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초원 몽골 紀行 ③] 몽골의 심장이자 역사가 쉼쉬는 울란바토르 ‘손짓’
상태바
[대초원 몽골 紀行 ③] 몽골의 심장이자 역사가 쉼쉬는 울란바토르 ‘손짓’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4.09.26 14:47
  • 기사수정 2024-09-27 15: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이승전망대와 몽골 수도 시내 전경…한국의 여느 도시와 유사한 모습
몽골 혁명의 아버지 이름 딴 수흐바타르광장… 시민· 관광객의 만남의장
국립역사박물관… 매우 흡사한 옛 곰방대 출현(?)에 놀란 ‘조선풍’ 눈길
쌀쌀한 몽골 밤하늘의 달빛. / 사진=투군
쌀쌀한 몽골 밤하늘의 달빛. / 사진=투군

몽골여행객이라면 별에 대한 관심이 있든, 아니든 간에 별자리 관측이 초원 밤하늘의 핵심 여행코스다.

첫날엔 비가 내렸고, 두 번째 날엔 조금 기대과 달리 산자락에 걸친 휘영찬 달빛을 보는데 그쳤다. 아쉬움, 가득했다.

9월 밤이면 영하의 날씨로 변하는 바람에 거북바위 앞의 전통매장에서 몽골특산품 캐시미어까지 사서 준비했는데 말이야. 그나마 황홀하고 기괴한 달빛 광경에 위안을 삼고 여독을 풀기 위해 보드카를 마시며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몽골에서의 마지막 날은 숙소인 게르에서 출발, 울란바토르 시내구간을 겨우 통과한 뒤 자이승전망대와 이태준 기념관, 수흐바타르광장, 국립역사박물관, 오페라하우스 등을 거쳐 숙소로 오는 여정이었다. 출발 직전에 몽골 게르 음식점의 아주머니가 우리 일행과 사진을 찍자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촬영까지 했다. 환대해주니 즐거울 뿐이다.

체류 3일째를 맞자 수도 울란바토르의 교통문제 때문에 최대한 빨리 출발해야 한다는 가이드 어드씨의 성화로 승합차에 몸을 맡겼다. 악명의 도로 체증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그동안 볼수 없었던 교통지옥문과 같았다. 불법 유턴은 물론이고 끼여들기, 말싸움, 잦은 접촉사고, 끝없는 정체 등등 …

힘겹게 울란바토르 시내로 들어와 처음 들은 곳은 독립지사 이태준 선생 기념관이었다.

# 독립운동가 이태준 선생 기념관

몽골의 슈바이처이자 독립지사 이태준선생기념관 앞 기념비. / 사진=투군
몽골의 슈바이처이자 독립지사 이태준선생기념관 앞 기념비. / 사진=투군

이곳은 몽골인에게 매우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요즘 한국여행객들의 필수 방문코스로 부상한지 오래다.

웬걸, 아직 관람 문을 열지 않았다. 일행 중 일부가 급한 용무(?) 때문에 이태준 선생기념관을 점만 찍고 돌아서야 했다.

사진만 몇 커트 찍고 인근의 자이승전망대와 연결된 쇼핑몰로 방향을 선회했다.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로 울란바토르에서 ‘한국의 슈바이처’로 존경받던 이태준 지사를 기리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이태준기념관을 다녀왔다.

이태준 선생(1883~ 1921)은 몽골에서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연계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로, 몽골에서는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한·몽 우호 관계의 상징과 같은 인물.

이 지사는 1883년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서 출생해 1907년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한뒤 졸업했다. 의전 재학 중 도산 안창호 선생의 권유로 비밀 청년 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담했다.

1911년 중국 난징으로 망명해 1912년 중국 기독회 의원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1914년 몽골로 이주,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차렸다.

당시 몽골인 대다수가 감염된 화류병(花柳病· 성병)을 치료하면서 몽골인들에게 ‘까우리(고려) 의사’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이라고 불렸다.

몽골 마지막 황제였던 보그드 칸의 주치의가 됐다. 이런 공로로 1919년, 몽골로부터 귀중한 금강석이라는 뜻을 가진 ‘에르데니 인 오치르’라는 명칭의 최고 훈장을 받았다.

이 지사는 1918년 9월 김규식에게 파리강화회의 참가 여비를 보태는 등 항일 운동에 계속 참여했다. 1921년 몽골에 진주한 러시아 백군에 붙잡혀 피살돼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지사의 공적을 기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2017년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셨다.

현재의 기념관은 이 지사의 뜻을 기려 과거 건립한 기념관을 정부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새롭게 만든 것이다.

