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96] 백릉길에서 만난 경암동 이야기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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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96] 백릉길에서 만난 경암동 이야기들(3)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4.13 14:01
  • 기사수정 2023-04-20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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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금석 선생의 후예들… 최재모, 조긍연, 유동춘, 유동관, 노수진 선수
군산 기네스급 ‘5형제 축구 선수 집안’ 눈길… 모두 구암초 졸업
구암초의 60ㆍ70년대 축구 꿈나무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인데 이를 원용하면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소재들도 주변에  적지 않다.

맹자의 어머니가 ‘묘지·시장·서당 근처’로 세 번 이사하면서 맹자를 위대한 성인급의 대학자로 이끌었다는 고사처럼 그 주변의 환경영향을 받아 전문분야에서 전국적인 인물 반열에 오른 이들의 사례들도 상당하다.

이 고사성어를 곧이곧대로 원용해보자면 축구의 발원지였던 구암초를 다녔거나 어린시절, 이곳에서 축구경기를 본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자극과 모멘트로 작용했을 것은 분명하다.

# 구암초와 채금석 선생, 그리고 후예들

그 전설과 같은 얘기의 중심에 고 채금석(1908~1995) 선생이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전성기를 거쳐 현역 은퇴 후 낙향, 군산과 전북을 넘어 한국축구발전에 기여한 축구 원로였다. 그는 ‘오토바이 채’로 불린 전설적인 축구인이었다.

경성축구단에서 14년 동안 활약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당시 군산시 축구팀(일반부), 구암동 축구팀(청소년), 배달성냥회사 축구팀, 제일고 전신인 영명고 축구팀, 구암초 축구팀 등을 만들고 지도하는데 매진했다.

1960년대 공설운동장에서 축구하고 있는 학생들. / 사진=신철균 작가
1960년대 공설운동장에서 축구하고 있는 학생들. / 사진=신철균 작가

새벽마다 볼을 듣고 구암초 운동장을 찾았던 채금석, 그는 쉰셋 나이에 전국체육대회 전북대표팀(일반부) 선수로 출전하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남긴다.

아마도 그의 축구 시작도 그랬을 것이다.

그가 태어난 성산면에서 이사와 살았던 동네가 오늘날의 구암동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의 주변마을이었다.

그는 소년기에 안락소학교와 영명학교에서 벌어진 학생과 선교사들의 축구경기를 자주 관람했을 것이고 이곳에서 축구에 대한 흥미를 느껴 축구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가 낙향해 찾은 곳은 그의 터전이자 자신 모교 영명학교(군산제일중고)와 구암초 등을 기반으로 축구꿈나무들을 육성하는데 헌신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 어떤 이는 제자됐을 것이고, 다른 이는 자신의 자식들을 축구에 입문시켜 훌륭한 축구인으로 성장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청소년 및 국가대표선수나 축구명문 가문을 일으켜 군산을 빛낸 인물들도 존재했다.

이런 예는 이웃 익산 팔봉컨트리클럽(현재 상떼힐익산) 주변 마을의 사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구가 150여명에 불과한 한 농촌마을이 프로골퍼를 16명이나 배출해 화제다. 익산시 춘포면 창평리 갈전부락이 배출한 골프선수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정회원 골퍼 4명, 세미프로 5명, 레슨프로 7명 등 모두 16명이다.

경암동에 있는 구암초도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 하듯 군산을 축구의 고장으로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오늘날 전국적인 유명축구대회의 산실로 우뚝섰다.

그것이 채금석 선생의 이름을 딴 ‘금석배(92년 창설된 전국학생축구대회)’다.

이런 근거로 구암초는 군산축구의 발원지와도 같다하면 다소 과장된 면은 있지만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맹모삼천지교에서 보듯 재미난 축구기술과 경기 등을 보면서 유명축구선수로 성장했던 사실에서 증명하지 않았는가.

60년대 이후 이곳에서 보낸 이들은 채금석 선생의 축구지도를 받거나 기술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키워낸 청소년 및 국가대표 선수를 지낸 제자만 최재모, 조긍연(제일중-영등포공고), 강철, 박문갑, 유동춘, 노수진(구암초- 제일중- 영등포공고-고대), 조덕제(전 부산 아이파크 감독), 노상래(전 전남 드래곤즈 감독), 김이주 등 20 여명에 달한다.

무명 제자까지 말한다면 족히 수백에서 수천명은 됐을 것이다.

고 채금석 선생과 어린 제자들(1970년대). / 사진= 독자제공
고 채금석 선생과 어린 제자들(1970년대). / 사진= 독자제공

특히 고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최재모 씨는 김제 출신으로 군산제일고와 한양공고를 거쳐 금성방직, 양지, 포항제철 등에서 선수로 뛰었을 뿐 아니라 군산제일고와 전주대 등에서 감독을 맡았다. 1970년부터 1974년까지는 국가대표 수비수로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우승)을 비롯해 박스컵, 킹스컵, 메르데카컵 등에 출전했다.

이중에서 그의 직접적인 제자로 축구에 입문한 유동춘과 그 형제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 군산의 5형제 축구 선수 집안… 부모님의 열성과 채금석 선생 지도 등

경암동을 걷다보면 과거의 서부화력발전소와 선경목재 등이 있었고 지금은 이마트 군산점이 그 주변에 들어서 말끔히 단장돼 있다.

