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군산에서 학교 축구시작은?… ‘1911년 정설’ vs ‘그 이전에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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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군산에서 학교 축구시작은?… ‘1911년 정설’ vs ‘그 이전에 존재’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12.20 13:39
  • 기사수정 2023-04-24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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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원로 이인철씨가 펴낸 ‘실록전북체육사’ 서 ‘1911년’ 못박아
지역에선 ‘전킨 1904년 전주이주 전에 이미 설립가능성’에 무게
전킨의 영명학교· 구암교회 시절 야구· 정구 등과 같은 시기 추정
정영욱 '투데이 군산' 대표
정영욱 '투데이 군산' 대표

대미를 장식한 카타르 월드컵의 여파에 이어 군산여자풋살팀과 관련한 영화 제작발표회까지 열리면서 단순 축구열기를 넘어 지역의 축구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핵심에는 지난 14일 군산을 배경으로 여자 풋살팀을 소재로 한 영화 ‘골(Goal) 때리는 그녀(女)들’의 제작발표회가 한몫했다.

# 올로케 축구 영화 ‘골(Goal) 때리는 그녀(女)들’ 제작 ‘관심’↑

이 영화의 내용은 꿈과 희망없이 살아가던 그녀들이 풋살을 통해 사회의 차별과 상처와 아픔을 이겨내고 한 사람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로, 그리고 딸로 성장하는 회복과 돌파와 성장의 영화다.

이 제작발표회가 보도되자 군산 지역사회와 축구애호가들의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투데이군산>의 조회수는 물론 지역신문 및 도내 일간지의 보도가 대서특필됐다.

2017년 영화 ‘지렁이’ 감독을 맡은 윤학렬 씨는 지난 14일 제작발표회장에서 “구한말 윌리엄 맥클리어리 전킨(1865~ 1908: 한국이름 전위렴) 선교사가 군산에서 선교활동과 함께 축구를 처음 선보였다”는 역사적 의미를 표현함으로써 지역축구사의 시작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물론 군산은 그동안 자타가 공인한 체육의 도시이자, 축구와 야구, 탁구, 정구, 배구 등의 도시였다.

그 뿌리에는 미국인 선교사들이 근대교육 및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당시 청소년 및 어린이 등에게 선보여 도내는 물론 전국에서도 최고 체육의 도시로서 발돋움했다.

그중에 눈길을 끈 종목이 축구였다

‘금석배 전국학생축구대회’는 축구인 채금석(1908~ 1995)선생의 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금석배는 1992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축구대회로 전국 최고의 대회로 거듭났을 뿐 아니라 박지성· 박주영 등과 수많은 국가대표의 산실로 거듭났다.

# 우리나라의 축구 시작… 英 군함 플라잉피시호 선원들이 첫선

우리나라 축구의 시작은 1882년(고종19) 6월 인천 제물포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Flying Fish)호 선원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선원들이 부둣가에서 차던 공을 아이들이 주워 흉내 낸 것이 그 시초다.

이후 축구는 1895년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반포에 따라 체육이 학과목으로 공식 인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된다. 특별한 장비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었기에 축구는 금세 인기를 끌었다. 또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키울 수 있어 일제에 대항하는 항쟁의 수단이자 민족운동의 원천이 됐다.

우리나라 축구의 역사와 군산의 시작은 다소 다르지만 최소한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 ‘전북 학교체육의 축구유래’ … 1900년 초 시작 설(說)

그러면 군산의 축구시작은 언제였을까.

여러 자료들은 일제강점기 직후를 가리키고 있다.

한 A중앙언론에 따르면 1903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영명학교에서 시작된 군산 축구는 1911년 군산영명축구단이 창단하면서 본격화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정한 규칙은 물론 유니폼도 없이 바지 저고리에 짚신을 신고 경기를 했다.

축구에 대한 열기는 1920년 5월 군산체육의 시초인 평화축구단 창단으로 더욱 확산됐다. 평화축구단은 창단 이듬해 청년팀과 소년팀으로 구성하고 전국 규모의 남조선 소년축구대회를 개최했다. 1930년 7월 평화축구단을 모체로 군산체육회가 창립되고, 1932년 금암동에 종합운동장인 옛 공설운동장이 만들어졌단다.

