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의 群山學 2강] 개항 전 군산 모습(군산의 도시형성 과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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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의 群山學 2강] 개항 전 군산 모습(군산의 도시형성 과정2)
  • 조종안 시민기자
  • 승인 2022.08.26 07:31
  • 기사수정 2022-09-02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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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보선창과 서래포구 앞에 있는 금강하구의 빨간등대가 묵묵히 소형어선들의 안전을 지켜오고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째보선창과 서래포구 앞에 있는 금강하구의 빨간등대가 묵묵히 소형어선들의 안전을 지켜오고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소설 '탁류'에 등장하는 조선인촌> 

# ‘안둔배미(선양동)’에서 ‘깨꼬랑(경포천)’까지

채만식 소설 <탁류>는 작가의 특징을 집약한 역작으로 일제강점기(1920~1930년대) 군산(群山)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문학작품으로 <조선일보>(1937년 10월 12일~1938년 5월 15일)에 연재됐으며, 1939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됐다. 

그러나 1941년 재판 출간 후 조선총독부로부터 발행금지 처분을 받는다.

<탁류>는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그늘진 사회상을 조명한다. 

소제목 ‘인간 기념물’로 시작, 19번째 ‘서곡(序曲)’으로 끝맺는 이 소설은 사기와 간통, 모함과 살인사건이 이어지는 등 암울했던 사회상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음에도 일본인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제에 짓밟히고 억눌린 조선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초봉이의 쓰라린 역정과 정주사의 몰락 과정,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비참한 처지는 일제식민지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초봉은 청순하지만, 인식이 희박해 언제나 세상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겨버리고 남자들에게 농락당한다. 그래서일까, 초봉은 대책 없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조선, 정주사는 썩은 조선의 관리, 간교하고 음흉한 장형보는 조선을 짓밟은 일본을 연상시킨다.

“장형보 그까짓 파리 목숨 하나만두 못한 생명. 파리 목숨이라믄 남한테 해나 없지. 천하에 몹쓸 악당. 그놈을 죽였다구 그게, 그게 죄란 말이냐? 어쩌니 그게 죄냐? 미친개는 때려죽이면 잘했다구 추앙하지? 미친개보담두 더한 걸 죽였는데 어째서 죄란 말이냐?··· 난 억울해서 징역 못살겠다!··· 왜 내가 징역을 사니?” (소설 <탁류> 622~623쪽)

순종적이던 초봉이가 악독한 행동과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장형보를 죽이고 살인자로 전락하는 대목이다. 이는 그의 봉건사회 이념과 운명에 대한 소극적 순응에서 비롯됐겠지만, 일제 식민체제에 대한 작가의 분노도 함께 느껴진다. 

악의로 똘똘 뭉친 형보를 독초에 비유하면서 “천하에 몹쓸 악당, 그놈을 죽였다구 그게, 그게 죄란 말이냐?”라며 울부짖는 초봉이의 절규는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떠오르게 한다.  

# 1930년대 배경, 옛 모습 고스란히 드러내

<탁류>는 군산의 심장부로 일컫는 본정(혼마치)의 미두장 앞에서 정주사가 젊은 하바꾼들에게 봉변당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후엔 조선인 동네와 거리, 등장인물의 집과 직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정주사 집, 초봉이 직장, 형주가 다니는 학교, 고태수 하숙집, 남승재 직장 등이 개복동 혹은 옛 둔뱀이(둔배미) 지역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 주사는 요새 정거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 난 소화통이라는 큰 길을 동쪽으로 한참 내려가다가 바른손 편으로 꺾이어 개복동(開福洞) 복판으로 들어섰다. 예서부터가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줄임)

"개복동, 구복동, 둔뱀이 그리고 이편으로 뚝 떨어져 정거장 뒤에 있는 ‘스래(京浦里)’, 이러한 몇 곳이 군산의 인구 칠만 명 가운데 육만도 넘는 조선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어깨를 비비면서 옴닥옴닥 모여 사는 곳이다.”-(같은 책 42쪽)

정주사와 초봉이가 오간 길은 나라를 빼앗긴 조선 사람들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수탈과 억압의 역사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또한, 군산 원도심권은 일제강점기 도시 구조를 원형에 가깝게 간직하고 있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정주사, 초봉이, 고태수, 장형보, 남승재 등)이 거닌 거리를 따라 걸으면 1930년대 군산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이 주목받는 이유는 미두로 가산을 탕진한 정주사가 신세를 한탄하며 자살을 생각했던 째보선창을 비롯해 고태수 직장 조선은행(근대건축관), 초봉이 동생(형주)이 다니던 제일공립보통학교(중앙초등학교), 둔뱀이, 개복동, 소화통, 콩나물고개, 제중당약국, 금호병원, 스래(경포천 주변) 신흥동 등의 건물, 도로, 지명 등이 지금도 존재하거나 통용되고 있기 때문일 터다.

