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족· 반역사세력 맞서 광복 79주년 맞아 민족정기와 결기 다질 때
‘또 다시 날뛴 친일세력’ 맞서 광복회 등, 광복절 행사불참 등 강력 반발
‘79주년 광복절’ 앞두고 거대한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역사와 관련된 다수의 기관 대표들에 뉴라이트계열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차지하면서 또다시 친일청산이 시대적인 과제로 떠올랐다.
그 불을 지핀 것은 국가보훈부가 지난 6일 기습적으로 김형석 고신대 석좌교수를 신임 독립기념관장으로 발령하면서부터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뉴라이트 계열인사들을 역사· 교육 기관장으로 대거 발탁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장, 국가교육위원장, 진실화해위원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근대화됐다고 미화하고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역사를 폄훼하며, 독재의 어두운 역사를 경시하며,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광복회 회원들과 이종찬 광복회장이 김형석 교수의 독립기념관장 발령을 성토하는 기자회견과 함께 광복절 행사 불참을 선언하는 등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여기에다 독립운동가 선양단체로 구성된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도 정부 경축식에 불참하고 별도의 광복절 행사를 열기로 했다.
독립기념관은 김 관장이 정부 경축식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개관 후 37년 만에 처음으로 자체적인 광복절 경축식을 하지 않기로 했다.
더욱 분노가 치민 지점은 그릇된 현정부의 역사인식과 형태다.
특히 오늘의 대한민국 극우 정치꾼과 친일학자 등 친일세력들은 대한민국의 존립 근거와 자긍심을 한없이 추락시킨 것도 모자라, 반민족이고 반역사적인 형태를 일삼으면서 아예 부끄러움마저도 잃어 버렸다.
이런 시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 시민들에게 잘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항일공간이 있다.
그런 역사적인 공간이 대야면 복교리와 김제 청하면 동지산리를 잇는 ‘새챙이다리(옛 만경대교)’의 청하면의 만경강 변에 있는 ‘구한말 우국지사’ 춘우정 김영상(金永相: 1836~ 1911) 선생의 투수비(投水碑: 정확한 명칭은 ‘춘우정 김선생 투수순절추모비’)다.
구한말 국운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던 을사늑약 이후 전국 최초의 의병운동이 1906년 태인지역에서 일어난 ‘병오창의’다.
태인 의병은 면암 최익현과 군산출신 돈헌 임병찬 선생이 중심이 되어 정읍시 칠보면소재 무성서원에서 일으킨 의병이다. 여기에 당시 무성서원(武城書院)의 장리(掌理)로 있던 춘우정 나이 70세에 총참모장으로 뜻을 같이했다.
1910년에 일제는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조선의 전직관료와 유림 원로들을 회유하고자 ‘은사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주었다.
같은해 10월에 춘우정에게 은사금 사령서(통지서)가 전달됐다.
춘우정은 여러 차례 은사금을 거절했으나 일제의 회유는 계속됐다.
격분한 춘우정은 “대한(大韓) 신민으로 오랑캐 원수의 문적에 이름을 둘 수 없다”고 격분하고 은사금 사령서에 적혀있는 ‘김영상’ 이름 석자를 찢어버렸다.
‘각금서(卻金書)’에서 춘우정은 ‘죽음을 맹서하고 이 돈을 받을 수 없다. 합방 후 죽고자 할 뿐이었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다’고 기록했단다.
일황이 내려준 은사금 사령서를 훼손했다고 하여 춘우정은 1911년 5월 2일 정읍 동곡헌병소에 구금됐다. 이때 76세였다.
동곡헌병소에서 군산감옥으로 이송되던 중에 만경 두곡점에 잠시 머물렀다.
5월 8일 만경강 새챙이(신창진: 新倉津)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한 가운데 쯤 왔을 때 춘우정은 ‘절명시’를 의대(衣帶: 허리띠)에 적어 놓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
후송하던 왜인 헌병이 급히 물속으로 뛰어들어 겨우 구해냈다.
