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중화요리의 시작은 언제일까… 1900년대? 혹은 191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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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중화요리의 시작은 언제일까… 1900년대? 혹은 1910년대?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4.08.30 10:39
  • 기사수정 2024-08-30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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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화교 이주 속 중국요리 등장… ‘한국적인 중화요리’의 탄생
군산, 일제강점기 전북 내 중화요리 및 호떡집의 핵심적인 입지 다져
70년대 화교 국내외 대거이주… 중화요리 토착화 통해 짬뽕 메카 우뚝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 빈해원이 맛의 고장 대표 맛집으로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사진 출처=문화재청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 빈해원이 맛의 고장 대표 맛집으로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사진 출처=문화재청

‘짬뽕 등 중화요리 메카’ 군산의 시원은 언제부터였을까.

군산의 중화요리점과 호떡집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를 나타내는 정확한 자료나 근거는 별로 없다는 게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서해안권 도시의 개항시기는 인천과 목포와 비교할 때 군산은 다소 늦은 시기에 개항했지만 전국의 중화요리 역사를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군산에서 중화요리 등장은 1900년대 또는 1910년대로 추정하고 있는 연구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31일 오후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군산과 함께 한 화교의 공간· 음식, 그리고 신앙의 세계’ 세미나(제2회 군산근대역사박물관· 한국화교화인연구회 공동학술대회)에서 재미난 연구자료가 발표됐다.

그중 하나가 이정희 인천대 교수의 ‘전라도 지역 화교 중국음식점의 탄생과 전개과정(군산을 중심으로)’이다.

그동안의 다수 화교와 관련된 다수의 연구들이 수도권 중심으로 전개된 것과 달리, 이 교수의 논문은 오늘날 ‘짬뽕도시’ 군산을 설명해주는 의미있는 단서들이어서 요약· 정리했다.

중국인들의 군산 이주는 군산개항(1899년 5월)부터 본격화됐고 이 시기가 군산화교역사의 시작이란 것.

군산화교의 호수 및 인구는 1910년 25호(95명)에서 1923년 73호(323명)로 증가했다. 직업별 분포는 포목상점과 요리점, 일용잡화점, 음식점, 호떡집 등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 음식점 규모에 따라 요리점(종업원 10명이상), 음식점(종업원 5명이내), 호떡집(가족경영하며 1~2명 종업원)으로 구분했다.

1923년엔 요리점 1호, 음식점 6호, 호떡집 16호가 영업하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볼 때 서울과 인천 등의 중국음식점이 1880대 혹은 1890년대에 탄생했을 것으로 보이고 1900년대에는 그런 음식점들이 더 늘어났다.

1910년대 들어서면서 대구와 경북지역에도 중국음식점이 개업한 것으로 보아 군산도 1900년대, 적어도 1910년데 중국 음식점이 등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목포의 경우도 거의 비슷한 흐름을 보였을 것이다.

초창기 중국요리를 주도한 음식점들로는 일제강점기의 중화루와 영규원, 홍순루, 화향점, 복승원 등이 있었는데 이들 중 어느 하나가 중국음식점의 시작이었을 것이라 추론했다.

목포와 군산의 화교인구 역전 현상은 1915년부터 였고 1930년에는 전북의 화교수가 전남을 능가했다.

이런 인구변화에도 군산화교는 1930년 군산부 인구의 2.7%에 불과해 중국요리점 및 음식점들의 주요 고객은 일본인이나 조선 상류층이었고, 음식점과 호떡집의 경우 조선인이 더 많았다는 게 이 교수의 논문 내용에 있다.

이 시기 전북의 중국음식점과 호떡집 총계는 전국서 차지하는 비중은 10.7%에 달했고 남한지역 가운데에서는 서울, 경기에 이어 3번째로 많았다.

이런 중국 요리점 및 음식점은 한동안 확산세를 유지했지만 1927년 화교배척사건 이후 수년간 성장세는 물론 화교인구 급감으로 이어졌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화교 인구는 더욱 줄어들었다.

해방 후에도 이런 추세와 흐름은 계속됐다.

한국전쟁기에는 군산의 화교나 음식점들이 어느 정도 유지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7년 군산의 음식점은 37호(곳) 188명이 종사한 것으로 통계에 나와있다.

화교의 중국음식점은 1960년대에 전성기를 맞아 전체 중국 음식점의 95%가 화교경영이었고 다만 1963년 화교중국음식점 점포수는 전국의 4.6%에 달해 1930년의 10.7%에 비해 비중이 크게 감소했음을 보여줬다.

급변은 1960년대 후반부터였다.

이후 1970~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더욱 쇠락을 거듭했는데, 그 직접적인 이유는 한국정부의 화교에 대한 각종 제도적 차별과 한국인 경영의 중국음식점과의 치열한 경쟁 등에 밀려 화교들의 대만과 미국 이민 등으로 대거 이주하는 상황을 맞았다.

이런 인구급감은 화교 쉐프나 그곳의 요리인력들이 사라지면서 그 빈자리에 한국인들이 대거 채워졌고 이곳에서 배운 한국인 쉐프들이 중화요리 시장을 주도하는 상황으로 변모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에는 한국인 음식점 경영자 94%, 화교 6%로 바뀌면서 한국인이 주도하는 중국요리점시대를 연 것이다. 30년만에 일이었다.

중국음식의 시작은 초기 중국인 쉐프들이 반세기이상 이끌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소수의 맛집 중국음식점을 제외하고는 쇠락을 거듭했고 그곳에서 일했던 한국인들이 중심이 돼 중화요리 및 음식을 재해석하거나 한국인들의 특유의 맛들을 가미, 사실상 중화요리의 토착화가 본궤도에 올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적인 중화요리’가 만들어지면서 오늘날 짬뽕도시 군산의 입지가 굳혀지는 상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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