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99] 조촌동 페이퍼코리아의 과거와 현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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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99] 조촌동 페이퍼코리아의 과거와 현재(상)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5.05 06:56
  • 기사수정 2023-05-05 0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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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선제지 → 고려제지· 세풍(한국합판) → 페이퍼코리아
기업가 정신 무장한 ‘세풍그룹 창업자’ 고판남의 영욕
경암학원만 옛 영광의 한 장면으로 남아 아쉬움 가득
사진=전세환 님 제공
사진=전세환 님 제공

조촌로를 넘으면 전북과 전국의 경제를 주도했던 엄청난 향토기업이자 군산 최고기업의 역사와 맞이한다.

1960년대를 넘어서 70년대로 향한 시기에 조촌동은 경제 활력으로 넘쳐나 산업역군들의 심장이 끊임없이 뛰었던 곳이었다.

그야말로 군산경제의 용광로와 같은 공간의 주역이 오롯이 ‘향토기업’ 페이퍼코리아였다.

이 회사를 얘기하면서 단순한 회사의 약사를 넘어 그곳을 일군 창업자의 기업가 정신에 대한 스토리들을 남기는 것이 필자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전세환 님 제공
전세환 님 제공

적어도 과거 군산의 이병철 회장(?)과 같은 존재였던 고판남(작고) 회장 스토리와 이곳에서 일하며 군산경제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던 수백에서 수천명의 근로자이자 우리 선배들의 기억물을 조금이라도 담아내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페이퍼코리아의 과거와 현재를 다루고 창업자였던 고판남(작고) 회장의 업적, 이 부지의 이전 등의 얘기들을 두차례에 걸쳐 다루고자 한다.

# ‘향토기업’ 페이퍼코리아의 小史

사진=전세환 님
사진=전세환 님

1943년 북선제지로 창업한 이래 고려제지와 세풍이란 회사명을 바꿔가며 2003년 페이퍼코리아로 사명을 변경,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 인쇄용지의 발원지로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양면 인쇄용지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는 자부심으로 국내 제지업계의 사관학교 역할을 담당해왔다.

고려제지 시절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신문용지였던 ‘군산갱지’를 공급하는 등 현재까지 신문용지, 중질지 등을 비롯해 산업용지인 지대지, 포장용 봉투지 등 폐지를 재활용하는 환경 친화형 상품들을 주력 생산하고 있다.

창업 당시부터 조촌동 일원에 자리했던 페이퍼코리아는 도심 확장으로 도심균형발전을 바라는 시민들의 염원 등에 의해 군산시의 계획에 따라 2018년 공장을 군산시 비응도동 제2국가산업단지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한국합판과 세풍… ‘세풍그룹의 탄생’ 근무복만으로 술집 외상도(?)

사진=페이퍼 코리아
사진=페이퍼 코리아

페이퍼코리아의 역사에 뗄수 없는 기업이 한국합판.

세대제지의 모회사인 ‘한국합판’은 산업합리화로 국제 경쟁력을 제고하고 계열기업을 재편성하기 위해 1985년 8월 세대제지를 흡수합병하고 회사 명칭을 주식회사 ‘세풍’으로 바꾸었다.

합판과 제지라는 이종업종이 세풍이라는 한 회사로 합병되었기 때문에 세풍은 산하에 제지공업본부와 합판사업본부란 두개의 본부를 두어 각각 제지사업과 합판사업을 관장케 하였다.

한국합판이 합병의 이유로 내걸었던 산업합리화는 합판산업이 1970년대 후반기를 고비로 급속히 사양화되자 합판의 감산을 위한 포석이었다.

한때 국내 최대 수출품목으로 세계 제1위의 수출고를 기록했던 합판산업은 1980년대부터 세계 각국마다 자원보호정책을 감행하면서 수출경쟁력이 급속히 악화됐다.

세대제지는 제3호 초지기 신설에 이어 ‘N-1호 초지기’까지 증설· 가동되면서 연간 생산능력이 16만2,000톤으로 제고돼 생산시설규모면에서 계속 우위를 지켜온데다가 내수는 물론 수출까지 활발했다.

