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출신 항일 의병장 임병찬 유해, 고향으로 모시자"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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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출신 항일 의병장 임병찬 유해, 고향으로 모시자" 목소리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4.07.05 09:53
  • 기사수정 2024-07-07 1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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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옥구읍 상평출신 의병장… 1906년 4월13일(음) 무성서원 거병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 등
문화원ㆍ 평택 임씨 옥구덕온종중, 돈헌 성역화 사업 촉구… 시에 예산 요청
107년간 타향에서 초라하게 떠돌고 있는 ‘돈헌의 유해’ 방치 더 이상 안돼
군산 출신 항일 의병장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의 충혼제가 지난달 28일 문화원 정원 무대서 열렸다/사진=군산시
군산 출신 항일 의병장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의 충혼제가 지난달 28일 문화원 정원 무대서 열렸다/사진=군산시

국가간 또는 지역간 역사전쟁이 수백년동안 되풀이되고 있지만 그 출발은 역사의 헤게모니와 맞물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얼마 전,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의 동상 이전 등을 놓고도 이런 접근과 논란이 촉발됐었는데 우리 지역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군산은 의병항쟁- 3.5만세 운동- 옥구농민항쟁 등으로 이어지는 항일의 고장임에도 그 소중함을 소홀히 해 역사와 혼을 잃어버린 후손처럼 살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 항일의 고장에서 이런식 추모는 결코 안돼

그런 나쁜 선례 중 하나가 우리 고장이 낳은 선비요, 의병장인 돈헌 임병찬(1851~1916)선생의 선양문제다.

새삼스럽게 왜 임병찬 선생인가.

지난 달 25일(윤5월 23일)은 임병찬 의병장이 순절한 지 107주기를 맞았지만 그의 유해가 타향을 떠돌고 있다.

구한말 항일 투쟁에서 선비의 기개와 기상을 통해 망국의 길에 접어든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다.

하지만 군산시와 우리 시민들은 10여년간 진행되어 온 ‘제107주기 항일의병장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 충혼제’로 예우하는 정도다.

그의 정신은 온나라에 퍼져 있는 듯하지만 유해는 고향에서 떨어진 순창 회문산 정상주변에 초라하게 영면하고 있다면 합당한 예우라 할 수 있을까.

최근 군산시 등이 열고 있는 충혼 행사에 만족하는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자기합리화의 구실로 삼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아닌 것 같다.

돈헌은 물론 동생 임병대- 아들 임응철-손자 임경· 임진 등 3대가 함께 항일구국투쟁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다며 그 일족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라고 칭하는 지역향토사학자도 있다.

임병찬 선생/투군DB
임병찬 선생/투군DB

그의 삶은 이러했다.

돈헌은 오늘날 옥구읍 상평리 광월마을(남산 밑)에서 출생했다.

16세에 전주부 식년감시(式年監試)에 장원급제 했으나 가세가 빈한해 17세 옥구현 형방을 시작으로 벼슬살이에 나섰다.

32세 되던 해에는 두 번째 아내 고향인 당시 정읍군 산내면 장금리 영골(영동)로 이거했다. 39세에 낙안군수로 부임해 각종 폐해를 바로 잡아 선정을 베풀었으나 1년 남짓 짧은 관직생활을 마치고 귀향 후 1893년 인근 산내면 종성리로 이사했다.

구한말 급변하는 상황을 보냈다.

1906년은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해가 바뀐 정월의 어느 날, 뜻밖의 편지를 받는다.

당대의 선비이자 명신인 면암 최익현(1833~1906)이 사람을 통해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고종은 최익현에게 밀지를 내려 7도 의병군의 통솔을 일임했었다.

경기도 포천출신 최익현은 거병 계획을 세우고 판서 이용원(李容元) 등에게 함께 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모두 응하지 않자 낙담하고 있던 차였다.

편지가 전달된 지 한 달 뒤 최익현은 직접 임병찬을 찾아온다.

뜻이 통한 두 삶은 그 자리에서 사제(師弟)의 예를 맺는다.

면암 최익현은 거의(擧義) 추진에 관한 모든 일을 임병찬에게 맡긴다.

# 을사조약 이후 태인 첫 호남 의병 봉기 앞장

1906년 윤 4월 13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을사조약 이후 호남 최초의 의병(병오창의)이 봉기하게 된다.

