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의 자부심 ‘칭기스칸’ 청동기마상… 몽골건국 800주년 세워
‘게르’ 2박… ‘전통 몽골 게르’ 현대식 개조 유목민 천막 이색체험
요즘 호기심 많은 한국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여행지 중 하나가 몽골 여행이다. 40여일 안팎의 긴더위에 지쳐 지인들과 함께 추석연휴기간을 활용해 대초원 몽골에 다녀왔다. 인천공항~ 몽골 울란바토르간 여행(3박4일)은 긴 비행시간을 좋아하지 않는 여행객들에게는 안성마춤이었다. 선선한 날씨와 함께 3시간 안팎의 비교적 짧은 비행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근 들어 몽골 여행국 중 3위에 오를 정도란다.
우리도 이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짧은 여행기간에도 과거 고려 중기 몽골의 30년간 침입에 이은 고려풍과 고려양 등을 생각하며 ‘멍~ 몽골여행’을 다녀왔다. 일정상 여행기를 정리했다/편집자
‘대한민국의 국토 16배(한반도의 7.4배 넓이), 인구 360만여명, 고대부터 우리나라와 깊은 역사와 교류의 나라, 때론 돌궐· 유연· 흉노의 땅…’
‘몽골 울스(몽골은 용감한 뜻을 지닌 부족에서 유래한 민족이름을 뜻하고 울스는 몽골어로 나라 또는 국가를 의미한다)’다. 즉 몽골국이다.
말을 타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달리며, 대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나라. 밤하늘 가득 쏟아질 듯 빛나는 별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곳. 12~ 13세기 세계를 호령했던 칭기즈칸의 땅.
몽골인과 한국인이 역사적 및 문화적 공통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같이 인류의 3대 인종군 가운데 몽골로이드, 그것도 친연성이 한층 더 강한 북방 몽골로이드에 속한다.
그래서 황갈색 피부, 검고 곧은 모발, 적은 체모, 중·단두형 머리, 작은 키, 평평하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얼굴, 검은 눈, 미간의 낫 모양 주름(몽골 주름), 엉덩이의 몽골반점 등 형질학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인종군과 더불어 3대 어족(語族) 가운데서 한국어와 몽골어는 다같이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이를테면 두 나라는 혈통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동군(同群)· 동족(同族)으로서 그 시원은 선사시대의 70만~ 8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한민족과는 먼나라지만 가까운 종족의 나라가 몽골이다.
필자는 문화 및 역사적인 깊은 관심과 달리 방문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최근 지인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몽골여행을 다녀왔다.
이런 연유로 지인들과 함께 9월18일부터 21일까지 인천공항을 출발, 울란바토르 등 몽골을 다녀오는 3박4일간의 일정이었다.
울란바토르는 세계에서 가장 추운 수도로 유명하다. 시베리아와 가깝고, 평균 고도는 1,350m로 꽤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의 긴더위와 달리, 울란바토르의 바람은 서서히 조금씩 차가운 날씨로 변하고 있었다. 우리는 공항을 빠져나와 곧장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창밖으로 광활하다 못해 황량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일행 중 한분이 한국의 날씨를 말하면서 폭우가 내리면서 더위가 한풀 꺾였다는 뉴스를 전해줬다. 폭우로 시름에 젖은 농민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이곳의 찬바람이 한국에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몽골 -1일차’ : 청진벌덕에 있는 칭기스칸 청동기마상
도착한 날은 18일 오전 11시경이었다.
인천공항 출발 3시간 10분 만에 울란바토르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도착.
“노랑풍선 팀 맞죠?”
한국어가 유창한 현지 가이드 어드씨가 예약자 이름을 확인하며 반갑게 차량으로 안내한다.
수속을 밟고 울란바토르 국제공항 내부에 어드씨를 만나 ‘몽골 -1일차’가 시작됐다.
어드씨는 한국에서 약 7년간 생활한 40대 후반으로 비교적 한국말에 능숙한 현지인이었는데 그 부인도 함께 여행업에 종사한단다. 가이드란 직업은 몽골에선 생활적으로 중류층에 속하고 비교적 선호도가 높은 직업군 중 하나다.
칭기스칸 공항에서 테를지국립공원으로 가는 도중, 어드씨는 유창한 한국어로 몽골의 초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몽골은 사람보다 양과 말이 더 많습니다. 인구는 350만 명인데, 가축은 6,000만 마리나 되죠. 대부분 초원에 방목되어 자라죠. 풀을 뜯고 있는 말을 자세히 보면 왼쪽 엉덩이에 주인 고유의 표식이 있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대초원으로 향한 차창 밖 풍경이 단번에 이해됐다. 말과 소, 양, 야크 무리가 곳곳을 누비면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공항에서 나와 보니 그의 승합차(현대차 스타렉스)가 대기중이어서 달리고 달리다 제법 시간이 흘러 점심 시간.
