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의 해망굴 이야기] 질곡의 세월 견뎌낸 해망굴 음악영화제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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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의 해망굴 이야기] 질곡의 세월 견뎌낸 해망굴 음악영화제 눈길
  • 조종안 기자
  • 승인 2024.05.07 11:13
  • 기사수정 2024-05-0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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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해신동에 위치한 해망굴(국가등록문화재 제184호)은 월명공원(옛 군산공원)을 관통하는 반원형 터널로 1926년 가을에 개통됐다.

당시엔 해망수도(海望隧道), 해망터널 등으로 불리었다. 교통의 중심지였고, 광복 후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가 됐으며, 천막촌이 형성되기도 했던 해망굴.

시민들의 애환이 공존하는 그곳으로 시간여행을 떠나 본다.-<기자말>

▲ 월명공원을 배경으로 찍은 군산소년야구대회 우승팀 기념사진.(1927년 5월 4일 자 '동아일보') /조종안 기자 제공
▲ 월명공원을 배경으로 찍은 군산소년야구대회 우승팀 기념사진.(1927년 5월 4일 자 '동아일보') /조종안 기자 제공

1927년 4월 29일 군산 신사광장(공중운동장)에서 개최된 소년야구대회(18세 이하) 우승팀 기념사진이다. <군산 야구 100년사>(2022)에 따르면 소년야구대회는 성대한 입장식과 활승소년군의 우승기 반환에 이어 기독소년군, 군보교군, 신흥소년군 등 네 팀이 자웅을 겨뤘다. 선수들의 불꽃 투혼은 관중을 열광케 했으며, 우승의 월계관은 기독소년군이 차지하였다.

사진 왼편 상단에 해망수도(해망굴)가 보인다. 이는 군산공원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임을 암시한다. 신사광장(현 서초등학교)에서 시상식 마치고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소년야구대회는 '동아일보' 사옥 준공기념으로 열렸으며, 대회를 앞두고 참가팀들이 맹렬히 연습 중이라는 대목에서 당시 군산의 소년야구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해망굴은 1926년 10월 18일 개통식을 치른다. 당시 신문은 군산공원 아래 운동장(신사광장)에서 개통식을 성대하게 치르기 위해 전북도청 토목과장을 비롯해 군산부 협의회원, 각 신문사 기자 등 6~7천 명을 초대했다고 보도하였다. 일제는 극심한 가뭄으로 피해 본 부민(府民)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가난한 조선인들을 공사판에 동원하였다. 이는 벽돌 하나에도 조선인의 땀과 눈물이 배어있음을 의미한다.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였던 해망터널

 

▲ 1930년대 해망수도(현 해망굴). 터널을 벗어나면 해망정(해망동)이다. ⓒ사진출처: 군산역사관/조종안 기자 제공
▲ 1930년대 해망수도(현 해망굴). 터널을 벗어나면 해망정(해망동)이다. ⓒ사진출처: 군산역사관/조종안 기자 제공

해망터널(길이 131m, 높이 4.5m)은 자동차 통행이 가능한 왕복 2차선으로, 명치정(중앙로1가)과 해망정(해망동) 연결을 위해 완공된 것으로 알려진다. 더 많은 양의 농수산물 반출이 일제의 목적이었던 것. 도선장(군산-장항)과 군산항역이 한 마장 거리에 있었으며, 터널 주변은 근대도시 모습을 갖춘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교통 요충지였다.

터널이 개통된 1926년은 제3차 축항공사(1926~1933)가 시작된 해이다. 기공식에 참석한 사이토 총독이 부두에 산처럼 쌓인 쌀을 보고 '오,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을 외쳤던 그해이다. 또한 해망굴 개통과 함께 동해안(째보선창) 매축공사가 시작되고, 바둑판같은 격자형 도시 권역이 지금의 월명동, 신흥동 지역까지 확대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해망터널은 해망정(현 해망동)을 지나 불이농촌, 은적사 등과 연결됐다. 지금이야 높고 낮은 건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지만 당시엔 바다를 끼고 달렸다. 은적사 아래까지 조수의 영향을 받았던 것. 채만식 소설 <탁류>는 "바다에 가까운 하구의 벅찬 강물에 돛단배들이 담숭담숭 떠 있고 강 건너 충청도 땅의 암암한 연산(連山) 돌 봉우리 넘어로는 오월의 창공이 맑게 기울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터널 부근에는 안국사(현 흥천사)를 비롯해 일본 어업신을 모신 금비라신사(金比羅神社), 천조대신을 모신 군산신사(群山神社), 신사광장으로 불렸던 공중운동장(현 서초등학교), 도립군산의원(군산의료원 전신), 공회당(해신동 주민센터) 등이 자리하였다. 특히 신사광장과 도립의원 자리는 조선 시대 세곡(稅穀)을 말리던 지역으로 전해져 묘한 여운을 자아낸다.

