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의 群山學 11강] 옛 경성고무~팔마재까지(장재·흥남·문화·경장동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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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의 群山學 11강] 옛 경성고무~팔마재까지(장재·흥남·문화·경장동 일대)
  • 조종안 시민기자
  • 승인 2022.10.11 07:49
  • 기사수정 2022-10-11 0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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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동에 있었던 옛 경성고무 공장 전경. / 사진= 군산시제공
장재동에 있었던 옛 경성고무 공장 전경. / 사진= 군산시제공

경성고무와 만월(滿月)표 고무신의 추억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승강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1930년대 군산 원도심권에 실존했던 건물 11채를 복원해 놓았다. 유리병에 담긴 눈깔사탕과 선반위의 성냥, 등잔, 유기그릇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 타임캡슐을 타고 추억여행을 떠나게 한다.

특히 ‘兄弟 고무신房’에 진열된 각종 고무신이 소꿉친구처럼 정겹게 다가온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처럼, 고무신이 군산의 상징이던 시절도 있었다.

조선인 이만수(1891~1964)가 일본인 공장을 인수하여 1932년에 설립한 <경성고무>의 만월(滿月)표 고무신이 그 주인공이다. 고무신이 생활필수품이던 1960년대 <경성고무>는 여종업원 3천여 명이 밤일을 해가며 하루 3만족을 생산해낼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동그라미 안에 ‘滿月’이 새겨진 신발은 군산은 물론 전국 각지에 대리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10대 여종업원이 대부분이었으며, 그들에게는 ‘고무공장 큰애기’라는 애칭이 따라다녔다. 작사자가 불분명한 노래 ‘고무공장 처녀’가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될 정도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경성고무 월급날이 째보선창에 고깃배가 들어오는 ‘조금(음력 8일, 23일)’하고 겹치면 군산 시내가 흥청거렸다. 극장들은 프로와 관계없이 연일 만원을 이루었고, 재래시장은 물론 양키시장, 빵집, 양장점, 이발소, 미용실, 동네 구멍가게까지 명절 대목 이상으로 호황을 누렸다.

# 몇 번씩 깁고 때워 신다가 엿과 바꿔먹었던 고무신

내남없이 가난했던 50~60년대, 명절을 앞두고 어머니를 따라 신발가게에 가면 운동화나 흰 고무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언감생심, 감히 사달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재생고무로 만든 검정고무신도 사주면 감사했다.

낮에 흙을 밟고 다녔던 고무신을 저녁에 수세미로 닦아 마루에 가지런히 엎어놓았다가 아침에 일어나 뽀송뽀송해진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갔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고무신 얘기를 하다 보니 코흘리개 시절 추억들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땀이 차면 미끄러지고, 뛰어가다 보면 훌떡 벗겨지는 검정고무신. 그러나 편리한 점도 많았다. 때가 묻어도 표시가 안 나고, 오물이 묻으면 수세미로 닦아내고 물로 헹구면 그만이었다. 고무신은 만능 장난감이 되어주었고, 무기로도 사용했다.

고무신은 구멍이 나거나 찢어져도 그냥 버리는 경우가 없었다. 몇 번씩 깁고 때워 신다가 회생불능이면 엿이나 강냉이와 바꿔먹었다. 가위질만 ‘엿장수 맘대로’가 아니었다. 엿도 ‘엿장수 맘대로’여서 마음 좋은 아저씨는 꿀보다 맛있는 엿을 한주먹씩 쥐어주었다.

질퍽거리는 길을 가다가 신발에 진흙과 물이 들어와 자꾸 미끄러지면 아예 벗어서 손에 쥐고 학교를 오갔다. 싸우다가 밀리면 꼬나들고 무기로 사용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바닷가 갯벌에서 놀다가 짱뚱어를 잡아 담아오기도 했다. 개울에서 배로 띄우고 놀다가 한 짝을 잃어버려 어머니에게 된통 혼났던 기억도 새롭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고무신은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비가 오면 버릴까 봐 신고 나가지 못했으며, 잠을 자면서도 가슴에 품고 잘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헌 신발과 바뀌지 않도록 표시해서 신고 다녔으니 무슨 부연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일제와 함께 들어온 고무신은 근대 문명의 산물로 ‘신발의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 생활을 변화시켰다. 사람의 발이 대중교통수단이었던 시절에는 군산에서 전주만 가려 해도 괴나리봇짐에 짚신을 10켤레 이상 준비해야 했으니 신발의 혁명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 새벽마다 쌀시장 섰던 ‘팔마재’

구 군산역 광장 사거리에서 옛 전군도로 따라 200m쯤 직진하면 철도 건널목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팔마산(군산고등학교 뒷산)이 보인다. 이 일대를 ‘팔마재(팔마광장 포함)’라 하였다. 아흔아홉다리까지 뻗은 팔마산(43m) 지형이 마치 여덟 마리 말이 뛰는 형국이라 하여 팔마(八馬)라 했으며 재(峙)가 있었으나 옥구선 철도 공사 때 잘려나갔다.

예로부터 팔마재 일대를 팔마장터라 하였다. 새벽마다 쌀시장이 섰던 것. 됫박 쌀장수들이 낱되로 파는 역전시장과 달리 대량으로 거래되어 정미소(방앗간)와 쌀 도매점이 많았다. 바퀴가 네 개 달린 수레(牛車)로 쌀을 실어 날랐으므로 수레바퀴 수리소도 많았다. 부근에 경성고무 회사와 승입조합(繩叺組合)이 자리하여 항상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특히 돛단배가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시절에는 옥산, 회현, 대야는 물론 충청남도 서천, 화양을 비롯한 금강 연안과 만경강 유역 미곡상들도 이곳 팔마장터를 이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주, 익산, 김제, 만경 등지에서 군산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한 팔마장터는 새벽이면 무명옷을 입은 농부들과 장사꾼들, 그리고 하얀 김을 내품는 소와 말, 쌀을 가득 실은 수레가 뒤엉켜 장관을 이루었다. 승용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로 길이 좁아 ‘소똥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다’는 말이 나돌기도 하였다.

