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의 群山學 10강] 선양동~흙구데기까지(오룡·둔율·미원·삼학동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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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의 群山學 10강] 선양동~흙구데기까지(오룡·둔율·미원·삼학동 일대)
  • 조종안 시민기자
  • 승인 2022.10.04 07:34
  • 기사수정 2022-10-04 07: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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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동 유래

둔율리(둔뱀이)는 조선 시대 옥구군 북면에 속한 지역으로 군산진 둔소(屯所: 병영)와 둔전(屯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20년대 둔율리는 구릉성 산지와 낮은 충적 평야로 이뤄져 있었으며 지금의 오룡동, 삼학동, 미원동, 둔율동, 선양동, 흥남동, 장재동 지역이 그에 속하였다. 그중 선양동, 둔율동, 오룡동 지역은 ‘안둔뱀이’ 흥남동, 장재동, 삼학동, 미원동 등은 ‘바깥둔뱀이’라 하였다.

“지금은 개복동과 연접된 구복동(九福洞)을 한데 버무려가지고, 산상정(山上町)이니 개운정(開運町)이니 하는 하이칼라 이름을 지었지만, 예나 시방이나 동네의 모양다리는 그냥 그 대중이고 조금도 개운(開運)은 되질 않았다.”-(같은 책 42쪽)

산상정(현 선양동)은 군산 개항 전 옥구군 북면에 속했으나 경술국치(1910) 이후 일제에 의해 지방 행정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뤄지는 1914년 주변의 여러 마을과 함께 ‘옥구군 미면’에 속하였다. 이때부터 지도에 ‘둔율리(둔뱀이·둔배미)’란 지명이 보이는데, 안쪽에 위치한다 해서 ‘안둔배미’라 했단다. 1932년 둔율리 일부를 갈라 산상정(山上町)으로 개편되고, 1946년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선양동(先陽洞)’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선양동 고지대는 광복 후에도 노후 된 불량주택 밀집 지역이었다. 금방이라도 처녀귀신이 나타날 것 같은 폐가가 수두룩하였고, 넘어지면 코가 깨질 것 같은 비탈길이 사방팔방으로 나 있었으나 2000년대 들어 주거환경 개선사업이 추진되어, 2009년 임대주택 건설과 해돋이공원 조성 등 1단계 사업이 완료된다. 구불길 중 ‘6-1 탁류길’이 선양동 해돋이 공원을 지난다.

# 산상정에 제2시장 개시

1930년대 초, 군산은 공설시장이 한 곳밖에 없어 개복동 부근은 골목마다 행상으로 혼잡을 이뤘다. 따라서 위생상, 교통상 많은 불편을 겪었다. 일제는 제2시장(산상정 시장) 신설을 결의하고 적잖은 편리를 가져다줄 거라고 선전하였다. 시장 위치는 ‘산상정 일대’. 일제는 총사업비 6,200원을 들여 1935년 9월 착공, 1936년 4월 완공한다. 산상정 시장은 총면적 1,244평에 건평 400평 규모였다.

군산의 공설시장은 1915년 지금의 장재동에 설치됐다가 시가지 확장과 함께 1931년 12월 내항선 철도변(현 신영동 구시장)으로 옮긴다. 당시 공사비는 11.000원, 면적 2954평, 건평 526평(양철 목조평가)으로 ‘정기 개시’를 ‘매일 개시’로 바꾸었다. 이후 계속 번창하자 산상정 일대에 새 시장을 조성했던 것. 그때 사람들이 산상정 시장을 '신시장'이라 하니까 자연스럽게 ‘구시장’으로 부르게 된다.

1936년 5월 28일~6월 3일(7일간) 산상정 시장에서 호남 각희대회(씨름대회)가 열렸다. 씨름대회는 중앙시보 군산지국이 주최하고 동아일보 군산지국이 후원했으며 부상도 푸짐했다. 매일 열리는 예선 상품은 1등 백미 한 가마. 2등 백목(무명) 한 필. 3등은 내의(內衣) 한 벌이었고, 대회 마지막 날 결승전 상품은 1등 농우(農牛: 송아지) 1두. 2등 백미 한 가마, 3등 광목 1필, 4등 경대 일좌 백목 1필, 5등 양말 일타 등이었다.

