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의 群山學 5강] 죽성포에서 옛 군산역까지(신영동, 대명동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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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의 群山學 5강] 죽성포에서 옛 군산역까지(신영동, 대명동 일대)
  • 조종안 시민기자
  • 승인 2022.09.07 08:07
  • 기사수정 2022-09-13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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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명월관, 정초엔 윷놀이 대회도 열려

명월관은 일정한 시설에 정해진 메뉴, 그리고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음식점으로 최초의 근대적인 음식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명월관은 최초의 근대적 음식점이었지만 기생들이 시중을 드는 전근대적인 면도 공존하고 있었다. 명월관은 주로 잔치를 여는 장소였으므로 기본적으로 음식값이 비쌌고 기생을 불러 공연할 경우 비용이 더 비싸졌다. 명월관은 에도시대 말기 형성된 일본 요리옥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군산은 1920년 조선인음식점조합이 처음 결성된다. 창립 5주년을 맞는 1925년 12월에는 경성 단성사에서 절찬리에 개봉됐던 흑백 무성영화 <쌍옥루(雙玉淚)>를 군산좌에서 3일간 상영하여 대성황을 이뤘다. 조합원들이 나서 300원에 달하는 의연금도 모았다. 그 당시 조합사무실은 개복동에 있었으며 조합원은 150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일제강점기 요정은 갑종(甲種)과 을종(乙種) 두 가지 형태였다. 명칭도 요정, 요릿집, 요리점 등을 혼용하였다. 갑종요릿집은 기생조합이나 권번 출신으로 가무가 전문인 예기(藝妓)들이 놀음을 펼쳤고, 을종요릿집은 매매춘이 목적인 창기(娼妓)들 활동무대였다. 창기를 고용한 요릿집을 을종이라 했는데, 유곽(遊廓)이 그에 속하였다.

요릿집에는 기생이 상주하지 않았다. 손님이 기생 아무개를 지명하면 요릿집에서 권번으로 연락하였고, 권번에서는 기생 거주지로 인력거를 보냈다. 권번에서 통보 받은 기생은 인력거를 타고 요릿집에 나가 가무를 연행하였다. 당시 기생들은 ‘권번의 연락’를 ‘지휘 받았다.’고 하였다. 요릿집이라 해서 모두 기생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갑종요릿집 허가증이 있는 요정에서만 기생의 가무를 감상할 수 있었다.

군산 기생들의 요릿집 놀음은 엄격하게 이뤄졌다. 권번에서 인정한 기생만 나갈 수 있었다. 시험에 합격해도 경찰서에서 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조선 기생들은 주로 명월관(明月館), 동양관(東洋館), 호남관(湖南館), 세심관(洗心館) 조선각(朝鮮閣), 식도원(食道園) 등으로 놀음을 나갔다. 화교가 운영하는 동해루(東海樓)와 쌍성루(雙盛樓)에서도 종종 기생을 불렀다.

그중 명월관은 재래시장이 가까운 동영정(신영동), 동양관은 둔율정(둔율동) 콩나물고개 너머에 있었다. 동양관은 광복 후 ‘무궁화 꽃’을 상징하는 근화각(槿花閣)으로 개칭했다가 1950년대 호텔로 업종을 변경한다. 호남관은 영정(영동), 식도원은 개복정(개복동), 세심관은 구복동, 조선각은 장미동 동녕고개 근처에 있었다. 동해루는 2층에 대형 연회장이 있었으며, 쌍성루는 결혼식을 올릴 정도로 규모가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명월관은 걸어서 2~3분 거리에 소화권번이 있었다. 건물 앞 도로는 소화통이 개설되는 1930년대 초까지 군산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뒤로는 금강으로 유입되는 샛강(일명 세느강)이 흘렀으며 주변 공터에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향나무가 200여 주 심겨 있었다. 그 옆으로 내항선(군산역-내항)가 지나갔다. 철길 옆에는 호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가등정미소가 자리하였다.

