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의 群山學 1강] 개항 전 군산 모습(군산의 도시형성 과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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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의 群山學 1강] 개항 전 군산 모습(군산의 도시형성 과정1)
  • 조종안 시민기자
  • 승인 2022.08.24 08:38
  • 기사수정 2022-09-05 0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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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기자
조종안 기자

'군산 야구 100년사' 저자인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면서 향토사학자가 2022 군산학(群山學) 강좌 강단에 섰습니다. 

지난 23일 첫 강좌를 시작으로 오는 10월8일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우리 동네 톺아보기'라는 주제로 진행됩니다.

군산학은 군산시와 군산대 산학협력단(전북역사문화교육연구소)이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올바르게 알리고, 시민들과 소통의 장을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투데이 군산>은 조종안 기자와의 협의에 따라 군산학 강좌 내용을 게재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시민들이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서 입니다. 

조종안 기자의 군산학 강좌는 현장 강의가 끝난 후 <투데이 군산>홈페이지에 그 내용을 올릴 계획입니다.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ㆍ강좌명: 군산학 '우리 동네 톺아보기(1)

ㆍ일정: 08/23~10/08 19시~21시

ㆍ장소: 군산대 멀티미디어 강의실

ㆍ대상 및 인원: 시민과 군산에 주소를 둔 사업장 직장인/60명(선착순)

군산시 나포면 공주산에서 내려다 본 금강/사진=조종안 기자
군산시 나포면 공주산에서 내려다 본 금강/사진=조종안 기자

# 개항 후 전래 지명 대부분 사라져

항구도시라고 해서 바다만 있는 게 아니다. 

군산(群山)에는 그 바다를 향해 숨차게 달려온 강이 하나 있다. 한강, 낙동강과 함께 남한의 3대 강으로 꼽히는 금강(401㎞)이다. 천리를 에두르고 휘 도는 이 젖줄을 따라 수많은 고을이 자리하였고, 사람과 문물이 흘러왔다. 먼 길을 날아온 수십만 마리 철새들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금강은 전라·충청 내륙을 하나로 이어주는 중요한 뱃길이었다. 

강변 포구들은 군산항과 더불어 일제 수탈의 통로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일제가 어선을 비롯해 여객선, 물자 수송선 등의 안전 운항을 위해 강경 황산 포구와 군산 째보선창에 등대를 설치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금도 논산, 강경, 군산 등에는 포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시내 초·중·고 대부분 교가에 들어가는 금강(錦江)은 물결이 비단처럼 곱고 아름답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비단강’이라 칭했으며, 저녁노을에 반사되는 물빛이 황금빛이라 해서 금파(金波), 햇볕에 반사되는 물결이 눈부시게 은빛으로 빛난다하여 은파(銀波)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채만식 소설 제목을 따라 탁류(濁流)로도 불린다.  

강 언저리마다 고을이 자리하였고 포구가 번창하였다. 이 땅에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에는 황포돛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포구마다 보부상이 모여들었고 객주들은 거래를 주선하였다. 

조기나 뱅어 파시를 앞두고는 경기도 지역 배들까지 몰려들어 장관을 이뤘다. 옥구·임피에서 재배한 다양한 농산물은 지역 특산품으로 선정되어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수많은 산과 들을 에두르고 휘돌면서 천리(401㎞)를 흘러온 금강. 숨차게 달려온 그 물줄기는 군산시 중동, 경암동 지역 강기슭에서 용솟음치듯 마지막으로 세차게 굽이친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군산 앞바다에서 서해와 만난다.

군산은 조개더미(패총)가 국내에서 가장 밀집된 지역으로 알려진다. 조개더미는 해안이나 강변에 촌락을 이루고 살았던 선사 시대 사람들이 굴이나 조개를 까먹고 버린 쓰레기 더미를 일컫는다. 군산의 선사 시대 흔적인 조개더미는 어족 자원이 풍부했고, 농사짓기에 적합한 풍토와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던 지역이었음을 역설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군산은 1899년 개항과 함께 근대도시 밑그림이 그려진다. 이후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간다.

1908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신작로(군산~전주)가 개설되고 1912년에는 군산선(군산-익산) 개통과 함께 전북에서 가장 먼저 전기(電氣)도 들어온다. 축항공사도 4기(1905~1938)로 나눠 시행된다. 

모두가 일제의 치밀한 계략에 의한 것이었다. 국권피탈(1910) 이후 군산은 일제 식민 지배를 전국의 그 어느 도시보다 처절하게 겪는다. 따라서 탄압과 저항, 수탈의 생채기도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 근대사의 축소판 같은 도시 군산. 일제강점기 군산은 일본인들에게 ‘쌀의 엘도라도’이자 ‘호남의 웅도(雄都)’였다. 