면암은 무기를 수집하고 일제의 죄 16가지를 열거한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글을 통감부에 보낸다.

얼마 후 광주관찰사가 의병 해산을 요구하는 고종의 칙령을 전달하고, 광주와 남원의 진위대도 급파된다. 일제 군경으로 알고 전투를 벌이려다 조정의 진위대 군인이라는 것을 알자 최익현은 자진 해산을 지시한다.

차마 동포들간의 유혈을 할 수 없어서였다.

해산 후 최익현과 임병찬 선생 등 의병장 대표들은 서울로 압송되는데, 일제는 면암에게 대마도 감금 3년, 임병찬에게 감금 2년을 선고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의병들은 투쟁에 나섰지만 정부군에 유혈 진압됐다.

두분은 대마도 이즈하라에 있는 일본군 위수영에 감금된다. 최익현은 옥고를 겪다가 1906년 11월 대마도 감옥에서 순국했고, 임병찬은 이듬해 1월 형기가 감면되어 석방된다.

고국으로 돌아온 임병찬은 자신이 살던 순창에서 생활한다.

1914년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하여 대한독립의군부로 만들었고,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거문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 최근 들어 선생 묘역 관리 … 돈헌회 주도에 해당 지자체도 관심

 

순창 회문산 임병찬 의병장의 묘/사진=순창문화원 제공
순창 회문산 임병찬 의병장의 묘/사진=순창문화원 제공
순창 회문산 임병찬 의병장의 묘/사진=순창문화원 제공
순창 회문산 임병찬 의병장의 묘/사진=순창문화원 제공

돈헌은 가열찬 항일의병투쟁을 통해 순국의 길을 택했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그는 일반 인이나 고향 군산과 멀어져 있었다.

본래 자손들에 의해 선생의 묘는 순창 회문산 정상(837m)에 모셔져 있다.

돈헌의 애국항일운동과 의병투쟁에도 해방 직후에 건립된 상석 앞면에 비명(資憲大夫 獨立義軍元帥府 司令總長 平澤林公諱炳瓚之墓 乾坐 檀紀 四千二百七十九年 丙戌 五月一日 不肖孫 鎭鉉 奉安)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 묘역 관리가 제대로 안됐다가 돈헌 임병찬 의병장의 친손 모임인 ‘돈헌회’가 나서서 2019년 9월 ‘돈헌 임병찬 선생 묘역 정비사업’을 1년만(2020년 9월말)에 완료했다.

순창군은 최근 들어 이곳에 관리에 열의를 보이고 있지만 군산시의 최호 장군 유지처럼 관리되지 않다는 게 군산문화원과 뜻있는 시민들의 생각이다.

정읍시에선 최익현 선생과 함께 헌양사업을 추앙받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돈헌의 스승 면암 최익현 선생은 출생지(포천)는 물론 태인, 충남 청양 및 예산군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는데다 선양작업도 전국적이다.

심지어 대마도에 순국비까지 세워져 그의 항일투쟁정신을 추앙하고 있다.

# 이젠 시와 시민이 나서 성역화 사업해야 할 때

하지만 면암의 제자이자 의병투쟁에 앞장선 돈헌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

이에 수년 전부터 임씨 종친들과 군산문화원(원장 정성호) 등이 나서 임병찬 선생의 유해를 고향으로 모시는 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군산시와 시민들의 반응은 미미하다.

직계 유족들이 아직 부정적인 입장에 있는 것은 돈헌과 그의 부모 봉분이장 등에 소요되는 엄청난 비용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임씨종중(平澤林氏沃溝德溫宗中)은 모실 공간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 만큼 시가 예산을 적극 지원해서 의병장 임병찬 선생을 고향으로 모셔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상호 군산문화원장도 “얼마 전, 제107주기 항일의병장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 충혼제에서 돈헌 유해를 고향 군산으로 모셔야 한다”고 강력히 주창했다.

현정부의 일부 인사들처럼 뉴라이트적인 사고가 아니라면 돈헌의 유해 고향봉환을 더 이상 방치하거나 방기해선 안될 일이다.

이제 시와 시민 모두가 나설 때다.

더 늦기 전에 스러져간 나라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구한말 항일의병장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성역화사업을 위한 예산 지원과 선양사업에 거시(巨市)적인 에너지와 힘을 모으는 것이야 말로 오늘을 사는 후손의 길이요,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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