 호떡보다는 현대식 제과에 입맛이 빼앗겼던 것이다. 이른바 식생활 선호도가 변하면서 호떡집은 다른 업종으로 변모를 시도, 자취를 감추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여 진다. 다시 말하면 1970년대에는 다양한 서양식 빵들이 국민들의 입맛을 집중공략하면서 급격히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호떡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에 전통 호떡집들은 대거 전업하는 상황으로 변했을 것이다. 맛도 음식도 돌고 도는 유행과 같은 흐름이 있나보다. 최근 호떡집들이 다시 기지개를 켜듯 곳곳에 문을 열고 있다.

이런 풍파를 극복하고 3대째 80년 역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 호떡집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 중동호떡.

최근 들어 곳곳에 포장마차나 실내마차에 음식점들이 호떡과 다른 간식들을 팔고 있을 정도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 3대째 이어온 ‘군산중동호떡’… 지역 대표 맛집 우뚝

공설시장 인근에 있었던 중동호떡은 이주호 사장의 할아버지가 시작한 이래 3대째 77년 역사(1943년 개업)를 자랑하고 있다. 이 시기에 중동호떡도 있었겠지만 시내 곳곳에 주정부리로 사람이 몰리는 곳이면 아마도 호떡집들이었을 것이다.

일반 호떡과 다른 점은 전통의 비법 반죽으로 특유의 담백한 맛이 특징이고 철판에 구워 기름기를 뺏기 때문에 질리지 않게 만들고 있다. 가정에서 프라이팬이나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면 갓 구운 호떡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식은 호떡을 함께 먹으면 담백함이 더해져 더욱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특장이 있다.

# 군산중동호떡 후예들, 아니 도전자들

군산은 맛의 고장처럼 중동호떡에 맞선 후예들이 적지 않다. 수송동 어느 실내 씨앗 호떡집은 하루 20~ 30만원씩 매출을 올릴 단재미를 보고 있고 월명동 민주네 씨앗 호떡집도 청년창업을 통해 상당한 성장세를 누리고 있단다. 그 젊은 주인은 어느 공중파에 나와 입소문 나면서 관광객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는 코스 중 하나로 떠오른 상황이다.

이밖에도 거리의 포장마차에서는 대중화된 맛을 통해 겨울 간식 중 대표주자로 인기를 누릴 뿐 아니라 서민들의 계절 아르바이트음식으로도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