그러나 빈민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소아병 환자와 토막집, 불량주택 등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도시였다. 

저항과 쓰라린 수탈사가 공존하는 그 공간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 조창·조운제도 폐지이후 활기 잃어

조선 시대 군산 지역은 군산진성을 비롯해 오성산성, 창안토성, 박지산성 등 15개 산성과 토성이 해안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봉수대 터도 불지산, 오성산, 점방산, 어청도 등 여덟 곳에 남아 있다. 

이처럼 군산은 고려 시대 이전부터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 군산진성은 ‘노인성’으로도 불렸으며 지금의 수덕산 아래(영화동)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8세기 중엽 제작된 <해동지도>는 당시 옥구 인구를 1만 4,421명(남: 6,589명 여: 7,832명), 임피는 2만 2,794명(남: 9,896명 여: 1만 2,898명)으로 기록하였다. 1871년 당시 옥구 북면(군산) 인구는 2,834명(741가구). 

군산에 거주하며 쌀을 구입해 세금을 내는 외지인도 많았다. 따라서 각지에서 모여든 짐꾼과 장사꾼을 합하면 족히 3,000명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고종 31년(1894) 이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새로운 관리 등용 제도가 채택된다. 노비매매 금지와 신분제를 폐지하여 겉으로는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였다. 행정과 경찰권이 분리되고, 조세의 금납화(金納化) 시행으로 각 지방 세곡을 서울로 운반하는 조창·조운 제도가 폐지된다.

군산창도 1894년 조운, 조창 제도가 폐지되고 이듬해에는 각 지역 외병(外兵)과 함께 수군 병영이었던 군산진도 해체된다. 수많은 장삿배와 어선, 조운선이 드나들면서 상거래가 활발했던 군산포는 해상 운송이 끊기면서 모든 기능이 쇠퇴하기 시작한다. 인구도 급격히 감소한다. 

아래는 1897년 4월 3일치 <독립신문> 잡보 기사 내용이다.

“전라도 옥구군 군산창은 인민 수백 호가 살더니 창(倉)을 폐지한 후에 거민들이 긔한(굶주리고 헐벗어 배고픔과 추위)을 견디지 못하야 집을 헐어 아즉 구급하니 전일 수백 호 대촌이 지금은 계오(겨우) 칠십호가 남았는디 화륜선 풍범선은 수시로 출입하여 버릴 디는 못 된다고, 그곳 백성의 편지가 신문사에 왔더라.”

개항 이전 군산 모습/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개항 이전 군산 모습/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조선은 건국 초부터 외국과의 수교 거부와 억불정책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맺음으로써 굳게 닫혀 있던 빗장을 풀었다. 조약 체결과 함께 3개 항(부산, 인천, 원산)이 개항장이 되었고, 군산은 광무 3년(1899) 5월 1일 개항하였다. 

개항 전에는 해창, 칠읍해창, 군창골, 군창(群倉), 군산포(群山浦) 등 다양하게 불렸다.

개항전 군산포 사진을 보면 지금의 원도심권(장미동, 영화동, 월명동, 명산동 등)은 대부분 바닷물이 드나드는 간석지였다. 금강 지류가 지금의 월명동과 명산동까지 뻗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이 지역을 매립, 확장하고 호안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였으며 대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항만을 구축하고 철도를 가설하였다.

군산은 개항과 함께 영사관, 경무서(경찰서), 해관(세관), 우편사(우체국) 등 근대적 행정사무 기관이 들어선다. 모두 개항장을 관리하려는 조치였다. 

본래 군산은 옥구군 북면(北面)에 속한 어촌이었다. 북면에는 구영리, 강변리, 죽성리 등의 마을이 있었다. 

지금의 ‘원도심권’으로 대한제국 정부는 외국인들이 공동 거주하는 각국조계지로 지정한다. 동쪽은 죽성포(째보선창), 서쪽은 월명공원, 남쪽은 중앙로1가, 북쪽은 금강을 경계로 하였다.

개항 당시 군산의 조계지 총면적은 57만2,000m²(약 17만3000평)로 지금의 해망동, 영화동, 장미동, 중앙로 1가 지역이다. 

동서 구릉지와 해안쪽 해빈지역으로 주거 가능 지역은 동서 고지대 사이의 중앙 저지대 33만6,669m²(약 10만 2,000 평)이었다. 면적은 당시 조계지가 설정된 6개 개항장(인천, 진남포, 군산, 성진, 마산, 목포) 중 마산 다음으로 적은 면적이었다.