도착한 곳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이국 땅에 만난 사장 부부는 우리 일행을 친절하게 맞았다.
미니 뷔페 음식도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식당 주인 부부가 적극 추천한 특산품 산양 치즈 세트를 사서 체류기간 내내 술안주로 삼았다. 이 치즈는 다른 곳에서 쉽게 살수 없다는 식당 주인의 말은 나중에 보니 허언은 아니었다.
첫 목적지인 울란바토르의 외곽에 있는 청진벌덕에 있는 칭기스칸 청동기마상에 도착했다. 오래 전, 칭기스칸의 황금채찍이 발견된 곳에 세워진 이 청동기마상은 2010년 몽골제국 건국 800주년을 맞아 몽골 36명의 왕을 상징하는 36개의 기둥에다 높이 40m. 청동 250톤으로 제작된 세계 최대규모다.
몽골인의 자부심인 만큼 이 기마상 인근에는 그들의 이동수단인 쌍봉 낙타와 독수리체험, 활 등을 이용한 관광상품이 있었고 이미 옵션 프로그램으로 해놓은 만큼 차례로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타본 낙타는 일어나 움직이자 생각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행 중에서 즐기지 않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즐겁게 몇십미터를 돌며 추억들을 남기기 위해 사진촬영을 했다. 낙타에서 내려온 일행은 우리와의 종족 및 문명사적인 동질감 때문에 몽골여행에 들떠 있었다.
특히 우리의 활과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일행들은 몽골의 전통 활쏘기에 재미를 붙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했다. 여기에다 몽골매를 이용한 매체험까지 함으로써 옛 알타이족의 기상을 느끼며 즐거워 하고 있다.
앞서 이 청동기마상을 주요 배경으로 수많은 장면들을 연출하며 멋진 사진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 이색 ‘게르’에서의 2박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 거처하는 천막 같은 집
유르트(yurta)라고도 씀… 몽골어로는 게르(ger)
몽골여행 일정 중 2박을 ‘게르’에서 잠을 잤다.
우린 우리나라에서 부르고 있는 몽골천막이라는 단순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지만 일부 형태만 비슷할 뿐이었다.
우리가 숙소로 이용했던 게르는 우리로 말하면 한옥을 개조한 것처럼 만든 현대식 몽골 천막이었다. 침대와 난방시설, 탁자, 개량 화장실 및 샤워장 등이 있는 신식(?) 게르였다.
4명이 한곳의 게르에서 잠자야 했지만 우린 한곳에서 편하게 술을 먹으면서 이야깃 꽃을 피우고 재미난 밤을 지낼 수 있어 즐거웠다. 대초원 속의 게르여서 다소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다만 현지인이 사는 전통 게르와는 달랐고 그곳에는 난방과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게르란
‘게르’는 파오라고도 한다. 나무막대를 세운 뒤 가죽이나 펠트, 밝은색의 수직물로 덮은 집이다. 실내에는 기하학 무늬나 동물을 도식화한 무늬의 밝은 색깔(보통 붉은색) 양탄자를 비치한다. 이런 종류의 합사장식 양탄자는 알타이 산맥 기슭의 BC 5~ 3세기경 파지리크 유적의 유목민 무덤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따뜻함과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모피 가공물의 대용품으로 발전한 것이라 추측된다.
실내에 있는 다른 물건으로는 안장에 매다는 자루, 물병, 물레나 베틀 등이 있다. 유르트는 가축을 방목할 수 있는 목초지 어느 곳에나 설치하며 이사할 때는 말이나 작은 마차로 운반한다.
# 90년이후 한국과 몽골의 교류… 한국말 통용 등 신한국풍 확산
한국과 몽골의 교류는 긴 역사를 같이하고 있지만 오늘날 양국의 교류는 30여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양국은 선사시대와 고구려, 발해와 고려, 조선, 한말, 일제강점기에도 지속적인 교류를 거듭해왔으나 2차대전 후 냉전시대를 맞아 대한민국과의 교류는 1990년 3월 26일 정식 국교를 수립하면서 본격화됐다.