세대제지는 당시 경제측면에서 장래가 매우 유망했기에 ‘한국합판그룹’을 지탱해주는 핵심기업으로 부상, 합병이란 결과를 도출했다.

제지사업이 합판사업보다 우위를 확보하게 되면서 한국합판그룹의 주력업종이 합판에서 제지로 옮겨진 것.

새로 출범한 ‘세풍’은 전열을 가다듬고 제지사업에 총력을 기울이며 재도약을 시도했다.

세풍은 1988년 9월 공장 설비의 일부를 보완해 초지속도를 분당 870m로 높여 하루 생산능력을 250톤에서 300톤으로 증가시켰다.

하지만 생산시설면에서 오랫동안 거의 같은 수준을 유지해오던 전주제지가 잇따라 생산시설 증설을 통해 격차를 크게 벌여나가자 비상이 걸렸다.

1990년 세풍이 하루 생산 500톤 규모에 신문용지 생산능력은 하루 291톤인데 비해 전주제지는 하루 생산량 1,390톤 규모에 신문용지 생산능력은 1일 1,175톤이었다.

더욱이 전주제지는 신문용지 내수시장 점유율이 1984년 43.6%에서 1987년에는 52.2%에 달했다.

이같은 전주제지의 과감한 증설에 자극받은 세풍은 그동안 자금사정으로 보류해왔던 증설계획에 박차를 가해 1990년 9월 일본 미쯔비시 중공업과 하루 생산능력 400톤, 규모의 N-2호 초지기 도입계약을 체결했다.

2년여의 건설기간을 거쳐 1992년 9월부터 본격 가공에 들어갔다.

 

사진=페이퍼코리아
사진=페이퍼코리아

이 초지기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벨로이드사의 벨베이 포머형의 쌍둥와이어식 구조로 와이어가 지층의 양면을 압축 탈수하기 때문에 기존의 N-1호 초지기보다 휠씬 개량된 최신예 기계였다.

특히 자체 기술진에 의해 조립되었는데 시운전한 지 한달만에 제 성능을 완전히 발휘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당시 고판남 회장은 이와 관련 “세풍 제지사업본부의 가장 큰 자랑은 군산제지공장 현장기술자들의 높은 기술 수이다. 제지시설과 장치가 아무리 첨단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조정하고 조작하는 것이 인간인 이상 우수한 기술자들의 존재야말로 가장 귀중한 자산이다”고 전해온다.

이에따라 세풍의 연간 생산능력은 24만4000톤으로 증대됐고 국내 신문용지 공급능력도 연간 59만여톤에서 72만여톤으로 늘어나면서 1989년 이후 계속돼온 신문용지 공급부족 사태가 다소 완화됐다.

이외에도 세풍은 1991년 12월 발전량 1만2000㎾ 규모의 열병합발전소를 완공함으로써 월 평균 2억2,000만원의 생산비를 절감했다. 1995년 7월에는 국내 신문용지업계에서는 한솔제지에 이어 두번째로 국제적 품질인증기관인 한국표준협회 부설 품질인증센터로부터 ISO인증을 획득해 품질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공인받았다.

세풍은 지역사회에서의 기업의 책임을 수행하는데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75년 세대문화재단 설립이후 지방의 각종 문화발전사업을 적극 후원했다.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군산간호전문대와 제일중·고를 운영하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우수인재들에게 엄청난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지역인재의 산실로 일궜다.

하지만 세풍은 1990년대 들어서 엄청난 위기를 맞는다.

기업다각화 실패와 F1그랑프리 등과 같은 무리한 사업 추진으로 워크아웃을 거쳐 98년 2월 부도났다. 2000년 워크아웃을 졸업하지 못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세풍 명예회장 고판남… 전북의 이병철 삼성회장(?)으로 불려

세풍의 창업주 고판남 회장(1912~ 1998: 호는 耕岩).