# 서울 남산 타워와 같은 ‘자이승 전망대’… 러시아와 몽골의 우호 상징

몽골자이승전망대 앞 일행들. / 사진=투군
몽골자이승전망대 앞 일행들. / 사진=투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옛 소련군과 몽골의 우호증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탑으로 러시아에서 기증했다고 한다. 벽화에는 이곳에는 과거 몽골을 침략한 군국주의의 일본군과 나치 독일을 물리친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곳에 오르면 울란바토르 시내 전경은 물론 주변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서울의 남산타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으로 하루종일 관광객이나 참배객들로 가득찬다.

이곳은 현대식 쇼핑몰과 연결되어 있어 건물 7층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이승 전망대로 향하는 곳에는 족히 100개가 넘는 계단으로 이뤄졌다. 우리도 오르고 올라 숨가쁘게 정상부에 도착했다.

자이승전망대 위에서 본 몽골 울란바토르의 시내 전경. / 사진=투군
자이승전망대 위에서 본 몽골 울란바토르의 시내 전경. / 사진=투군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몽골 시민들도 사진촬영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가이드 어드씨는 최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몽골 방문과정에서 이곳을 다녀 갔고 헌화했다고 귀띔했다. 다른 러시아 지도자들과 외국정상들도 마찬가지란다.

내려와 보니 각종 상점들도 즐비했고 주변에는 현대화된 쇼핑몰 단지들이 솟아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행 중 한사람은 자신의 동네 지인을 만났다. 같은 지역사람들이 이역만리에서도 이렇게 만날 수 있다니…

쌀쌀한 날씨에 커피를 마시려고 했지만 커피점을 찾지 못했다. 겨우 옷가게에 있는 커피점을 찾아 추위를 식힌 뒤 차를 타고 인근 중국집 형태의 한 음식점에 도착, 점심식사를 했다.

정통 ‘몽골식 샤브샤브’였다. 다들 여행기간 동안 피로와 해장을 위해 국물을 먹으면서 속을 달랬다. 말고기와 양고기, 소고기가 주메뉴였는데 맛있는 식사였다. 국물에다 가지고 갔던 고추장과 된장을 넣어 자작(?) 해장국을 만들어 연신 땀을 흘리며 먹어댔다.

한편 이곳으로 들어오는 곳에는 한국 조계종이 기증한 거대한 불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을 대형불상공원이라 부른다.

# 몽골의 정치 경제 1번지 ‘수흐바타르광장’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관광중인 일행. / 사진=투군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관광중인 일행. / 사진=투군

역시나 시내 곳곳을 오가려면 몰려드는 차량들로 극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엉키고 엉켜 지금껏 보지 못한 주차전쟁을 벌어야 했다. 가이드 능력 때문인지, 현지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가는 곳마다 주차관리인과 나름의 싸인을 교환하며 기가 막히게 주차전쟁을 피했다. 그는 나름의 능력자인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올란바토르의 수흐바타르광장.

주변은 하루종일 인산인해를 이루는 몽골 정치 경제의 1번지다. 몽골 혁명의 아버지 수흐바타르가 1924년 울란바토르에 몽골인민정부(사회주의국가)를 수립한 것을 기념해 몽골정부가 그의 동상을 세우면서 붙여진 이름.

이곳의 정면에는 정부청사가 있는데, 건물 한가운데에 칭기스칸의 동상이 있고 왼쪽에는 그의 아들 오고타이가, 오른쪽에는 그의 손자 쿠빌라이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수흐바타르 광장 정면에 있는 몽골정부청사 앞에서 선 일행. / 사진=투군
 수흐바타르 광장 정면에 있는 몽골정부청사 앞에서 선 일행. / 사진=투군

이곳과 마주한 광장 가운데 있는 거대 조각물이 ‘수흐바타르 동상’인데 이곳에 꽃을 바치는 시민들로 가득하며 결혼식을 끝낸 신랑과 신부 등 가족들이 사진을 찍으면서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장소로도 이용된다. 각종 국가차원의 행사가 열릴 때도 이곳에서 수시로 행해진단다.

이곳을 구경하다 전통몽골복장을 입은 일군(一群)의 현지인들이 있어 가이드 어드씨에게 물어보았더니 졸업 30주년을 맞아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 국립역사박물관 방문… 조선풍(?)과 우연한 조우

국립박물관 앞에의 일행들. / 사진=투군
국립박물관 앞에의 일행들. / 사진=투군

이 광장 인근의 오른 쪽에는 몽골 역사를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는 국립역사박물관이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보니 과거 몽골 전성기의 세계지도라 할 수 있는 일종의 몽골로드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적인 자부심을 표현했다. 우리가 들어갔더니 고대부터 청나라 시기의 복식과 생활도구, 전통 게르 등으로 가득했다. 코담배라든가, 2세가 되면 남녀 아이들의 변발 풍습에 얽힌 장수(長壽) 풍속이야기(저승 사자가 내려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게 하려고 변발한다면서 자신의 딸에게도 이를 실행에 옮겼다고) 등등을 설명했다.

