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붉은 신호등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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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붉은 신호등 11-9
  • 김선옥
  • 승인 2023.02.18 08:42
  • 기사수정 2023-02-22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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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에 이어)

"그 애는 내가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쩌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단정했겠지.나중에야 그게 섣부른 단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어."

그의 눈빛엔 후회가 서려 있었다. 건방지게도 그 애는 남편이 불행해보여서 사랑했다고 말했다. 별 이상한 사랑법도 있다. 작고 참새 같았던 여자애가 사랑한 중년의 고독, 그의 일탈을 눈감아 주고, 정말 용서해야 했을까.

"여자는 젊은이답게 떠났지. 나는 아니었어. 아무것도 아닌 걸 쫓다가 소중한 것들을 다 잃었지. 누군가와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게 허무하다는 사실도 깨닫고."

식사가 들어오자 그가 이야기를 중단했다.

여자는 남편을 대신하여 또래의 젊은 남자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깨끗하고 흰 웨딩드레스를 나비처럼 걸쳐 입고, 밝게 웃으며 떠났다. 그건 축복할 일이다. 하지만 뒤에 남겨진 남편은 초라한 자신을 어떻게 추슬렀는지가 궁금했다. 젊은 여자와 어울리는 동안 아니꼽게 흘끔거리는 주위의 눈초리들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그것도 궁금했다.

생선국은 맛있게 보였지만 입이 깔깔하여 도무지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우적우적 잘도 먹었다. 식성이 좋은 그는 그녀가 젓가락으로 이것저것 뒤적일 때마다 핀잔했었다.

-아무거나 먹을 수 있어야지, 그렇게 가려 먹으니 살찌지 않는 거야. 남이 보기에도 편안해 보이지 않고.

-누군 먹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요? 다른 사람 보기에 좋으라고 입에 맞지 않는 것을 어떻게 억지로 먹어요? 그런 거짓은 싫어요.

그녀는 그때마다 까다롭게 굴었다. 먹는 것 하나도 대조적이던 것들이 생생하게 기억되다니 새삼스럽다.

"많이 들어요. 늙어도 입맛은 여전하군."

국물만 뜨다가 수저를 놓는 그녀를 보고 퉁명스럽게 말하던 그가 하다만 이야기를 계속했다.

“경채는 걱정 말아요. 대학생이잖아. 이젠 다 컸어. 어린애가 아니니까 제 일은 제가 알아서 잘 해낼 거야. 이런 당신 모습이 경채에게 더 큰 부담이 될 거요. 투사의 부모가 되었으니 아무쪼록 우린 건강해야지. 그게 바로 경채를 위하는 일 아니겠소? 경채에 대해서 당신도 자긍심을 가져요.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투사란 원색적 표현이 싫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아다녀도 경채는 공부나 열심히 했으면 싶다. 그녀는 아들이 데모에 휩쓸려 다니며 흔들리다가 대학 생활을 마감하는 걸 원치 않았다.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여, 좋은 직장을 얻고, 괜찮은 아내를 만나 오순도순 살기를 바랐다. 아들 말 낳고 평범하게 사는 삶,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정치는 보통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다. 정치인들의 책임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녀의 임무이듯 각자의 책임이 있다. 경채는 아직 학생이니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그녀가 아들에게 희망하는 것이었다. 순하고 어린애 같았던 아들의 어느 구석에 불같은 열정이 숨어 있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와 다르게 그는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사내자식은 그런 면이 있어야 해. 불의를 과감히 깨트릴 수 있는 용기 말이야. 녀석은 대단해.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그놈처럼은 못할 거야."

가슴을 이토록 저미게 만드는데 무엇이 그리 대단한지 그는 연신 아들을 두둔했다. 성질내지 않고 욕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데 인정해 주니 한결 나았다. 그러면서도 아들이 그녀보다 남편에게 더 흉금 없이 굴었다는 게 씁쓸했다.

“오늘 당신을 만나자고 한 이유는 화해를 청하기 위해서야."

식사가 끝나고 담배를 피워 문 그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운을 뗀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놀라서 쳐다보자 그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뭐, 지금 당장 어떻게 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녀는 무릎 위에 놓여 떨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속일 수 없는 나이, 탄력 없는 피부와 굵은 마디의 손이 지난 세월의 분노와 함께 아픔을 담았다. (계속)

김선옥 작가는?

김선옥 작가
김선옥 작가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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