# 콩나물고개와 아리랑고개

콩나물고개(아리랑고개)는 조상들의 풍류가 느껴지는 지명이다. 조선 시대 임피, 회현, 지경(대야) 등지 사람들이 군산 진영에 오려면 논길, 들길 그리고, 송경교(아흔아홉다리)를 지나 팔마재(경장동 부근)부터 산길을 이용했다. 그렇게 군산에 오는 사람들은 군산진 둔소가 있는 둔뱀이 고개에서 쉬었는데, 그곳에 기가 막히게 시원한 콩나물국을 내놓는 주막이 있었다. 그래서 ‘콩나물고개’라는 지명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개복동 복판으로 들어서서 콩나물 고개까지 거진 당도한 정 주사는 길옆 왼편으로 있는 탑삭부리 한 참봉네 싸전가게를 넘싯 들여다본다.”-(같은 책 43쪽)

한참봉 쌀가게는 콩나물고개 아래(현 영광여고 방향)에 있었다. 은행원 고태수의 하숙집이자 정주사가 10여년을 거래해온 단골 쌀가게로 부근에 유흥음식점이 많았다. 명님이가 개복동 술집으로 팔려간 대목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참봉 쌀가게는 초봉이와 결혼한 고태수가 내연의 관계에 있던 한참봉 아내 김 씨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살해당한 현장이기도 하다.

아리랑고개는 한국전쟁 후 생겨난 지명으로 알려진다. 일제강점기에도 고개 부근에 책방이 많았고, 한국전쟁 후에도 백광서림, 아리랑서점, 광문당서점 등 고서점이 20여 곳 있었는데 고갯마루에 있던 고서점 간판을 따 ‘아리랑고개’로 불리게 된 데서 유래한다. 보릿고개 시절(50~6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장년층은 ‘아리랑고개’가 더 정겹고 친숙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 '모시산'과 삼학동

지금의 삼학동(三鶴洞) 일대에 있던 나지막한 야산을 ‘모시산’이라 하였다. 조선 시대 서울로 보낼 모시와 삼배를 이곳 야산에 삼막(창고)을 짓고 말뚝을 박아 건조했는데, 바닷바람에 너울거리는 모습이 3천 마리의 학이 춤추는 것처럼 장관을 이루어 '삼학동'이라 하였고, 야산도 '모시산'이 되었다고 전한다.

한산 모시와 나포면 숫골(마촌) 특산품 삼배를 모시산에서 말렸다. 모시와 삼배 말리기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광복 후에는 화교들이 언덕배기에 집을 짓고 밭을 일궈 먹으며 살았다. 개발 붐이 일었던 1970년대 이후 대부분 산이 사라지고 주택단지가 되었다.

# 흙구더기

원도심권에서 남쪽으로 새로 조성된 동네라는 의미를 지닌 흥남동이 있다. 이 흥남동과 삼학동에 걸쳐 길게 뻗어있는 팔마산 자락 풍문초등학교 일대를 예전에는 흙구더기라 하였다.

본래 군산 원도심 지역 일대는 나지막한 구릉지와 간석지로 이루어져 있었고, 지금과 같이 평탄한 도시가 이루어지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낮은 구릉과 산들을 깎아 간석지를 메우는 작업을 이어왔다. 개항 전부터 공사가 시작돼 가장 늦게까지 토석을 채취했던 지역이 바로 흙구더기였다.

당시 비가 오면 신발에 온통 개흙과 황토가 묻기 십상이고, 신발에 흙을 많이 묻히고 다니면 “흙구더기에서 왔는가”하고 놀려댔다고 한다. 흙구더기는 1960년대 초까지 덕지덕지 작은 집들이 붙어있는 고지대였고, 1964년 풍문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상당부분 정비됐다.

