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94] 백릉길에서 만난 경암동 이야기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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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94] 백릉길에서 만난 경암동 이야기들(1)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3.28 18:45
  • 기사수정 2023-03-29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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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동 순대국밥집 집단촌… 버스정류장 생겨 자연스럽게 형성
사장의장기기증운동본부 전북지부 20년째 생명나눔운동 앞장
채만식 선생 재평가냐 면죄부냐 논란… 백릉길 등 지명 등재

경암동과 경장동 주변엔 ‘백릉길’이 있다. 시청에서 옛 군산화력발전소와 오늘날의 이마트 등으로 향하는 대로(大路) 중 작은 골목길을 지칭한다.

‘백릉’이란 이름의 출발은 채만식 선생의 호(號)에서 비롯됐다. 그는 군산을 대표한 문인답게 자신의 작품(탁류)과 호(백릉)까지 도로명에 담아 그의 예술혼을 되살렸다.

하지만 씁쓸함도 적지 않다.

이런 지명들이 친일로 곡필한 그에게 사후 일종의 면죄부를 준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친일문인 등 다수의 친일파들에 비해 그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점이다. 속죄의 글을 썼던 몇 안되는 문인이었기 때문에 재평가를 해줘야 한다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다른 많은 문인들이 반성보다는 자기 합리화와 자신을 따른 이들에게 기대어 세월에 따라 잊혀지길 바라는 망각 전략(?)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그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는 비판론이 바로 그것.

탁류길과 달리 이 길은 정확히 백릉의 추억이나 소설의 장면 등과도 연은 없는 듯하다.

번영로(전주~군산 100리길)의 작은 소로가 백릉길이란 이름으로 지명으로 부활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다만 최근 정부의 한일관계에 대한 반역사적인 일련의 정책 때문에 왠지 이 길을 다룬 필자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이런 서언은 차치해두고 그동안 삭풍이란 핑계로 ‘군산을 걷다’의 연재물을 상당기간 지연해왔는데 봄기운이 완연한 시기에 자연스럽게 재개했다. 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한다.

시청 뒷편으로 조금 내려가면 여름이면 녹음이 가득한 가로수길이 있다. 수십년된 가로수군(群)은 군산에서 시청 앞길과 함께 여름의 최애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기 때문인가.

하루가 다르게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을 뿐 아니라 음식점들도 제법 손님들로 가득찬 곳도 있다.

양안로와 진포로가 만나는 곳에서 골목으로 들어서면 백릉1길이 있다.

이곳에 군산에서 좀처럼 보기드문 ‘전북지부’란 간판을 내건 단층의 슬래브 지붕 건물에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전북지부’가 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전북지부의 건물 전경사진. / 사진= 투데이군산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전북지부의 건물 전경사진. / 사진= 투데이군산

#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전북지부

2002년 11월 창립한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전북지부는 전라북도와 충남 서천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리적, 경제적으로 열악한 여건이지만 문화예술과 접목한 다양한 장기기증 홍보사업을 개발하여 괄목할 만한 지속적 성장을 거두고 있다. 장기기증에 대한 시민들의 막연한 두려움과 거리감을 감안하여 실질적인 장기기증은 물론 사랑의 대음악회, 생명나눔 백일장대회, 희망의 한걸음축제, 일일찻집 등의 사업으로 누구나 쉽고 친근하게 생명나눔에 참여하도록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한 생명이라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며 “나로부터 시작되리” 라는 생명나눔운동의 목표로 뛰고 있다.

특히 ‘사랑, 정직, 헌신’이라는 지훈을 떠올리며 항상 긍정적으로, 가슴 뜨겁게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다. 전북지부 임직원들은 장기이식 대기환자들이 건강한 삶을 찾을 때까지 초심을 잃지 말자는 굳은 다짐으로 1년 365일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백릉길은 소로(小路)이지만 가로수길에서 맞닿아 있는 이 길은 흥망성쇠의 역사를 품어왔다.

필자가 이곳 주변에서 고교시절을 보내던 때에는, 길은 있었지만 지금과 달리 그야말로 촌락과 논밭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상전벽해라 할만하다.

여관 등의 건물은 물론이고, 다세대주택과 함께 상가들로 가득하다.

아무래도 필자의 초년 언론인 생활에서 강렬한 기억물로 남아 있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와 필자의 인상적인 첫 기사.

91년 겨울이었거나 92년 봄으로 향하던 날이었던 것 같다.

언론인으로 갓 출발한 때여서 30 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전북일보에 근무하던 초년 기자생활 중 인상에 남은 기사는 10대의 소녀 장기기증에 대한 얘기다.