명월관은 군산을 대표했던 요릿집으로 조선의 춤과 소리를 좋아하는 일본인 단골도 있었고, 광복 후에는 미군 장교들도 찾아와 한국의 전통 가무를 즐겼다. 그 외에 군산을 방문한 외지 손님 환영회를 비롯해 지역 유지 좌담회, 중앙지 신문기자 간담회, 군산 지역 객주와 선주들 좌담회, 회사 창립총회와 정기총회, 각종 단체 발기인대회 등이 개최되는 등 문화 공간 역할도 하였다.

매년 음력 정월에는 중앙의 주요 언론사 지국이 주최하는 척사대회(擲柶大會)가 명월관을 비롯해 시내 요릿집에서 열렸다. 척사대회는 척붕대회(擲棚大會), ‘구정초 놀이’, ‘윷놀이 대회’ 등으로 불렸으며 권번 기생들도 참여하였다. 윷놀이대회는 홍군과 백군으로 나눠 진행되었다. 단체전 우승팀과 개인전 입상자에게는 푸짐한 상품이 돌아갔다. 상품은 시계를 비롯해 백미(白米), 내복, 동양목(東洋木), 양말, 신문 구독권, 사진 촬영할인권 등이었다.

1926년 2월에는 명월관 주인 발의로 시내 식당 및 요릿집 업주들이 풍물패를 조직, 동종 업소 및 상가를 방문하여 거둔 의연금을 경비 부족으로 운영이 어려운 광동의숙, 한송학당, 영신여학원, 군산유아원, 노동청년회 등에 전달하였다.

광복 후에도 갑종요릿집 허가증을 내걸고 영업하던 명월관은 1948년 6월 ‘대중 요리업’으로 변경한다. 이때부터 여급을 하나둘 고용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6월 29일 치 <군산일보>에 “업종 변경 및 제반 시설의 개수를 단행하고 일류 여급의 풍부한 ‘써~비쓰’진을 갖추고 금일부터 계속 영업하오니 애용해달라”는 내용의 안내 광고를 싣는다. 그해 12월에는 명월관을 비롯해 군산 시내 갑종요리점 5개 을종 218개, 카페 4개 등의 영업이 폐쇄되면서 군산 시내 기생 30여 명과 여급 200여 명이 실직상태에 빠지게 된다.

격동기를 거치면서 휴업과 폐업을 거듭하던 명월관은 1960년대에도 가야금 소리와 기생들 노랫소리가 향나무가 심어진 정원 담장을 넘어 들려왔다. 요리상에는 요정의 상징인 신선로가 빠지지 않았다. 각종 과일과 견과류, 문어 등을 예쁘게 손질해서 올렸다. 짜장면 한 그릇에 20원, 군산에서 발행되는 <호남일보> 기자 한 달 봉급이 4000원이던 시절, 명월관 A급 요리상(4인 기준)은 5000원, B급 요리상(2인 기준)은 3000원이었다.

유흥문화가 바뀌면서 장구와 가야금 소리보다 아코디언과 기타 반주를 선호하는 손님이 늘어난다. 명월관에서도 밴드들이 흘러간 유행가를 연주하고 손님과 여급들이 어울려 양춤을 추는 광경이 자주 목격된다. 1960년대 후반에는 간판이 '연정'으로 바뀐다. 수완이 뛰어난 명월관 출신 기생들이 독립해서 난정(공집), 연희정, 송죽, 신정, 풍림, 초정, 은마 등 새로운 스타일의 요정을 개업하여 호황을 누린다. 신진들에게 단골을 빼앗긴 연정은 1980년대 노래방으로 다시 태어나 오늘에 이른다.

# 군산소화권번(群山昭和券番)

권번(券番)은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조합이다. 당시 군산에는 세 곳(군산권번, 소화권번, 보성권번)의 권번과 두 곳(한호예기조합, 군창예기조합)의 기생조합이 있었다. 그중 군산소화권번의 경우, 입교하면 4년 과정으로 시조·가곡·판소리·춤 등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권번은 기생을 교육할 뿐만 아니라 관리하는 업무 대행업체로, 등록된 기생을 요청에 따라 요릿집에 보내고 화대를 수금하는 일을 맡았다. 군산에서는 권번에서 가무와 글을 익힌 기생들이 일제강점기 대표적 요릿집이었던 명월관과 동양관(근화각) 등에서 가무 공연으로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이전인 1908년 기생들의 관리를 장악원에서 경시청으로 이관하고, 경시청령 제5호 ‘기생 단속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르면 기생으로 영업하려면 경찰청에 신고해서 허가증을 받아야 하며, 경찰청의 지시에 따라 기생 조합을 설립해야 했다.

