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02] 군산 ‘3.1운동 역사공원’과 구암교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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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02] 군산 ‘3.1운동 역사공원’과 구암교회(2)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5.25 10:44
  • 기사수정 2023-05-25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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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교회, 개복교회와 같은 역사… 한뿌리에서 분화
항일운동사· 근대사상 교육 앞장선 자랑스런 역사 눈길
호남 최초 선교사 ‘전킨’의 첫 사역지 군산스테이션 완성

구암교회는 군산선교사에 굵직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항일운동, 교육사업 등에도 큰공헌을 했다.

구암교회는 본래 개복교회와 한뿌리로 출발했다.

하지만 전킨 선교사의 활동범위와 그 후임 선교사들의 역할에 따라 자연스럽게 분리되면서 별개의 교회로 성장, 발전했다.

구암교회는 1900년대에 이르러 개복교회와 다르게 발전을 거듭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변화의 물결에는 오늘날의 초·중·고 개념이 시작된 근대학교 설립과 항일운동의 핵심적인 역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가스펠투데이, 전킨 선교사(전킨기념사업회) 등 참조 요약.)

# 군산구암교회 설립, 그리고 7인의 미 남장로교 선교사

구암교회의 시원은 이렇다.

그 설립 시기에 대한 논란과 주장은 여러설이 존재한다.

그 출발에 대한 논쟁은 있을 수 있지만 정설은 1893년로 잡고 있다.

전킨 선교사 등이 군산에 와서 활동한 시점에 근거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암교회는 1993년 10월 설립 100주년 행사를 가졌다.

구암교회는 1893년 미국 남장로 교회 소속 ‘7인의 선발대’의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과 드루(Adamer D. Drew, 위대모) 선교사가 장인택(張仁澤)을 조사로 하여 세웠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의사 다니엘스(Daniels, T.H.)가 1897년 구암예수병원(궁멀 야소병원)을 세우고, 영명학교(현 제일중· 고)와 멜본딘여학교(현 영광중· 여고)가 1903년 차례로 개교하면서 복음전파와 함께 의료‧ 교육 선교가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1899년 구암동산에 세워진 ‘군산선교스테이션’은 호남과 충청 지역의 선교 교두보의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지역 교회와 선교거점 교회로서의 역할을 해온 구암교회는 한강 이남 최초의 3·1 운동 발상지라는 위상과 자랑스러운 선교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이 교회는 1919년 3월 5일 독립만세운동 거사에 구암교회 성도 28명 이상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14명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됐을 정도로 대단한 항일운동사에서 한획을 그었다.

원래는 군산항 인근 수덕산에서 선교사들이 기거하며 전도를 하였으나 일본이 교회와 인근지역을 조차함에 따라 강제이전이 불가피했다.

1899년 12월 19일 일명 군산교회로 불리는 군산 선교부와 먼저와 있던 데이비스 여선교사의 궁멀기도처와 합병하여 오늘날의 3.1역사공원(구암동산)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후 예배 처소가 협소하다고 느낀 교인들은 헌금하여 구암리 일대 땅을 매입하고 성전을 봉헌했다.

구암교회는 1904년에는 오인묵(구암교회 1대 장로로 한국인 최초의 의료 선교사 오긍선의 아버지)을 중심으로 온 교인들이 합심 헌신하여 증축됐다. 1916~ 1919년에는 벽돌자재로된 ‘ㄱ’자 교회당을 재차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959년에는 석조 건물을 지어 새롭게 발전을 거듭했다.

구암교회와 선교사들은 안락소학교(구암초교 전신격), 영명학교, 멜볼딘여학교, 군산예수병원(원명은 프렌시스 브리지 앗킨슨 기념병원또는 구암병원) 등을 세우고 군산을 호남선교중심지로 우뚝서게 한다.

군산선교스테이션에는 궁멀교회(구암교회), 성경학교, 군산예수병원, 병원숙소, 영명학교, 멜볼딘여학교, 안락소학교, 기숙사, 도서관 그리고 선교사 사택도 여러 채 있었다. 금강이 굽어보이는 자리에 전킨 선교사의 가족묘가 있었고 축구와 야구가 가능한 운동장과 정구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형태는 1960년대까지 유지했으나 세풍과 한전사택 등이 들어서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씩 사라졌다.

오늘날은 옛 구암예수병원 직원 숙소 자리에 ‘호남선교기념예배당’(선교 역사적 의미를 새긴 건물로 설계 건축: 2003년 11월 3일 헌당 예배)으로도 불리는 구암교회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암교회 선교타워의 자료들
구암교회 선교타워의 자료들

2009년 교회를 새로 건축한 구암교회는 ‘호남선교기념예배당’으로 명명했다.

군산 땅을 최초로 밟은 7명의 선교사와 한국인 조사 장인택을 기념, 전면에 상징하는 기둥 8개를 배치했다.

이들 8명의 주인공들은 이렇다. 윌리엄 전킨, 메리 레이번(Mary Leyburn, 윌리엄 전킨의 부인), 루이스 테이트(Lewis B. Tate), 팻시 볼링(Patsy Bolling, 윌리암 레이놀즈 부인), 리니 데이비스(Linnie Davis), 윌리엄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매티 테이트(Mattie Tate, 루이스 테이트의 여동생) 등 7인의 선교사와 한국인 조사 장인택이다.

