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01] 군산 ‘3.1운동 역사공원’-기독교 선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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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01] 군산 ‘3.1운동 역사공원’-기독교 선교(1)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5.16 10:13
  • 기사수정 2023-09-13 08: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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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선교: 1894년 2월→ 1895년 4월(1개월간)· 9월(이후 6개월)
남장로교 전킨· 드루 선교사, 군산· 충남 등 서해안권 본격 전도
군산선교스테이션 구축: 수덕산에서 구암동 시대 활짝
구암동산의 선교스테이션 안내도. / 사진=투데이군산
구암동산의 선교스테이션 안내도. / 사진=투데이군산

군산항을 가장 먼저 찾은 이는 의료선교사 드루였다. 드루 등은 1894년 2월 호남에 설치할 선교부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6주간 전라도 순회여행을 했고 해상을 이용한 선교의 중요성과 이점을 깨닫고 군산을 선교지로 선택했다.

전킨 선교사와 드루가 그 이듬해 4월 한달간 군산에 머무르다 상경했다.

두 선교사는 이 기간동안 수덕산에 두 개의 가옥을 마련했다. 한 곳에는 작은 예배소, 또 다른 한 곳에는 진료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수천명에 달하는 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전했다.

이들 선교사가 곧바로 군산에 내려오지 못한 것은 조선말 국권침탈에 대한 외세저항을 동학농민혁명(1894~ 95년)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 전킨· 드루 선교사, 군산사역 앞장… 1896년 4월 본격

전킨은 1895년 9월 서울 선교활동을 접고 군산으로 다시 내려온 뒤 다음해 1월까지 군산선교 및 선교 준비를 마치고 상경했다.

군산 선교가 본격화된 것은 1896년 4월5일이다.

미 남장로교는 1896년 호남 선교부를 새로운 곳에 설치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두 선교사의 열정적인 선교 활동 때문에 그대로 존치됐다. 이 사이에 군산교회는 외적 내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이렇게 시작된 곳은 군산진이 있었던 수덕산.

이곳은 구암동산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약 4년동안 활발하게 선교사역을 맡아왔는데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그곳(수덕산 일대)이 일본의 조계지역(조차지)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선교타운을 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됐다.

이 때가 1898년.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여러 가지 검토 끝에 궁멀(지금의 구암동)로 선교활동 지역을 옮기고 ‘군산선교스테이션’을 구축했다. 이유는 전도용 의료선 정박이 가능한 지금의 구암동으로 이전을 결정하게 된 것.

전킨은 수덕산에서 구암동까지 군산선교부를 건립하기 위해 자전거로 출퇴근했는데 이것이 군산 최초의 자전거였다. 단순 이동수단 뿐 아니라 전도용으로도 활용했고 아마 당시 조선인들에게 신기한 신문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선교의 지경을 더욱 넓혀 나갔다.

지역을 넘어 인근 고을로, 또는 학교 설립 등으로 이어졌다. 가장 먼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부터 세웠다. 남학생들을 위한 영명학교(현재 군산제일중·고)와 여학생들을 위한 멜볼딘 여학교(현재 군산영광중·여고)를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의료선교를 확장해서 야소병원을 건립하고 그 기능을 확충했다. 그 덕분에 훨씬 많은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 군산선교스테이션 구축… 수덕산→ 구암동: 전킨 첫 자전거 선봬

‘궁멀(구암동산) 선교스테이션’ 본격… 구암동의 옛 이름 ‘궁포(弓浦)’

120여년 전 군산의 도심이라 할 수 있는 영화동이나 월명동· 중앙동 등에서 오늘날의 구암동으로 가려면 상당한 자연장벽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경포천과 바다와 인접한 저지대 등으로 이어져 구암동은 그야말로 작은 어촌마을이었을 것이다. 조촌동의 야산을 이용, 겨우 도착할 수 있거나 배를 이용한 편이 훨씬 접근하기에 용이했을 것은 분명하다.

‘군산도로명 안내도’를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으리라!

최근엔 강변로와 진포로, 조촌로, 구암로, 구암로 등을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일 타임머신을 타고 온 옛 선배들에게 짐작조차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구암동의 옛 지명은 ‘궁포(弓浦)’였다. 구머리(구멀)· 구암(귀암)· 궁멀(궁말)· 구암포 등으로도 불렸다.

고깃배가 수시로 드나들었던 포구 마을이었다. 구암산 지형이 거북이가 금강으로 들어가는 형상이라 해서 ‘거북 구(龜)’를 써 ‘거북이 마을’이란 뜻의 ‘구멀’이라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돼 ‘궁멀(궁말)’이 됐단다.

궁멀(弓乙里)은 ‘구암리’와 함께 불렸던 지명으로 구암산을 끼고 흐르는 두 줄기(구암천, 둔덕천)의 금강지류가 활처럼 휘어져 흐른다고 해서 ‘활 궁(弓)’을 썼단다.

‘멀’은 마을의 방언이다.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1875)에도 임피현 ‘궁을리’로 표기되어 있다. 궁포 모퉁이로 돌아오는 돛단배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궁포귀범은 ‘군산 8경’ 중 하나였다.

구암동산(군산선교스테이션)은 군산 3·1운동 역사공원으로 조성됐고, 영명학교 자리에 세풍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군산선교스테이션의 지적도를 보면 101동~102동은 운동장, 103동은 본관 건물, 105동~106동은 구암병원 자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기 내용은 ‘조종안의 군산학 3강(투데이군산 게재)’을 참조했다.

구암동산 위에서 본 주변 전경사진. / 사진=투데이군산
구암동산 위에서 본 주변 전경사진. / 사진=투데이군산
구암동산의 3.1 전시장. / 사진=투데이군산
구암동산의 3.1 전시장. / 사진=투데이군산

얼마 전, 촬영한 구암동의 모습이다.

일반인에게는 ‘군산선교스테이션’이라면 생소한 단어이지만 구암동산의 동의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미국 남장로교의 핵심 선교공간이기도 하지만 근대사상의 심장과 오늘날의 야구와 축구 등 근대스포츠를 선보인 곳이기도 하다.

특히 구암동은 한강이남 최초의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됐던 항일운동의 메카였다.

과거 영명학교(군산제일고의 전신)와 멜본딘여학교, 구암교회, 궁멀예수(야소)병원, 전킨 등과 같은 구한말 선교사들의 선교중심지 등이 위치해 항일독립정신과 근대사상 등을 받아들였던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에는 선교스테이션이자 항일운동성지로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왔으나 해방 후 세월이 흐르면서 그 당시 건물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이곳의 학교들은 이전됐다.

지금의 건물들을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의 당시 120년전의 얘기를 좀더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구암교회 및 선교사, 선교의 열매들(학교 및 병원)을 비롯한 3.1운동 및 역사공원, 근대 스포츠의 첫선(야구 등), 인근의 유명인물 등을 자연스럽게 다뤄야 군산의 골목길이 새롭게 열릴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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