'시장 사용료'까지.. 일제의 조선인 차별

▲ '군산부사'(1935)에 실린 ‘군산부영시장’ 모습ⓒ 군산 역사관
▲ '군산부사'(1935)에 실린 ‘군산부영시장’ 모습ⓒ 군산 역사관

일제강점기, 군산부 신영정(신영동)에 자리한 공설시장(구시장) 모습이다. <군산부사>(1935)는 '군산부영시장(群山府營市場)'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군산부에서 관리·운영하는 시장'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군산시장, 공설시장, 부영시장 등으로 불렸으며 1936년 일제가 산상정(현 선양동)에 제2시장(신시장)을 개설한 후 '구시장'이란 호칭이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금강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으로 진즉 사라진 가등정미소와 빽빽하게 들어선 일본식 목조건물들이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멀리 아슴푸레하게 보이는 산줄기는 금강 건너 충청도 서천 땅이고 우측의 굴뚝과 창고 건물들은 호남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는 가등정미소이다. 검은 연기를 내품는 연통도 보인다. 그 주변이 소설 <탁류>에 등장하는 째보선창이다.

왼편 골목 뒤쪽엔 째보선창으로 유입되는 샛강(복개된 새느강)이 흘렀다. 그 물줄기 주변에 옹기전이 조성되어 있는데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옛 노인들 전언에 따르면 장작이나 옹기그릇을 가득 실은 돛단배들이 공설시장(돼지국밥집 골목) 코앞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광복 후에도 봄이면 뱅어 떼가 시장 근처까지 올라왔고, 버려진 돛단배가 발견됐다.

공설시장과 가등정미소 사이에는 승용차 두 대가 비켜갈 정도의 간선도로가 지나갔다. 일제가 '장래 군산 발전'이란 명분을 내세워 샛강에 교량을 가설했던 것. 당시 신문들은 3만 부민의 빈약한 주머니를 털어 공사에 착수했다고 전한다. 간선도로는 시장 정문-공설운동장-서래장터-구암동-성산-임피-강경-논산을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내항선(군산역~내항) 철도와 1932년에 조성된 공설운동장 담벼락도 보인다. 일제강점기 내내 쌀을 실어 나르기 바빴던 내항선은 진즉 폐선되어 녹슨 철도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스탠드를 갖춘 현대식 운동장으로 전국 규모 축구대회, 자전거 대회, 시민체육대회 등이 열렸고, 1950년대 군부대가 주둔했던 공설운동장은 주택 단지로 변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 '조선인 시장' 이전 후 고율의 자릿세 거둬

▲ 군산 조선인시장 이전 알리는 1931년 3월17일 치 ‘동아일보’ 기사/제공=조종안 기자
▲ 군산 조선인시장 이전 알리는 1931년 3월17일 치 ‘동아일보’ 기사/제공=조종안 기자

"물의 중에 있든 군산 조선인 시장(市場)은 2,580원의 예산으로 드디어 금년 7월 중에 이전하기로 되었다. 새로 결정한 곳은 신영정(新榮町)에서 경장리(京場里·경포)로 통하는 광장이라 하며 동지는 철도국(鐵道局) 용지로서 대부받은 것인데 시장으로 사용할 면적은 약 2600평이라 한다. (현대어로 수정)" - (1931년 3월 17일 치 '동아일보')

신문은 그해 7월 중 조선인 시장(장재시장)을 신영정 철도 용지로 이전하게 될 것이라며 이전 비용과 시장 면적까지 상세히 전한다. 조선 상인들의 기대 속에 막상 7월이 다가오자 시장 이전은 9월로 미뤄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 약속도 지켜지지 않는다. 9월 1일 신문에는 조선인 시장 이전 인가를 도(道)에 제출했다는 기사만 뜬다.