이처럼 <탁류>는 픽션이면서도 역사적 전형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특히 소설에 등장하는 정주사 집터(선양고가교), 둔뱀이(팔마재 포함), 콩나물고개, 한참봉 쌀가게 터, 중앙로 2가, 대정동(큰샘거리), 중앙초등학교, 경포리(경포천) 등은 지역 근현대사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많은 탐방객들로부터 주목을 받는다.  

# 일본인은 3~4명, 조선인은 10명에 집 한 채꼴

전북지역 7개 고을(옥구, 전주, 진안, 장수, 금구, 태인, 임실) 세곡(稅穀)을 뱃길을 이용해 서울로 올려 보내던 군산창(群山倉)이 고종 32년(1895) 폐지된다. 

이후 한적한 어촌으로 전락한 군산은 개항(1899) 이후 미곡 이출항으로 발전을 거듭하며 번영을 누린다. 

그러나 일본을 위한 잔치에 불과했음이 여러 통계자료가 말해준다. 일본인들에게는 천국이자 '쌀의 엘도라도'였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지옥보다 더한 고통의 세계였던 것.

일제는 군산 개항 35주년(1934)을 맞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른다. 

후손들도 자신들처럼 이 땅에서 영원히 번영하길 염원하며 지금의 월명공원 대사산 중턱에 기념탑을 세운다. 각종 전람회와 품평회, 체육대회를 개최한다. 군산의 역사(1899~1934)를 정리한 <군산부사>(356쪽)도 발간한다. 행사기간(10월 11일~17일)에 군산을 찾은 방문객은 10만 여명. 

그처럼 '호남의 웅도' 소리를 들으며 약진하는 군산의 이면에는 인간생활권에서 축출당한 대다수 조선인들의 참담한 생활상이 늘 존재했다.

1934년, 그해 군산 인구는 3만6,959명(조선인 2만7,144명, 일본인 9,408명, 기타 407명)으로 세금에서도 조선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엿보인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1935년 군산의 호별세(戶別稅·일제가 집집이 물리던 지방세) 총액은 3만9,369원20전. 그중 일본인 납부액은 2만8,626원80전(2270호)으로 호(戶)당 평균 12원60전이었다. 

반면 조선인 납부액은 1만0,742원40전(2940호)으로 호당 3원60전에 불과했다. 

인구 비례 일본인은 3~4명, 조선인은 10명에 집 한 채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막만한 지붕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개복동 고지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 <탁류>는 1930년대 중반 조선인들의 주택 사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언덕 비탈을 의지하여 오막살이들이 생선 비늘같이 들어박힌 개복동, 그 중에서도 상상꼭대기에 올라앉은 납작한 토담집. 방이라야 안방 하나, 건넌방 하나 단 두 개뿐인 것을 명님(明姙)이네가 도통 오 원에 집주인한테서 세를 얻어 가지고, 건넌방은 따로 '먹곰보네'한테 이 원씩 받고 세를 내주었다. 대지가 일곱 평 네 홉이니, 안방 세 식구, 건넌방 세 식구, 도합 여섯 사람에 일곱 평 네 홉인 것이다."

# 정주사 집터와 둔뱀이

미원동 사거리에서 둔율동을 지나 ‘산끊어진 고개’에 다다르면 가파르게 치솟은 암벽 위로 고가다리 하나가 놓여 있다. 

선양동 해돋이 공원과 창성주공아파트 단지를 잇는 ‘선양고가교’다. 

그 고가다리 중간쯤에 <탁류> 주인공 정주사 집터임을 알리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소설 속 정주사 집이 그곳에 있었던 것. 아래는 정주사가 코빠지게 걱정하는 대목이다.