이런 내용의 하나에는 전북체육원로 이인철 원장이 펴낸 2002년 ‘실록전북체육사’ 개정 증보판(2021년)의 내용 등을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자에 따르면 1900년 초 신흥학교 설립자인 서문교회 목사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1867~ 1951: 한국명 이눌서)가 당시 서울에서 선보였던 축구공을 가져와 학생과 교인들에게 축구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어 군산에서도 영명학교를 중심으로 축구를 시작했고, 1911년 전주신흥학교, 군산영명학교와 전주서문교회 청년회에 축구팀이 조직됐다는 것이다.

# 첫 ‘군산축구의 시작은 1904년 이전(?)

과연 그럴까.

물론 만능스포츠맨이자 선교사였던 레이놀즈의 가능성도 있겠지만 축구와 관련된 인물 중 우리 기독교 선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윌리엄 맥클리어리 전킨 선교사’다.

전킨은 1895년 3월(1894년 봄 군산 등 호남지방 답사)이후 군산선교와 군산선교부를 실질적으로 이끈다. 군산선교부는 호남중추적인 선교센터라는 점에서 앞서 호남권 근대학교와 병원은 물론 구기, 밴드부 등에 도입했을 뿐 아니라 전국적인 실력과 위상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가 군산에 약 10년동안 머물었고 스스로 ‘궁멀 전씨’라고 자칭했던 점을 감안해볼 때 군산에 대한 그의 애정은 대단했다.

전킨이 전주로 옮기게 된 것은 가족들을 연달이 잃고 건강까지 문제가 생기자 미국 남장로회선교부는 그를 전주에 국한하는 이주를 명한다.

군산선교의 지주와 같은 이가 전킨이다.

그는 일종의 교회학교로 시작한 영명학교(1903년 2월)와 멜본딘여학교를 설립한 뒤 이 시기에 야구와 정구 등을 잇따라 도입했다.

적어도 이 시기에 축구도 자연스럽게 군산에서 선보였을 것은 분명하며 특정 시기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는 이렇다.

공식적으로 영명학교에서 팀을 만든 시기는 이런 가정을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실제로 1911년이었거나 일제의 교육정책에 의한 신고 시기가 그때였을 가능성은 상존한다.

하지만 전킨의 그동안 열정으로 볼 때 이런 단정적인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전킨은 1906년과 1907년 출장형태로 평양신학교(1907년 1회 졸업)에 출강하며 평양숭실학교와 축구 라이벌전을 추진할 정도로 축구광이었단다.

앞서 이인철 사단법인 체육발전연구원 원장의 2002년 ‘실록전북체육사’ 개정 증보판에서 그 시기(1911년)를 특정한 것과 다른 시기에 (영명학교 축구부가)만들어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전킨은 개신교사적인 관점에서 한국축구의 아버지라 칭하는 인물이다.

그가 평양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축구를 보급했다. 당시 평양에서 축구는 수천 명의 관객이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인기종목이었다.

특히 한국기독교의 산실과 곳이었던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 간의 축구 라이벌전이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다만 ‘전주의 1900년 초에 대한 축구 시작’과 관련된 내용은 당시 신흥학교(전주신흥고 전신)가 1900년 9월 설립되는 점(학교공식 홈페이지)과 함께 졸업생 1명이란 기록을 고려할 때 다소 어폐가 있어 보인다.

종합적으로 볼 때, 전킨이 설립한 영명학교의 축구부 창단은 그 이전에 구암교회(또는 군산선교부) 등에서 이미 선보인 야구와 정구 등의 출발과 비슷한 시기였을 것이란 얘기다.

당시 군산은 남장로회소속인데다 교세가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컸다는 점을 고려해도 축구가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됐을 것이란 추론은 유효하다.

이에 따라 학교체육에서의 군산축구의 시작은 적어도 1911년 이전에 존재했었을 것은 분명해보인다. 야구 역사와 같은 시기로 소급하는 것이 좀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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