몽골국립박물관에 기획 전시 중인 차 유입로. / 사진=투군
몽골국립박물관에 기획 전시 중인 차 유입로. / 사진=투군

가이드 안내와 설명을 듣고 오가던 중, 17세기 시대상을 보여준 진열대에는 청나라 시대의 남녀노소 복식과 생활도구 등이 있었는데 그중에 눈에 확 들어온 곳이 있었다.

그곳에 전시된 물건이 우리의 곰방대와 너무나도 흡사했다. 우리나라 상식에는 박물관 촬영을 하지 못하는 것이 철칙이어서 이를 지켰는데 나중에 보니 사례금을 내면 할수도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유사하단 말인가. ‘우연의 산물, 아니면 어떤 교류의 결과물일까.’라는 의문이 들어 귀국 후 자료를 확인해보니 고려풍 후속 버전인 ‘조선풍’이었다.

역시나 였다.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17세기 조선과 몽골의 문물교류물이었다.

우리는 몽골의 어느 박물관에서나 빠짐없이 우리의 것을 빼닮은 연죽(담뱃대)과 담배통을 발견하게 된다. 알고 보니 ‘고려풍’ 이후 조선과의 교류의 역사 징표인 ‘조선풍’의 산물이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 소장 중인 곰방대들. / 사진= 군산시 제공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 소장 중인 곰방대들. / 사진= 군산시 제공

귀국 후 궁금증이 발동, 자료를 찾아보니 이런 내용이 곳곳에 나와 있었다.

<병자호란 등의 영향으로 조선 땅에 1636~ 1637년 심한 우질(牛疾: 소 전염병= 소 역병)이 돌아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자 인조는 당시 무관(武官) 성익을 몽골로 파견, 담배와 소를 바꿔오게 한다.

성익은 몽골의 여러 기(旗: 종족 또는 州)를 돌아다니면서 담배가 추위와 정신 집중에 유효하다는 설득으로 몽골 소와 담배를 교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들여온 몽골 소가 오늘날 우리 한우의 조상인 것이다. 이를 계기로 17세기 중엽부터 몽골에는 담배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다.>

잇단 전쟁으로 국내 경제 위기에 놓인 조선은 당시로선 엄청난 값을 치러야 하는 농사용 소의 대량 수입 때문에 골몰하다가 청나라에서 인기가 높은 담배와 맞교환하는 묘안을 냈단다. 물론 처음에는 몽골인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담배의 대중화가 이뤄졌다는 게 역사가들의 분석이다.

당시 청의 고관대작들에게 이미 조선의 담배가 유행됐고 나중에 몽골에도 그 영향을 미쳐 오늘날 담배 애호 국민(?)으로 변한 역사의 단초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곰방대를 넘어 코담배까지 인기를 누리고 있을 정도니 … 말해 뭐하겠는가.

역사책에는 잘 다뤄지지 않았지만 당시 조선의 사정은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을 다룬 중앙일보의 [유성운의 역사정치]를 참조하면 당시 상황은 이렇다.

- “병자호란보다 무섭다” 조선 거덜 낼뻔한 소 전염병 -

반세기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1592~ 1598),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37)을 통해 조선· 명(중원)· 후금(만주)· 일본이 뒤엉켜 유례없는 국제전을 치렀습니다. 그러면서 대규모의 군사와 가축들이 이동했고 이 전선(戰線)을 따라 전염병 병원체들도 함께 이동했습니다.

특히 만주 일대는 전염병이 들끓을 요인들이 많았습니다. … 중략…

병자호란 후 심양으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남긴 『심양일기(瀋陽日記)』에도 이런 정황이 나타납니다. 소현세자는 1637년에 심양에 가서 7년 만에 돌아오는데 이 기간에 16차례에 걸쳐 전염병이 발생했다고 기록했습니다. 17세기 조선을 뒤덮은 우역의 시작은 정묘호란이 발발하고 5개월이 지난 1627년(인조 4년) 10월입니다. 당시엔 인지하지 못했지만, 압록강을 넘어온 후금 군사와 가축에 의해 전염됐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 중략…

이후 더 큰 규모로 닥친 1637년(인조 15년)의 우역도 병자호란 전후라는 점에서 후금 군사들에 의해 확산됐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입니다. 조선에서는 1636년 8월 평안도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보고됐지만 이미 3개월 전 후금의 본거지인 심양 일대에서 우역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 중략…

이 시기의 청나라의 국내 침략 주요루트 주변에는 가축 전염병으로 소의 씨가 말라 농사를 지을수 없어 청나라에 설득, 그 무역을 성사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이 성과를 내 몽골에서 소떼를 들여와 노동력을 절감했고, 이 소들이 오늘날 한우의 조상이 됐다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