고 회장은 1912년 군산시(당시 옥구군) 성산면 도암리 세곡부락에서 태어났다. 1929년 군산제일공립보통학교를, 1930년 2년제 군산상업보습학교를 각각 졸업했다. 졸업 당시 성적이 우수해서 도지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해 5월 그의 나이 19세 때 일본인이 경영하는 무역회사이자 양곡도정상인 화강상사에 입사, 10여년간 경리직에 근무했다.

상업보습학교에서 상업에 관한 기초이론을 배운 그는 이곳에 근무하면서 사업에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사업의 묘미를 깨달았단다.

그의 나이 30세(1941년) 때 군산에서 삼남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사업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정미업에서 밑천을 마련한 고 회장은 1945년에는 전북수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수산업에 손을 대기도 했다.

그 해 9월 군산의 청구목림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하며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발휘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53년 소규모 목재회사인 ‘배달산업(성냥제조공장)’을 만들면서 목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성냥공장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리자 1963년 ‘한국합판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합판 업계로 진출했다.

사진=전세환 님 
사진=전세환 님 

1963년부터 1973년까지 합판 산업의 호황기를 맞아 그는 해마다 높은 실적을 올리며 국가 경제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1970년 합판 업계의 국내 4위를 기록했을 정도다. 이런 공로로 철탑산업훈장 등을 수상했다.

그의 전성기는 이 시기였다 할 수 있다.

사업가로 성공한 그는 ▲ 군산상공회의소 회장(1967년부터 1991년까지 24년간 역임)을 역임했고 ▲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1971년) ▲ 초대 국민회의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합판 사업으로 큰돈을 번 그는 1973년 문을 닫고 있는 고려제지를 인수해 법인명을 ‘세대제지(世代製紙)’로 바꾸고 전주제지(후에 한솔제지)와 쌍벽을 이루기도 했다.

1975년 폐교위기에 놓인 군산제일중·고를 인수하고, 군산간호대(옛 개정간호전문대학)를 인수해 ‘세대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오늘날은 경암학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군산 옥구)으로 당선돼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1985년에는 합판 산업이 사양화되자 ‘한국합판’과 ‘세대제지’를 합병해서 주식회사 세풍(世豊)을 탄생시켰다.

그 후에도 호남잠사, 한국임업, 한국견적, 세대건설, 내장산관광호텔, 영진주철 등을 인수하면서 세풍그룹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후 배달산업· 호남잠사· 한국염업· 세대제지 등을 잇따라 설립했다.

지난 53년 세풍그룹의 모태인 ㈜한국합판을 창업한 이래 전성기 시절엔 ㈜세풍· 세풍종합건설· ㈜세풍월드· 전주방송 등 총 14개 계열사를 경영해 왔다.

하지만 말년에 사업이 기울어지면서 그룹 해체의 길로 들어섰고 그의 사후엔 그가 일궈놓은 모든 것을 잃은 아픔을 겪어야 했다.

#뒷 얘기 

필자에게 고판남 회장에 대한 기억은 푸른 작업복을 입은 노신사로 기억된다.

군산제일고 입학 때다. 고 회장은 연로한 연세이면서도 회사 근무복을 입고 훈시했던 기억들로 그에 대한 이미지를 재소환했다.

군산에서 고교 졸업 후 17년 2개월만에 다시 왔을 때 군산에서 근무했거나 군산지역에서 활동해왔던 선배 언론인들도 고 회장을 인터뷰하면서 책상에 놓인 오래된 주판을 상징물로 기억해냈다.

심지어 신문에 딸려온 지라시의 뒷면을 쓰면서 근검절약을 했던 분이었고, 그의 생존 때 청빈한 생활을 철저하게 실천해온 진정한 기업가였다고.

세풍의 전성기에는 근무복만으로 술집에서 외상을 해줄 정도로 대단한 회사였고 지역의 자부심이었단다. 고교땐 세풍에 다니던 부친들이 있었던 동기생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됐던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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