물론 수교 이전부터도 체육 분야 등 민간차원의 교류가 있었지만 수교와 함께 인력 교류, 예술단 상호 교류 등 각종 분야에서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9년 김대중 대통령, 2006년 노무현 대통령, 2011년 이명박 대통령,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몽골을 방문했고, 몽골에서는 1991년 수교 후 최초로 오치르바트 대통령이 그 해 10월 방한했고 2001년 바가반디 대통령, 2007년, 2008년 엥흐바야르 대통령, 2016년 엘벡도르치 대통령, 2018년 후렐수흐 총리 등이 한국을 방문했다.
정부간 교류에 이어 양국의 2000년 이후 민간교류도 빈번해지면서 최근엔 몽골방문객 중 3위를 차지할 정도로 폭풍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한국(현지인 포함) 가이드만 3,000여명에 달할 정도며 올 5월에서 9월 말까지 한국 여행객은 이미 30만명을 돌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젠 과거 인연을 넘어 엄청난 교류의 역사로 새로운 형태의 고려양과 몽골풍이 생겨날 조짐이다.
이를테면 한국인의 교류를 위해 한국말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과 함께 생활방식이 그곳에서 자리잡고 있다면 그곳의 말타기 체험이나 일부 몽골어가 우리 생활 속으로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 한·몽의 고대 교류… ‘고려양(고려풍)’과 ‘몽고풍’
이런 양국간 교류가 과거에도 엄청났는데 그 정점은 고려 중순부터 약 86년간(1270~ 1356년)이었다.
몽골은 중국에 원나라를 세우고 고려와 국경을 접했는데 1231년부터 약 40년간 9차례에 걸친 침입한 뒤 고려 공민왕 시절인 1356년까지 내정간섭을 했는데 이 시기는 양측의 문화와 문물이 빈번해졌다.
원나라 천지에 고려식 복식과 음식, 기물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고려양(高麗樣)’, 즉 ‘고려풍’이라고 일컬었다.
이때부터 어갱(魚羹, 생선국)과 계육(鷄肉, 닭고기), 송자(松子, 잣), 송골병(松骨餠), 인삼주 같은 고려 음식이 원에 유행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몽골의 유제품이나 과자에 찍혀 있는 문양은 이때에 받아드린 것이라고 한다.
나중에 국립몽골역사박물관에서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고려와 원나라간 교류 시기에 고려에서 원나라로 넘어간 ‘인두’는 그들도 여전히 똑같이 발음했고 여전히 사용하는 생활도구였다.
우리는 몽골의 어느 박물관에서나 빠짐없이 우리네 것을 빼닮은 연죽(담뱃대)과 담배통을 발견하게 된다. 알고 보니 ‘고려풍’을 타고 들어간 새로운 버전인 ‘조선풍’이다.
조선 땅에 1636~1637년 심한 우질(牛疾, 소 전염병)이 돌아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자 인조는 성익(成)을 몽골에 보내 담배와 소를 바꿔오게 한다.
성익은 몽골의 여러 기(旗)를 돌아다니면서 담배가 추위와 정신 집중에 유효하다는 설득으로 몽골 소와 담배를 교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들여온 몽골 소가 오늘날 한우의 조상인 것이다.
이를 계기로 17세기 중엽부터 몽골에는 담배가 퍼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라마교의 나라 몽골에서 승려는 흡연이 불허되기 때문에 돌로 만든 작은 통에다가 담뱃가루와 향료를 섞어 코로 빠는 이른바 ‘코담배’라는 독특한 흡연법이 발생한다. 이런 코담배는 그들의 박물관(필자간 방문한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었다.
그러자 귀족들과 일반 목민들까지도 따라함으로써 하나의 사회풍조로 번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만날 경우 코담배를 교환하는 인사법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를 고려풍의 반대 버전이라할 수 있는 고려의 ‘몽골풍’이다.
이 ‘몽골풍’은 주로 복식과 음식, 언어 등 생활문화 영역에서 일어났으며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원래 고려인들은 윗옷과 아랫도리를 하나로 잇고 소매가 헐렁한 포를 입었는데 이때부터 윗옷과 아랫도리를 따로 재단해 이어 붙이고 아랫도리에 주름을 잡아 활동에 편한 몽골식 칠릭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도 예모로 남아 있는 여성들의 족두리는 원래 ‘고고’라는 몽골 여성들의 외출용 모자였던 것이 들어와서는 예모(禮帽)로 변신한다.
신부의 뺨에 연지를 찍는 화장도 ‘몽골풍’이다. 상투 대신 정수리부터 이마까지 머리를 깎고 가운데 머리카락은 뒤로 땋아 내리는 이색적인 몽골식 개체 변발(開剃髮)도 한때 유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