“둔뱀이는 개복동 보다도 더하게 언덕비탈로 제비집 같은 오막살이집들이 달라붙었고, 올라가는 좁다란 언덕길은 코를 다치게 경사가 급하다. ‘흙구더기’까지 맞닿았던 수만 평의 논은 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집이 들어앉고 그 한복판으로 이 근처의 집 꼬락서니와는 어울리지 않게 넓은 길이 질펀히 뻗어 들어왔다. 그놈을 등 너머 신흥동으로 뽑으려고 둔뱀이 밑구멍에 굴을 뚫을 계획이라는데, 정주사네 집은 바로 그 위에 가서 올라앉게 되었다.”-(같은 책 84쪽)

위에서 ‘넓은 길’은 지금의 미원동 사거리-선양고가교(산 끊어진 고개) 방향 도로이고, ‘흙구더기’는 재개발로 사라진 서흥남동 지역으로 비가 조금만 내려도 진흙탕이 되는 동네라서 붙여진 지명이다. 

‘수만 평의 논은 다 없어졌다’고 한탄하는 대목은 지금의 미원동, 장재동, 둔율동 평지와 주택가가 당시 논이었음을 암시한다. 실제 옛날 지도를 보면 언급한 지역 대부분 논, 아니면 간석지로 표기되어 있다.  

소설에서 정 주사는 “굴을 뚫다가 그 놈이 혹시 무너져서 집이 퐁당 빠지기나 하는 날이면, 입이야 남의 집이니 상관없지만, 집안의 사람들은 큰일이라고 슬며시 걱정이 되는 때도 있다”는 대목은 개착도로(산 끊어진 고개) 완공 전에는 정 주사네 집이 지금의 선양고가교 중간쯤 자리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오룡동·선양동·창성동·둔율동 일대는 월명산(105m)에서 뻗어 내려온 야트막한 산줄기를 등지고 옹기종기 들어선 초가들이 고즈넉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능선이 끝나는 지점은 지금의 평화동 부근으로 중간에 고개가 네 개나 됐다. 서낭당고개(형무소고개), 명산동고개(산 끊어진고개), 콩나물고개(아리랑고개), 군청고개(둔율동고개) 등이 그것이다.

그중 선양동 해돋이 공원과 창성주공아파트 단지 사이의 ‘산끊어진 고개’는 1936년 봄 일제가 총공사비 5만 6,000원으로 공사에 착수, 1939년 8월 개통식을 성대하게 치른 개착도로(開鑿道路)를 일컫는다. 완공 당시에는 2차선 도로였으나 1980년대 후반 4차선으로 확장되고 1996년 11월 선양고가교가 완공되면서 두 지역이 하나로 이어지게 됐다.

# 일제에 의해 사라진 큰샘거리(大井洞)

큰샘거리(대정동)는 지역 주민들의 식수를 책임져주는 큰 우물이이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중앙로와 농방골목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부근에 큰 샘(공동우물)이 있었던 것. 주민들 식수는 물론 빨래터가 되기도 했던 공동우물은 상수도 보급률이 높아지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사라졌다.

서천에서 가족을 데리고 금강을 건너온 정주사가 처음 집을 마련한 동네도 큰샘거리이고, 초봉이와 고태수가 신혼살림을 차린 동네도 큰샘거리다. 고태수가 한참봉 부인 김씨 소개로 초봉이와 결혼하게 되어 살림집을 마련하는데 정주사는 큰샘거리에 셋집을 얻어놓고 집에는 새집을 사려 했으나 마침 마음에 드는 집이 있어 나중에 새로 짓든지 사든지 할 테니 초봉이 나오는 길에 들러보라고 기별한다.

“정 주사는 이 싸전(한참봉 쌀가게)과 주인을 볼 때마다 샘이 나고 심정이 상한다. 정 주사가 처음 군산으로 와서 큰샘거리(大井洞)서 살 때에 탑삭부리(한참봉)네는 바로 건너편에다가 쌀, 보리, 잡곡 등을 동냥해온 것처럼 조금씩 벌여놓고, 오도카니 앉아 낱되질을 하고 있었다. 거래는 그때부터 생겼다.”-(같은 책 43쪽)

한참봉이 처음 쌀가게를 차렸던 곳도 큰샘거리다. 정주사가 큰샘거리에 살 때 한참봉은 쌀을 됫박으로 파는 자그만 가게였으나 정 주사가 미두로 살림을 말아먹는 사이 큰돈을 벌어 콩나물고개 아래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큰샘거리는 농방골목, 떡전골목, 약방골목, 모시전 거리 등과 이웃하고 있었다.  