그렇게 흥청이던 쌀시장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동차화물 운송회사가 들어서고, 1970년대 초 통일벼가 널리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는다.

# 그리움과 오욕의 역사 느껴져는 철도

팔마광장에서 몇 걸음 떼면 군산선(군산~이리)과 옥구선(군산~옥구)이 나란히 통과하는 건널목이 나온다. 그중 군산선(23.1㎞)은 1912년 3월 6일 개통됐다. 일제는 호남의 관문인 군산을 곡식 수탈의 전진 기지로 조성하기 위해 호남선 강경~이리 구간과 군산선을 동시에 개통했던 것. 1920년대 철도가 내항까지 연장되고, 1931년 8월 군산항역이 들어선다.

군산에서 출발하여 개정, 지경(대야), 임피, 오산, 이리(익산)에 이르는 군산선은 대단위 일본인 농장 7개소를 꿰뚫고 지나갔다. 이처럼 군산선 노선은 일본인 대농장주들 입맛에 맞게 그어졌다. 시민과 애환을 함께해온 군산선 열차는 증기 기관차, 비둘기호, 통일호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1세기 가까이 운행되다가 2007년 12월 31일 밤 10시 25분 익산행 열차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옥구선(11.8㎞)은 군산선 지선으로 군산-옥구 구간 철길을 말한다. 6·25전쟁 중 미8군 군산 비행장 보급품 수송을 위해 부설된 군사용 철도이다. 기록에 따르면 1952년 5월 20일 유엔군에 의해 착공, 1953년 2월 25일 완공됐다. 초기 공식 명칭은 ‘군산비행장선’이었으나 발음하기 불편하다 하여 1955년 9월 1일 ‘옥구선’으로 개칭된다.

‘미군부대선’으로도 불렸던 옥구선은 주민의 요청으로 여객 열차(비둘기호)가 운행을 시작한다. 1955년 8월 1일 상평역(1980년 12월 31일 폐역)이 무배치 간이역으로 업무를 개시한다. 1959년 2월 10일 옥구선 열차시간표에 따르면 군산역에서 06시 20분 첫차를 시작으로 12시 50분, 17시 45분 하루 3회 출발하고, 옥구역에 도착한 열차가 승객을 태워 돌아오는 식으로 하루 왕복 6회 운행하였다.

그리움과 오욕의 역사가 함께 느껴지는 폐철도, 그중 미군 비행장에 보급품을 실어 나르던 옥구선은 2001년 이후 화물 열차 운행이 중단되고 폐선 상태에 가깝도록 방치돼 오다가 2011년 4월 1일부터 비정기적으로 화물 운송을 재개하여 오늘에 이른다.

전군간도로/사진=투데이 군산
전군간도로/사진=투데이 군산

# 국내 최초 신작로 전군도로

일제는 1908년 군산을 출발점으로 하는 신작로(전군도로)를 국내 최초로 개설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이는 쌀의 용이한 반출과 조선 3대 시장인 강경시장으로 모이는 민족자본 괴멸, 군산항으로 들어오는 군수품과 상품의 원활한 보급 등이었다.

토지를 매입할 때부터 군대와 경찰을 동원했던 신작로 공사장 인부는 대부분 조선 청년과 농민이었다. 일본 경찰에 잡혀온 동학혁명군과 의병도 다수 섞여 있었다. 소설 <아리랑>에서도 의병활동을 하던 손판석·지삼출 등이 일경에 붙잡혀 노역하다가 탈출하여 부두 노동자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거장 되네. 말깨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 일깨나 하는 놈 공동산 간다···”

전군도로 공사가 시작되고, 지금의 명산동 일대에 대규모 유곽 단지가 조성되던 시절(1906~1909) 군산·옥구 지역에서 유행했던 노래 한 구절이다. 가사 마디마디에서 비탄과 절망에 빠진 당시 조선 농민들의 울분이 느껴진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볏섬을 산더미처럼 쌓은 달구지 행렬이 20~30리씩 이어져 장관을 이뤘다는 전군도로. 군산선 개통(1912) 이후에는 화물차가 가세하였고, 그렇게 집산된 벼들은 내항 부근의 창고와 정미소를 거쳐 일본으로 바리바리 실려 나갔다.

지역별 키워드

ㆍ장재동: 경성고무주식회사, 역전파출소, 가마니검사소(부근에 견취급장), 삼성운수, 군산쟁기공장(우마차 쟁기 제작 및 수리 일절), 군산메리야스(성종표 메리야스), 혜신메리야스(김용시, 1968년 방위성금), 도수장(屠獸場), 행려병인구호소(떠돌이환자 보호소), 소전조(篠田組),

ㆍ흥남동(팔마재): 팔마산(팔마재), 팔마광장(분수대, 시계탑), 국내 최초 신작로(전군도로, 번영로), 건널목(군산선, 옥구선), 군산사범학교(군산대학), 일신야학원, 경장시장(서래시장), 경마장, 궁기농장(미야자키농장), 팔마장터(새벽 쌀시장),

ㆍ경장동(경장리): 일신야학교(설립자 김용진), 경마장(경마교), 궁기농장, 군산농기공업주식회사(농기구공장), 결혼회관, 송경교(아흔아홉다리), 대왕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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