지금도 전쟁의 상흔 남아있는 해망굴

▲ 일제강점기 신사광장(현 서초등학교), 왼쪽에 해망굴 오른쪽은 도선장, 군산항역 등과 연결된다. ⓒ 사진출처: 군산역사관/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 일제강점기 신사광장(현 서초등학교), 왼쪽에 해망굴 오른쪽은 도선장, 군산항역 등과 연결된다. ⓒ 사진출처: 군산역사관/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해망터널 앞은 명치정(중앙로 1가)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태평양전쟁 때는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몰린 조선 젊은이들을 환송하던 신사광장이 이웃에 있었고, 광복 후엔 한국 해군부대가 주둔하였다. 한국전쟁(1950~1953) 때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북한군 지휘 본부가 들어서는 바람에 연합군 공군기의 폭격을 받았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휴전협정 조인 70년을 넘긴 요즘도 터널 주변에서 전쟁의 상흔이 발견된다. 북한군 주둔 당시 미전투기의 기총사격으로 인한 총탄 흔적들이다. 해망굴은 전쟁 중 천막촌(움막촌)이 형성되기도 했다. 1·4후퇴 때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피난민들이 터널 벽과 주변 석축을 담벼락 삼아 움막을 짓고 살았던 것. 수용소 같은 천막촌 풍경은 7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

해망굴은 행정구역상 입구 쪽은 금동, 바깥쪽은 해망동에 속하였다. 터널 바깥은 이발소, 다방, 미장원, 생선도매점, 중국집, 잡화상 등이 자리한 상가였으나 몇 년 전 모두 철거되고 자연마당이 조성됐다. 입구 쪽에도 신발가게, 분식집, 점집, 방물상 등 노점상이 즐비했으나 모두 사라지고 안내판, 표지석 등이 세워져 있어 세월의 변화를 실감나게 한다.

터널 개통 후 처음으로 '음악영화제' 열려

▲ 양쪽 석축만 남은 최근 해망굴 입구. 소년야구대회 우승팀 기념사진 찍은 자리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 양쪽 석축만 남은 최근 해망굴 입구. 소년야구대회 우승팀 기념사진 찍은 자리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최근 해망굴 모습이다. 일본식 절 안국사는 흥천사, 해망수도는 해망굴로 바뀌었으며, 소년야구 우승팀 기념사진 촬영지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주변 건물들은 온갖 세월의 풍상에 대부분 사라졌으나 피난민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던 석축만 남아 있다. 지난 4월(19~20일)에는 봄날의 초저녁 밤을 감미롭게 물들인 '해망굴음악영화제'가 열렸다.

▲ 해망굴 앞에 설치한 노천극장에서 블랙코미디 영화(인생은 아름다워)가 상영되고 있다(2024년 4월 20일)./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 해망굴 앞에 설치한 노천극장에서 블랙코미디 영화(인생은 아름다워)가 상영되고 있다(2024년 4월 20일)./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둘째 날(20일)에는 터널에서 클라리넷 앙상블 공연이 펼쳐졌고, 노천극장에서는 제2차 대전 중 독일군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 유대인 가족 일화를 담은 블랙코미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 아카데미영화제 수상작)가 상영됐다. 현장에서 만난 고보연 작가(설치미술가)는 "독일 유학시절 감명 깊게 본 영화라서 감회가 새로웠다"며 소감을 밝혔다.

"처음 독일에서 볼 때는 대사(독일어) 이해가 어려웠으나 오늘은 짧은 자막까지 꼬박꼬박 읽으면서 감상했다. 특히 독일과 일본은 같은 전범국가임에도 역사 인식에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독일은 진정으로 반성하는데 일본은 자기들의 침략조차 부인하고 있어서다. 독일이 나치의 만행을 그린 영화를 자주 틀어주는 것에서도 두 나라의 역사인식 차이가 느껴진다."

고 작가는 "나치 독일에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보며 눈물이 나와 혼났다"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에 잘 어울리는 영화였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대현 감독('해망굴음악영화제' 기획자)은 페이스북에 "군산은 아이러니한 도시죠. 인구 26만의 도시에 예술영화 전용관 하나 없는, 영화 문화의 불모지 같은 도시. 반면, 야외 어디에 스크린 하나 갖다 세우면 시네마천국처럼 영화 광장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공간이 많아요. 해망굴도 그런 공간이었습니다."라고 후일담을 남겼다.

해망굴은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음악영화제는 터널 개통(1926) 이후 처음 아닌가 싶다. 질곡의 세월을 견뎌온 역사적인 공간에서 펼쳐진 영화음악제는 남다르게 다가왔다. 어제와 오늘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이 일대가 향토사를 접목한 문화·예술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자료

<군산시사>(2000), <군산야구 100년사>(2014), 옛날신문, 하반영 화백 생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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