지루하게 미뤄오던 공설시장 건물(점포 총 120칸)은 11월에야 완공된다. 부(府) 당국은 입점 상인을 모집하였고, 공지 한 달도 안 되어 신청자가 200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가난한 하층민들로 적게는 6~7원, 많으면 30~40원의 자본금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당시 군산 부두 노동자 한 달 임금이 15~20원이었으니 상인들 재정 여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군산 조선인 시장은 공사비 1만1000원(매립비 포함), 면적 2954평(건평 526평)으로 그해 12월 27일 신영정(현 공설시장 자리)으로 이전한다(옛날 신문 참고). 제반 시설을 완비한 일제는 종래의 정기 개시를 상설 개시로 바꾸고, 시장질서와 단속을 명분으로 청원경찰을 배치한다. 또한 점포들을 1~5등급으로 나눠 등급에 따라 매월 자릿세(3원~8원)를 부과하였다.

# 과중한 시장 사용료는 조선인 차별

상인들의 하루 매상은 10~30전, 많아야 1~2원에 그쳤다. 수입액이 생활비는커녕 자릿세(시장 사용료)도 낼 수 없게 되자 대책을 강구해달라고 부(府) 당국에 주문하였다. 그러나 누차 교섭해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참다못한 상인 60여 명은 연명으로 진정서를 작성, 부윤에게 제출하는가 하면 점포를 노상으로 옮기는 상인도 50여 명에 달하였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일제 당국은 시장 사용료를 등급에 따라 50전~1원씩 감하겠다고 통지한다. 그러나 상인들의 원성은 하늘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일제 당국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장을 감독하는 관리가 난폭한 행동을 버릇처럼 잠행(潛行), 많은 상인들이 공포심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전의용 부의원은 1934년 3월 25일 열린 회의에서 '군산의 시장(공설시장) 시설은 군·면 소재지 촌락 시장과 별다른 차이가 없음에도 빈약한 상인들에게 매년 과중한 사용료(6300원)를 부과하는 것은 등한시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며 인하를 촉구하는 등 부윤의 인식 부족을 지적하였다. 일제 당국의 과중한 시장사용료 역시 조선인 차별정책의 하나였던 것.

고율의 시장 사용료 문제는 해마다 군산부회의 화두가 됐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군산 제2시장(산상정 시장) 개설을 앞두고 열린 1935년 12월 3일 회의에서도 빈궁한 조선인 상인의 시장 사용료 면제 안건을 놓고 일본인 부의원과 조선인 부의원이 충돌하였다. 1936년 3월 28일에도 '조선인 시장 사용료 감하 문제로 맹렬한 논란이 있었다'고 신문들은 전한다.

# 고율의 시장 사용료 문제

1930년대 군산에는 부청에서 관리, 운영하는 공설시장이 두 곳 있었다. 신영정(신영동)의 조선인 시장과 행정(幸町: 장미동)의 일본인 시장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인들의 시장 사용료 문제가 조선인 시장에서만 대두됐다는 점이다. 이는 일제 당국이 조선인 시장과 일본인 시장을 차별화해 운영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 합동군사훈련을 위해 군산역에 도착한 일본군 숙영부대(1934년 10월)/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 합동군사훈련을 위해 군산역에 도착한 일본군 숙영부대(1934년 10월)/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이듬해 괴뢰만주국을 세우고 전시체제로 전환한다. 중국대륙과 최단 거리에 위치한 군산 역시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병참기지로 개발된다. 중일전쟁(1937) 앞두고는 집회 및 사상, 언론통제가 더욱 강화된다. 그래서일까. 1936년 3월 이후에는 조선인 시장 사용료 관련 기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물적 자원 통제와 기근으로 절대빈곤이 지속됐던 1930년대 군산, 일제의 탄압과 수탈은 전운이 짙어질수록 더하였다. 심지어 놋그릇 하나까지 전쟁물자 공출로 수거해갔다. 이러저러한 정황으로 미뤄볼 때 조선 상인들의 공설시장 사용료 문제는 1945년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해결은커녕 공출까지 겹쳐 더욱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 미원동 중앙공설시장, 계획에 그쳐

일제강점기(1930년대) 군산에는 조선인이 이용하는 공설시장이 두 곳 있었다. 하나는 1931년 12월 일제가 신영정(현 신영동) 철도부지에 개장한 부영시장(공설시장)이고, 또 하나는 1936년 4월 산상정(현 선양동)에 설치한 제2시장(산상정 시장)이었다.