순절의 뜻을 이루지 못한 춘우정은 군산감옥에 수감됐고, 그 이튿날 5월 9일 향년 76세로 절명했다. 5월 2일 동곡헌병대에 구금되면서 곡기를 끊은 지 8일 만이다.
‘금각일기(金卻日記)’에 보면 조카 한술이 춘우정에게 6일간 미음을 두 번 드리는데 그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장면을 구한말 명성을 날린 어진화가 채용신(1850~ 1941)이 그린 ‘투수도(投水圖)’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옛날 굴원의 한결같은 충성은(昔屈子之精忠)
멱라수를 가리키며 기약하였고(指汨羅(水)而爲期)
지금 나 춘우는 불운하여(今春雨余陽九)
사진(沙津)을 따라 여기서 죽으리(從沙津而逝斯)
술(초주) 3배를 따라(酌椒酒之三桮)
물고기 뱃속의 충혼을 위로하고(慰魚腹之忠魂)
노중련의 높은 발자취 따라(踵東海之高蹈)
물가를 영원히 오르내리리(永陟江於干磐) ]
‘구한말 정읍 태인의 명망 높은 유림’ 춘우정이 일제가 ‘은사금’이라는 명목으로 내려준 회유금을 뿌리치고 단식하고 순절하기 전 허리띠에 숨겨둔 ‘절명시’다.
이 시의 ‘멱라수(汨羅水)’는 기원전 278년 초나라의 대부 굴원이 투신자살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1978년에 세운 ‘춘우정 김선생투수순절비’가 오늘도 그가 순절코자 뛰어든 만경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광복 79주년을 맞아 역사를 잃은 민족의 길을 택할 것인지, 과거 아픈 과거사를 극복하는 흐름에 동승할지는 오직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음을 명심, 명심할 때다.
한편 채용신은 태조 어진을 비롯한 조선의 역대 왕의 초상을 그린 어진화사로, 1923년 신태인 육리마을에 ‘채석강도화소’라는 공방을 세워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 춘우정은 누구?
김영상의 본관은 강진(도강)이며, 자는 승여(昇如). 호는 춘우정(春雨亭)이다.
아버지는 경흠, 어머니는 나주 오씨로 전북 고부 산북리(현 정읍시 정우면)에서 1836년(헌종 2)에 출생해 16세 때 선조들의 세거지인 태인 고현내면 무성리 원촌으로 이주해 살았다.
춘우정은 18세에 집안 아저씨인 이재 김인흠(肄齋 金麟欽)에게 배웠다. 23세 때는 집안 할아버지인 비인재 김기(卑忍齋 金曁)에게 수학했다.
1871년에는 스승 비인재를 따라서 노사 기정진을 만났고, 1885년(고종 22) 50세의 나이에 익산의 인산 소휘면(仁山 蘇輝冕)에게 집지(執贄: 제자가 스승을 처음으로 볼 때에 폐백(幣帛)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고 문인(門人)이 되는 의례)하고 사제의 연을 맺었다.
춘우정은 동년배인 충청도 옥천의 연재 송병선과 교의가 두터웠으며, 전주의 간재 전우와도 교류했다.
노사(기정진)와 간재(전우)는 19세기 후반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며, 연재(송병선)는 충청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그 문인들이 호남에 많이 분포했다. 연재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결했다.
춘우정은 면암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절하자 이듬해 1907년 시산리 대주평(현 칠보초등학교 자리)에 태산사(台山祠)를 세우고 면암의 영정을 봉안했다.
그는 유림들의 요청으로 태산사 상량문을 지었고, 한동안 태산사에 머물렀다.
태산사는 일제 탄압으로 훼철되었다가 1975년 원촌마을 산중턱으로 옮겨 중건하면서 시산사(詩山祠)로 이름을 바꾸어 김기술과 김직술 선생을 추가 배향했다.
해방후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