이마트 맞은 편에 군산의 축구명문가라 할 수 있는 구암초 출신 유동춘 전 제일고 감독의 옛 집이 있다.

이마트 군산점 건너편에 있는 군산 축구 5형제가 어린시절 축구에 대한 꿈을 꿨던 옛집이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이마트 군산점 건너편에 있는 군산 축구 5형제가 어린시절 축구에 대한 꿈을 꿨던 옛집이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한양공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유동춘 전 감독은 또래와 보다 늦게 축구에 입문했는데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청소년대표로 활약했다. 1972년 국가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주목을 받았고 차범근 전국가대표 감독과 함께 최연소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당대의 스타플레이어였던 차범근, 조광래, 박창선 등과 함께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했다.

동춘은 국가대표와 경찰청 감독 등으로 활약한 뒤 얼마 전까지 군산제일고 감독을 맡았다가 사임했다.

장형인 동춘씨의 활약에 힘입어 다른 형제들도 축구선수의 길을 걸었다.

그의 동생 동관씨도 1980년대 K리그의 대표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로 유명했는데 나머지 형제들도 축구선수로 엄청난 활약을 했다.

이른바 ‘군산 축구 5형제’의 탄생신화다.

동춘· 동관· 동우· 동기· 동옥씨가 그 주인공.

이들은 출신고교는 제각각이지만 동기씨를 제외하고 한양대 동문가족이다.

포지별로 보면 동춘-동관- 동옥씨는 미드필더였고, 동우씨는 리베로, 동기씨는 사이드백이었단다.

동관은 구암초와 제일중을 마친 뒤 호남 축구의 대부인 채금석 선생과 만나 기본기를 다졌고 영등포공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뒤 태극마크를 달았다. 프로축구팀 포항에서 세 번째 K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제일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동우씨도 프로축구팀 전남과 대전에서 활약했다. 92년 영국 유니버시아드 때 금메달을 딴 주역 중 한사람이었다.

그의 아래동생인 동기는 제일고와 국민대를 졸업한뒤 기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하다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들 형제들은 대학과 고교팀에서 감독을 맡아 대부분 후진양성에 앞장서기도 했다.

막내 동옥씨는 군산제일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뒤 군산구암초 감독을 거쳐 고창북중 감독 생활을 하고 있다. 유망주였던 그는 현 성남FC(성남 일화) 입단을 앞뒀는데 발목부상으로 그 꿈을 접었단다.

이런 형제들의 맹활약에 국내 최고축구가족이란 타이틀을 가진 이색축구가족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때문에 군산에서 ‘축구하는 유씨 댁’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부모님의 든든한 후원과 채금석 선생의 지도 덕분.

한편 이들의 신화를 이어 대를 이어 조카들도 청소년대표로 활약한 이가 2명이었다는 게 막내 동옥씨의 전언이다.

<취재후기>

필자가 제일고 재학 때 운동장에서 학생들에게 지도하는 노인 분이 계셨는데 그가 채금석 선생이었다.

이 때문에 다수의 동문들이 축구에 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친구들 중에는 동네축구와 지역클럽 등에서 여전히 건강미를 자랑하는 이도 적지 않다. 아직도 우리 기수들은 동문 기수별 축구대회에서 장년기에 접어들었음에도 우승할 정도란다.

이런 축구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필자는 언론인으로 근무하는 내내 경암동에 살았다는 축구가문을 자주 들었다.

그 집안에 대해 잘아는 분이 있었다고 수년 전에 지인들로부터 전해들었다.

시청에서 과장으로 퇴직한 유정섭 전 과장이 그 분이라는 것.

오래 전부터 안면이 있는 최근 유 전과장과 통화를 했는데 자신이 이 축구가문의 삼촌뻘(정확히 당숙)이라고 밝혀 이런 저런 얘기들을 묻고 과거의 에피소드를 들었다.

참고로 월남 참전용사인 그는 큰 목소리에 말펀치가 상당하고 자녀들을 잘 키운 분으로 잘알려져있다.

그는 자신의 집안은 할아버지 대(代)에 순창 쌍치면에서 군산으로 이사왔는데 다른 4촌들과 달리 이 형제들이 전부 축구 선수로 입문한 것은 축구의 본향격인 구암초를 다니면서 채금석 선생의 눈(타고난 운동감각 때문)에 띄어 시작했다고.

자신과는 그들의 부친 성환씨(작고)와는 4촌간.

특히 그들이 유명스타가 된 것은 부모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라고 단언했다. 생존 때 성환씨는 10년 넘게 제일고 축구 후원회장을 도맡았고 작고한 그의 어머니(장길례)도 대단한 끈기로 자녀들의 축구 선수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자녀들의 경기가 열리는 곳은 마다하지않고 달려갔다.

형수씨는 대단한 분이었다면서 옛 이야기를 전해줬다.

동관 씨가 1985년 축구인생에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았는데 늑막염 판정을 받은 것이었다.

형수씨는 그 질환 판정 후 병원 요양과 치료를 반복하는 둘째 아들(동관)를 위해 1년 6개월간 고단백질(?)을 끼니마다 대느라고 전국의 산골은 물론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런 헌신 때문에 현역으로 복귀해 대스타가 될 수 있었다고.

그분의 도움을 받아 13일 제일고 후배 동옥씨와 통화를 해 그의 근황을 전해들었고 가족사진을 부탁했다. 약속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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