일제가 관리·운영했던 두 공설시장('부영시장'과 '제2시장')은 광복 후 극도의 혼란기(미군정기)에도 시장 기능을 유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부영시장은 구시장, 신영시장, 공설시장 등으로 불리면서 지역의 서민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식량과 의복을 배급받아 겨우 연명하는 배급경제 속에서도 상권이 확대되고 이용객도 해마다 증가한다.

공설시장 주변 골목은 매일 혼잡을 이뤘다. 인근 상가와 가정집에서 버리는 음식물도 한몫했다. 이곳저곳에 쓰레기가 쌓였고, 행상들이 팔다 남은 반찬꺼리까지 더해져 주민들 보건 위생에 문제가 됐던 것. 시장 앞 간선도로 역시 잡상인들이 좌판을 벌이는 바람에 행인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아래는 1947년 11월 23일 치 <군산신문> 기사 한 대목이다.

▲군산 신시장 설립 계획을 보도한 '군산신문' 기사/제공=조종안 기자
▲군산 신시장 설립 계획을 보도한 '군산신문' 기사/제공=조종안 기자

"부(府)에서는 문란(紊亂)한 점을 없애고 부민의 편리를 도모하고 물자 집산을 원활히 하여 가격균등 유지를 확립하기 위해 미원동(米原洞) 4,200여평(坪) 대지에 4천6백만 원 공비(公費)로 현재의 약 3배의 중앙공설시장(中央公設市場) 설립 계획을 세워왔으며 그 계획 준비도 완성되고 상인의 신입(申込)도 대다수에 달하였음으로 불원간 공사에 착수하리라 한다. (현대어로 수정)"

신설될 미원동 중앙공설시장은 점포 5백 개, 노점상 2천 명 수용 규모이고 공사비는 국고와 부(府) 예산으로 지출하되 부족분은 신입자 부담으로 추진, 1948년 5월 준공하게 될 거라고 신문은 전한다. 이어 '신시장에 의한 부민의 편리와 이익은 막대할 것이며, 현재 시장(부영시장)은 질서문란과 비위생적인 점을 면치 못함으로 불원간 철폐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신축건물 규모와 준공 시기, 입주 상인들의 입주금 납부 등 공사 내역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음에도 어찌 된 영문인지 그 후 미원동에 대규모 공설시장이 들어섰다는 보도는 어느 매체나 구전(口傳)을 통해서도 접할 수 없었다. 불원간 철폐될 거라는 부영시장 역시 8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신영동에 자리한 마트형 '공설시장'이 그것이다.

60년 전 '공설시장'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 마트형 전통시장 공사 전 공설시장 입구(2009)/사진=조종안 기자
▲ 마트형 전통시장 공사 전 공설시장 입구(2009)/사진=조종안 기자

군산 공설시장은 한국전쟁(1950~1953)을 거치면서 목조건물 일부가 파괴 및 소실된다. 이후 노천시장 또는 천막 시장으로 유지하다가 1962년 개축된다. 그렇게 큰 재해를 당하면서도 지역의 서민경제 중심지로 부상한다. 충남 일부(강경, 논산, 부여, 서천, 장항)와 전북 서부권(만경, 김제, 부안) 주민도 이용하는 등 시장권도 확대된다.

아궁이에 무쇠 가마솥 걸어놓고 밥해 먹던 50~60년대, 당시 공설시장은 정미기를 갖춘 대형 방앗간 두 곳을 비롯해 싸전거리, 닭 전(가축시장), 감독(감도가), 양키시장 등과 벨트를 이루고 있었다.