사회부 데스크로부터 취재지시가 떨어졌다.

전북대병원에서 그곳 관계자와 만나 할머니와 함께 사는 어린 소녀의 신장에 문제가 생겨 생명조차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도울 수 있도록 취재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어려운 생활 때문에 치료는 고사하고 삶조차 앞을 내다볼 수 없어 발만 동동구르고 있었다.

병원 관계자와 만나보니 기증자가 조속히 나타나지 않으면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위태하다는 상황을 전해들었다. 여러사람이 장기기증의사를 밝혔지만 그녀의 신체와 맞지 않아 계속 새로운 기증 자원자를 찾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다가 제주도에 사는 한 독지가가 그녀와 일치하는데 결단을 내리지 못해 수술을 미루고 있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다행히 나중에 그분이 결단을 내려 수술을 했고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새로운 삶을 살수 있는 건강을 되찾은 것이었다.

이를 주선하던 곳이 그 시기에 막 태동한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였다.

그 시절에 이 운동에 앞장선 박진탁 이사장과 만났다. 물론 전북에는 그 산하조직이 없어 박 이사장이 직접 전주까지 내려왔다. 그때 그와 만난 적이 있다. 이 시절엔 장기기증문화가 확산되지 않아 생소한 상황이어서 갓 태동한 단체를 이끄는 것은 첩첩산중과도 같았을 것이다. 이런 단체가 성장을 거듭해 하부조직이라 할 수 있는 ‘전북지부’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도 군산에서 중심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 시절의 취재 광경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런 내용을 취재해서 기사화한 것인 그 당시 사회면 주요기사로 나오면서 다수의 후원과 함께 뜨거운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전북대병원 관계자의 원만한 수술과 박 이사장의 노력, 제주도 독지가의 선행 등으로 그 소녀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당시에 엄청난 후원도 받아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할머니를 따라 군산으로 이주했다는 소식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측으로부터 들었다. 아마도 지금쯤 40대 초중반의 엄마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완주출신인 박진탁(86) 이사장은 국내 최초 순수신장기증자이고 헌혈운동과 장기기증 운동에 헌신해온 목회자다.

# 옛 시내버스정류장과 순대국밥촌

이곳은 한때 대중교통의 중심지였다.

옛 군산시내버스터미널이 있었던 자리엔 누가병원이 새로 건축돼 지역민들의 의료중심지로 변해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옛 군산시내버스터미널이 있었던 자리엔 누가병원이 새로 건축돼 지역민들의 의료중심지로 변해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7말8초(79~ 81)라는 시간에도 군산에서 대중교통의 주요수단이라 할 수 있는 버스를 탄 기억이 거의 없다. 이유가 간단하다. 시내로 나와 볼일(?) 보던 때에는 모교가 군산지역 최초의 학교버스를 운영하는 바람에 학교버스로 오갔거나 걸어서 다녔기 때문이었단다.

하지만 지금의 누가병원이 있었던 곳에 시내버스 정류장(종점)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를 이용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시내버스정류장은 이곳과 옛 군산의료원(지금의 해양경찰서) 등에 존재했었는데 동부권(임피와 성산, 나포, 옥서, 비행장 등) 사람들은 지금의 해경청사 주변에서 이용했다. 옥산과 회현, 대야, 서수 등의 서부권 주민들은 경장동 정류장을 활용했었단다.

군산의 시내버스는 전라북도 군산시를 중심으로 운행하는 군산시의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군산여객(당시 조촌동소재), 우성여객(당시 미룡동 소재)의 2개 버스 운수업체가 참여하는 군산시내버스 공동관리위원회에 의해 수십개 노선이 공동배차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군산여객과 우성여객은 본래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버스회사(1920년 순수 민족자본으로 설립)였던 전북여객자동차(현 전북고속)의 분리과정에서 생겼다.

전북여객이 1988년 11월 군산시내버스사업을 분리하면서 새로 설립된 시내버스회사들이 군산여객과 우성여객.

이들 버스들이 수백번씩 오가면서 이곳 주변은 먹자골목이 생겼는데 오늘날의 순대국밥촌이다. 과거에는 10여곳이 활발하게 영업했지만 최근 6~ 7곳만이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나머지는 이전하거나 다른 음식점들로 채워지고 있다.

많은 시민들과 여행객들이 이곳을 오가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음식점들이 다수 옮겨왔거나 새로 생기면서 오늘날엔 군산의 순대국밥촌의 한 지류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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