흙구더기와 인접한 흥남동 고지대는 부근 일대 팔마산 중턱에 오두막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형성된 달동네였다. 이후 주거환경 개선사업에 의해 2003년 가을 주공아파트 공사가 시작돼 2006년 봄 3백여 세대가 입주했다. 예전 구릉지보다 더 높은 아파트가 완공되어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 미원광장에 설치된 검정고무신 조형물

▲ 미원광장에 설치된 만월표 고무신 조형물/사진=조종안 기자
▲ 미원광장에 설치된 만월표 고무신 조형물/사진=조종안 기자

지난 2021년 6월 미원광장에 만월표 검정고무신 조형물이 세워져 눈길을 끌었다. 흥남동 소규모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이다. 고무신 조형물은 장재동에 위치했던 경성고무 주식회사 제품인 ‘만월(滿月)’표 고무신을 모티브로 삼았다. 과거 생산 활동 주역인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군산 야구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인근 남초등학교 야구부(1962년 이용일 당시 경성고무 전무에 의해 창단) 역사를 기념하고자 만들어졌다.

한편, 경성고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사업가가 설립한 고무신공장을 1932년 이만수 사장이 인수해서 설립한 회사로 전해진다. 이용일(이용일 전 KBO 총재권한대행)은 경성고무 창업주 이만수 아들로 1960년대 군산에 초등학교 야구부 네 팀과 중학교 두 팀, 고등학교 한 팀을 창단시킨, 그래서 군산 야구의 아버지로 알려진다. 아래는 조형물에 새겨진 글이다.

“고무신은 근대의 혁신적이 생활용품이었다. 남자 고무신은 갖신을 본떴고 여자 고무신은 당혜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미원동은 고무신을 만드는 경성고무 공업사가 위치했던 마을로 이러한 고무신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서울 이북지역에서는 삼천리표 고무신이 인기였지만, 서울 이남지역에서는 경성고무의 ‘만월표’가 최고 인기제품이었다.

1932년 설립된 경성고무공업사는 당시 임직원 100여 명이 일했고, 한국인 기업가에 의해 설립된 유일한 중소기업이었다고 한다. 미원동은 1980년대까지 버스 종점이 있었고, 낫공장, 메리야스 공장 등 크고 작은 공장들이 있어 도시 노동자들이 모여들거나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경성고무공업사에서 일하는 주민이 많았고, 출퇴근길이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한 상업활동도 활발했다. 미원광장에 세워진 ‘만월표 고무신 조형물’에서”

지역별 키워드

ㆍ선양동: 군산형무소(군산교도소), 서낭당고개(형무소고개), 산끊어진 고개, 안둔배미(선양동에 있는 마을), 미룡주조장, 군산 제2시장(신시장, 산상정 시장), 호남각희대회(호남씨름대회), 해돋이문화제, 콩나물고개(아리랑고개), 기와골:(선양동 산기슭 현 남초교 앞을 이르는 지명, 기와공장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ㆍ둔율동(둔배미): 옥구군청, 둔뱀이고개(군청고개), 금호학교, 둔율동성당, 둔율리참사(1929년 1월 불이회사 매립공사장 희생자 7명), 삼천리간장공장, 복싱체육관, 금강사 둔율포교소, 근화호텔(동양관, 근화각)

ㆍ삼학동: 흙구더기(흙구데기), 모시산(옆에 재실산), 제2보통학교, 야외풀장(현 대우아파트자리), 화교공동묘지(삼학동, 오룡동 사이 산비탈에 있었음. 현재는 나운동 군경묘지 뒷산 중턱에 있음)

ㆍ미원동: 시내버스 터미널, 남초등학교(사범부속국민학교), 미원동 파출소, 삼영연탄공장(대표 조시형), 차약방(주유소 자리), 광산목재, 중화제재소, 영생의원, 신일고물상, 군산건재(미원동 모래집), 정다방, 미원다방, 미원방앗간, 현대극장(대양극장), 군산권투회(사범 손 용), 군산운수, 대한택시, 대한운수, 화신옥, 뽀빠이 냉면, 황평상회(공동수도), 야간학교(재건중학교, 훗날 농아학교, 명화학교), 미원광장(만월고무신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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