위는 군산 도립병원에서 의료봉사(1954~1956) 하던 영국인 의사 존 콘스 박사가 찍은 공설시장 모습이다. 위치는 반찬가게 골목과 마주한 채소전 입구로 보인다. 요즘은 구경조차 어려운 각종 사기그릇과 골판지를 덧댄 판잣집 상가들이 시대를 반영한다. 미국의 원조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 아낙들의 말쑥한 옷차림에서 여유와 활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채소전은 지붕 없는 노천시장으로 시골 아낙들이 머리와 어깨에 이고 지고 내온 무, 배추, 봄똥배추(봄동배추), 콩밭지꺼리(콩밭에 심은 열무), 남새 등을 벌여놓고 팔았다. 하우스 재배가 없던 그때는 장에 나오는 채소 종류도 계절에 따라 달랐으며, 사람들은 나무새만 보고도 날짜와 절기 변화를 가늠하였다.

매서운 바닷바람이 목을 움츠러들게 하는 겨울의 채소전은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소한, 대한 지나고 날이 풀리면 봄똥배추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면서 생기가 돌았다. 시골 할머니들이 캐오는 쑥과 냉이, 달래향이 봄이 머지않았음을 알려줬던 것. 콩밭지꺼리는 여름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하였다.

▲ 마트형 전통시장 공사 전 대장간(2009)/사진=조종안 기자
▲ 마트형 전통시장 공사 전 대장간(2009)/사진=조종안 기자

공설시장은 여러 개 골목으로 형성돼있었다. 취급 상품과 제품도 달랐다. 정문에서 왼쪽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서면 환갑잔치와 폐백, 이바지 음식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가 두세 곳 있었다. 그곳에 전시된 생실과와 숙실과는 백열등에 반사되어 더욱 먹음직스럽게 보였으며 '壽(수)'와 '福(복)'자가 새겨지도록 둥글게 고인 그 솜씨는 경이롭기까지 하였다.

이바지 음식 가게와 연탄집게, 불삽, 쥐덫 등을 파는 철물점을 지나면 내항선 철도를 따라 대장간 골목이 시작됐다. 이곳은 서너 평쯤 되는 대장간 7~8곳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망치 소리와 담금질 소리로 요란했다. 대장간은 비좁았으나 구조는 복잡하지 않았다. 중앙에 메질하는 모루가 놓여있고, 벽 쪽에 화덕이 있었으며 그 옆에 풀무가 자리했다.

▲ 마트형 전통시장 공사 전 생선전(2009)/사진=조종안 기자
▲ 마트형 전통시장 공사 전 생선전(2009)/사진=조종안 기자

조금 더 들어가면 젓국집(젓갈가게) 골목이 시작됐다. 가게 앞에는 각종 젓갈이 가득 담긴 도가지(항아리)와 함지박이 질서 있게 놓여 있고, 어른 키 높이의 드럼통에는 새우젓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새우젓은 새우를 잡는 철에 따라 이름도 달랐다. 5월에 잡은 새우로 담그면 '오젓', 6월에 담근 새우젓은 '육젓'이라 했던 것.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생선전이라 하였다.

생선전 지나 닭 전(가축시장)이었다. 톱날처럼 파인 붉은 벼슬과 꼬리가 하늘로 치켜 올라간 수탉은 대장부다웠다. 산토끼, 다람쥐 등 도시 외곽 야산에서 잡아 온 산짐승도 볼 수 있었고, 희한한 물고기(어른 팔뚝보다 굵은 잉어와 가물치)와 부엉이, 꿩, 칠면조 등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아이들에게 '인기짱'이었던 것은 나무상자 안에서 계속 채만 돌리고 있는 다람쥐였다.