일제가 인구 5만을 목표로 계획한 도시 군산은 새로운 도로를 낼 때마다 정감어린 전래 지명이 하나씩 사라져갔다. 소화통 개통과 함께 사라진 '큰샘거리'와 '구복동' 그리고 명산동 일대 중정리, 월명산 아래 상정리(윗시암), 영화동 부근 구영리, 월명공원 아래 내영리, 중앙로 1가 강변리, 신창동 부근 거석리, 서낭당 고개(형무소 고개) 등이 대표적이다.

# 째보선창 조성 후 ‘깨꼬랑’으로 전락한 ‘경포천’

초봉이는 제호에게 배신당하고 형보의 계집이 되기로 작정한다. 형보의 현금 재산을 모두 빨아내겠다고 악심을 품은 초봉은 딸(송희) 앞으로 생명보험 들어줄 것, 집세 외에 매달 생활비 50원씩 가져올 것, 친정으로 보낼 현금 1,000원 내놓을 것, 친정 동생들 서울로 데려다가 공부시킬 것 등 형보에게 여러 조건을 제시하고 다짐을 받는다.

정주사는 초봉이가 보내준 500원 중 300원으로 두 칸짜리 방에 부엌이 딸린 자그만 구멍가게를 마련한다. 삯바느질하는 아내 유 씨에게 재봉틀도 사준다. 가게는 같은 둔뱀이라도 위치가 달랐다. 전에 살던 상상 꼭대기가 아니라 비탈을 다 내려와 평지에 있었던 것. 가게를 부인에게 맡긴 정 주사는 밖에서 물건 사들이는 소임을 맡는다.

“새벽이면 정거장 앞으로 나가서 길목을 지키다가 촌사람들이 지고 들어오는 채소도 사고, 공설 시장에서 과실이며 과자 부스러기도 사고, 더러는 ‘안스래’에 있는 생선장에 가서 흥정도 해다 준다. 그러고 나면, 정주사는 온종일 팔자 편한 영감님이다.”-(같은 책 465쪽)

정주사가 과실이며 과자 부스러기도 사는 ‘공설시장’은 지금의 구시장(마트형 공설시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새벽이면 정거장 앞으로 나가 길목을 지키다가 촌사람들이 가져오는 채소도 사고...” 대목은 매일 새벽에 구 군산역 광장에 서는 도깨비시장(새벽시장)이 일제강점기에도 열렸음을 시사한다.  

정거장 넘어 스래(설애)는 500년 역사를 지닌 ‘설애장터’의 다른 이름으로 지금의 중동, 경암동, 경장동 일부 지역을 포함하였다. 경포는 서래산 아래(현 경암사거리 부근)에 자리했으며 한강이남 최초 삼일운동인 ‘설애장터만세운동(3·5만세운동)’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설애장터(서래장터)는 한때 서울을 비롯해 강경, 전주, 태인 등 전국 각지로 물자가 오갈 정도로 번창했으며, 경포천은 크고 작은 배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금강의 지류였다.

※위 원고는 <군산문화>(2019)에 실린 글을 보강한 것임.

 

<조종안 기자의 군산학 강좌 안내>

▲1강(08/23) 군산의 도시 형성과정①-일본인 거리를 중심으로

▲2강(08/25) 군산의 도시 형성과정②-조선인 거리를 중심으로

▲3강(08/30) 우리 동네 톺아보기-궁멀에서 철길마을까지(구암동, 조촌동, 경암동 일대)

▲4강(09/01) 우리 동네 톺아보기-경포에서 째보선창까지(중동, 금암동 일대)

▲5강(09/06)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군산역에서 중앙로 2가까지①(죽성동, 신영동, 영화동, 평화동, 영동, 중앙로2가)

▲6강(09/15)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군산역에서 중앙로 2가까지①(죽성동, 신영동, 영화동, 평화동, 영동, 중앙로2가)

▲7강(09/17) 군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①(현장탐방)

▲8강(09/20)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구복동에서 창성동까지(개복동, 창성동 일대)

▲9강(09/22) 우리 동네 톺아보기-선양동에서 둔배미까지(선양동, 오룡동, 둔율동 일대)

▲10강(09/27) 우리 동네 톺아보기-흙구데기에서 미원동까지(삼학동, 미원동 일대)

▲11강(09/29)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경성고무 주식회사에서 팔마재까지(흥남동, 문화동, 경장동, 미장동 일대)

▲12강(10/08) 군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②(현장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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