구암교회 전경
구암교회 전경

교회본당과 선교탑은 3・5만세운동의 출발점이 된 것을 기념해 35m로 했다.

그리고 교회본당의 높이를 8m로 해 교회 지붕부터 선교탑 꼭대기까지의 높이는 교회 설립일을 넣어 27m로 만들었다.

선교탑 꼭대기는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성경책을 가져온 것을 기념해 배와 성경책을 펼쳐놓은 형상으로 건축했다. 선교탑 6층과 7층은 3・1운동의 자료를 모아놓은 곳이어서 3・1운동 기념탑으로도 불린다.

구암교회는 1995년부터 매년 3월 1일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군산시와 익산보훈지청 후원 아래 3·1 거리행진 재현 및 퍼포먼스 그림, 글짓기 대회, 역사 사진 전시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또 교인 및 시민, 학생 등과 함께 하는 3·1 거리행진 재현을 통해 항일의 숭고한 역사적 숨결을 고취하고 체험하는 교육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한편 구암교회 뒷편의 구암동산에는 호남선교100주년기념비와 군산 3·1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구암교회는 2019년 제7호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로도 지정됐다.

# 미국 남장로교 7명의 선교사들 뒷얘기

미국 남장로교 7인의 선교사들
미국 남장로교 7인의 선교사들

미국 남장로교는 당시 조선에 최초 7인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들이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와 그의 부인 팻시 볼링(Pasty Bolling), 전킨과 그의 부인 메리 레이번(Mary Leyburn), 테이트(Lewis Boyd Tate)와 그의 여동생 매티(Mattie Tate) 그리고 린니 데이비스(Linnie Davis Harrison) 등이다.

군산과 호남의 최초 선교사는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

그가 당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언더우드 부부가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와 버지니아의 주요 교회들을 방문하여 환등기를 이용, 한국을 소개하면서 교회 기관지(또는 소식지)에 한국선교의 당위성과 자신들의 소명을 알리면서부터다.

이들의 노력은 남장로교의 관심을 일으켰다.

처음과 달리 한 달 사이에 상황이 바뀌었다.

남장로교가 지원하고 있던 그리스 선교가 정치적 불안으로 중단되자 한국 선교로 선회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언더우드의 친형인 존 언더우드가 재정 부족으로 한국 선교를 할 수 없다는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형편을 듣고 거액(2,000달러)를 기증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 또한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를 염원하며 500달러를 기부했다.

두 가지 잇단 사건 후에 남장로교 해외선교실행위원회는 전킨과 레이놀즈, 테이트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했다.

이어 다른 4명의 여성이 한국 선교로 부름을 받았다.

팻시 볼링은 5월에 레이놀즈와 결혼하여 남장로교 최초 선교사 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메리 레이번 또한 6월에 전킨과 결혼, 한국선교 그룹의 일원이 됐다.

테이트 선교사의 동생인 매티 테이트는 신학을 공부한 여성으로 6월에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또한 오지 선교사가 희망이었던 데이비스는 남장로교 해외선교실행위원회에 콩고 선교사를 자원하였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거부를 당하였다가 당시 오지나 다름없는 한국 선교사를 지망하게 된 것.

이렇게 7인의 선교사는 1892년 9월 7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 센트럴장로교회와 그랜드애비뉴장로교회가 주최한 환송 예배에 참석했다.

군산 등 호남선교에 첫 주자는 전킨.

그는 일행과 함께 한국에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세인트루이스로 가는 도중에 캔자스시티에서 편도선염을 앓았다가 치료를 받고 기다려 준 레이놀즈 선교사 부부와 함께 1892년 9월 27일 한국으로 향했다.

이들은 1892년 11월 3일 요코하마에서 먼저 도착한 테이트 남매를 만나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 때 제물포에 함께 도착한 선교사는 6명이었고 앞서 서울에 도착한 린니 데이비스가 같은해 10월 17일와 합류하면서 7인의 선교사가 모인 것이다.

이들 선교사는 서울에 체류하며 조선어와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1893년 1월 장로교공의회에서 결정대로 호남과 제주도 그리고 충청남도의 6개 군을 선교지역으로 담당하게 됐다. 선교구역이 정해졌음에도 그들은 선교지로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에 계속 체류하며 호남선교를 위한 준비했다.

<‘호남 및 군산 선교의 아버지’ 전킨 선교사의 생애>

전킨 선교사
전킨 선교사

한국 선교 초창기 16년간 호남 선교의 초석을 다진 전킨 선교사.

그는 1865년 12월 미국 버지니아주 크리스천벅에서 태어나 워싱턴 앤 리 대학교(Washington & Lee University)와 유니온 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를 졸업한 뒤 1892년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1891년 안식년차 미국에 들른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보고회에서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듣고 자원, 조선을 찾았다.

그는 1895년 호남 최초로 군산 일대에서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웠다. 그가 세운 교회는 구암교회, 개복교회, 지경교회, 남전교회, 송지동교회 등이다. 또 멜볼딘여학교, 영명학교(현 제일중·고등학교) 등을 설립했다.

전킨 선교사는 평양신학교에서 강의하며 길선주 목사 등 한국 최초 목회자들을 배출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을 계기로 호남지방 대부흥운동을 주도했으며, 1908년 1월 2일(43세) 한국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선교 기간 조지와 프랜시스, 시드니 등 세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었지만 군산과 전주 선교에 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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