▲ 마트형 전통시장 공사 전 고무신가게(2009)/사진=조종안 기자
▲ 마트형 전통시장 공사 전 고무신가게(2009)/사진=조종안 기자

다음 골목은 벽지와 창호지 등을 파는 큰 지물포와 신발가게 3~4개가 나란히 자리했다. 신발 가게들은 주로 군산 경성고무에서 생산되는 '만월(滿月)'표 고무신과 운동화를 진열해놓고 팔았다. 신발가게 옆으로 들어가면 오색찬란한 주단 가게와 한복집 20여 곳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곳은 가게마다 백열등을 여러 개씩 매달아 놓아 오방색의 화려함이 가득했다.

장례용품을 취급하는 장의사(葬儀社)도 두세 곳 있었다. 수의(壽衣)와 상복(喪服)이 나란히 내걸려 있고, 시신을 넣는 관(棺)도 세워져 있어, 그곳을 지나려면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무서웠다. 상갓집에서 풍기는 야릇한 향냄새와 둔탁한 삼베 냄새가 깊은 산속의 묘지와 상엿집을 떠오르게 하면서 죽음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던 것.

시장 정문 앞 도로변은 라이터장수, 약장수, 땜장이, 군고구마장수, 빙수장수, 인장포, 토정비결 보는 할아버지 등이 자리했다. 그들은 우풍화학(한국주정) 벽돌담을 바람막이 삼아 자리를 폈다. 그중 라이터장수, 땜장이, 인장포 아저씨는 사철, 군고구마 장수는 겨울, 빙수장수는 여름, 그리고 토정비결 할아버지는 늦가을에서 이듬해 봄까지 손님을 받았다.

공설시장은 1969년 4월 현대식 건물을 착공, 그해 12월 준공식을 치른다. 그러나 3일 후 건물 아홉 동이 반소되고 두 동이 전소되는 대형화재가 발생한다. 예상치 못한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시(市) 당국의 보조와 상인들 노력으로 이듬해(1970) 복구된다. 2012년 3월에는 전국 최초 마트형 전통시장으로 거듭나 오늘에 이른다.

지역별 키워드

ㆍ신영동: 해양대학교, 정미인접협동조합(精米籾摺共働組合), 신영루(척사대회), 천일사진관, 죽세공품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명월관(노동조합), 소화권번주식회사(소화조), 안동병원(원장 권태형), 공설시장(신영시장, 구시장), 옹기전(세느강, 돼지국밥집 골목), 군산당, 팔진당, 대성당, 세신상회(현 협신상회).

ㆍ대명동: 구 군산역, 역전파출소, 화력발전소(해방 후 백화산업), 감독(감도가), 춘천주조장, 대흥기계공업사(농기구 제작소), 태전약국(태전약업사), 조명상회, 동일관(東一館: 조선요리, 서양요리), 공집(요릿집), 풍미당, 한국당제과점,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역전종합시장(히파리마치), 약속다방(1984년 무장탈영병 인질극)

<조종안 기자의 군산학 강좌 안내>

▲1강(08/23) 군산의 도시 형성과정①-일본인 거리를 중심으로

▲2강(08/25) 군산의 도시 형성과정②-조선인 거리를 중심으로

▲3강(08/30) 우리 동네 톺아보기-궁멀에서 철길마을까지(구암동, 조촌동, 경암동 일대)

▲4강(09/01) 우리 동네 톺아보기-경포에서 째보선창까지(중동, 금암동 일대)

▲5강(09/06)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군산역에서 중앙로 2가까지①(죽성동, 신영동, 영화동, 평화동, 영동, 중앙로2가)

▲6강(09/15)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군산역에서 중앙로 2가까지②(죽성동, 신영동, 영화동, 평화동, 영동, 중앙로2가)

▲7강(09/17) 군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①(현장탐방)

▲8강(09/20)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구복동에서 창성동까지(개복동, 창성동 일대)

▲9강(09/22) 우리 동네 톺아보기-선양동에서 둔배미까지(선양동, 오룡동, 둔율동 일대)

▲10강(09/27) 우리 동네 톺아보기-흙구데기에서 미원동까지(삼학동, 미원동 일대)

▲11강(09/29)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경성고무 주식회사에서 팔마재까지(흥남동, 문화동, 경장동, 미장동 일대)

▲12강(10/08) 군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②(현장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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