조선인들은 조계지 밖으로 이주 당하고, 시가지는 운영권과 경매권을 장악한 일본인들이 차지한다. 새로운 무역과 제국주의 수탈방식 등에 무지했던 대한제국 정부는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조계지를 독차지한 일제는 동서를 직선으로 가르는 도로(본정통, 전주통, 대화정, 욱정, 명치정)와 간선도로 9개(1조통~9조통)를 내면서 국내 유일의 격자형 도로망을 구축한다.

일제는 갯벌과 갈대밭을 매립하고 그 위에 도로를 개설하였다. 

한적한 어촌이었던 북면 일대는 본정(해망로) 전주통·욱정·대화정(영화동) 명치정(중앙로 1가) 횡전정(신창동), 천대전정(월명동), 서빈정·금정(해망동), 동빈정(째보선창), 강호정(죽성로), 영정(영동), 동영정(신영동), 소화통(중앙로 2가) 등 일본식 마치(町) 체계 도시가 조성된다. 

간선도로도 9개(1조통~9조통) 만들어진다. 그중 6조통이 오늘의 ‘대학로’이다.

# 수덕산은 군산의 쌈터

 

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군산은 개항과 함께 영사관, 경찰서, 우편국 등이 설치된다. 군산진 자리에 있던 영사관은 1906년 2월 폐지되고 이사청이 들어선다. 군산 이사청은 공주와 전주에 지청을 두고, 전북의 만경·부안·고부·정읍·순창·구례·남원과 충남 보령·남포·홍산·정산 등을 관할하였다. 당시 한 이사청 관내에 두 개 지청을 둔 곳은 경성, 부산, 군산 세 곳 뿐이었다 한다.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1872)를 보면 옥구 북면(군산)은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로 ‘배산임수’의 명당을 떠오르게 한다. 

개항 당시 군산은 수덕산이 뒤쪽에 자리하고 앞으로 샛강이 흘렀다. 샛강은 개항 후 복개되어 6조통이 된다. 지금의 대학로이다. 

동령산을 헐어내고 지은 군산초등학교와 구 시청 사이를 흐르는 샛강은 거룻배가 오갔고 나무다리도 놓여 있었다.

드루(Drew)와 전킨(Junkin) 선교사가 1895년 가을 군산에 처음 둥지를 튼 곳도 이곳 수덕산이다. 그들은 수덕산 기슭 초가 두 채를 매입해 포교소와 예배소를 설치하고 1899년 12월 구암동산에 선교스테이선을 개설할 때까지 오전에는 전도, 오후에는 환자를 치료했다. 

따라서 수덕산은 호남지역 서양의료와 개신교가 첫발을 내디딘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수덕산은 석산(石山)으로 월명산·장계산·설림산·점방산·대사산 등으로 이루어진 월명공원 끄트머리 봉우리였다. 

월명공원 줄기는 시가지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그중 월명산은 군산의 진산으로 초중고 교가에 들어갈 정도로 시민의 사람을 듬뿍 받고 있다. 군산진이 있던 수덕산은 어머니 가슴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봉우리 두 개로 이루어진 군산의 쌈터였다.

개항 초기 제작된 각국조계지 평면도를 보면 수덕산은 두 개의 소담한 봉우리로 표기되어 있다. 그중 금강 연안까지 뻗쳐있던 봉우리는 도로 개설과 4차에 걸친 축항공사(1905~1938) 과정에서 해안 매립을 위한 토석 채취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부잔교가 설치되는 3차 축항공사 시기(1927년~1933)에 대부분 헐려 나갔다. 

남은 봉우리 하나도 최근 근린공원을 조성하면서 깎여나가 절반 정도만 남아 있다.

# 도로 조성될 때마다 고유 지명 사라져

숙종 27년(1701)에 제작된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에는 군산 진영(鎭營)을 중심으로 월명공원 아래(현 신흥동 일대) 부근으로 내영리(內營里) 월명동, 금광동 일대의 당정리(唐井里) 영화동 일대 강변리(江邊里) 구영리(舊營里), 신창동과 중앙로 일대의 거석리(擧石里), 그리고 죽성리(竹城里), 경포리(京浦里), 경장리(京場里), 해망정(海望亭)이 기록되어 있다.

군산은 일제가 인구 5만을 목표로 개발한 항구도시다. 

새로운 도로가 만들어질 때마다 우리의 고유 지명이 하나씩 사라져갔다. 

소화통 개통과 함께 사라진 대정동(大井洞: 큰샘거리)과 금광동 일대 당정리(唐井里) 명산동 일대 중정리(中井里: 가운디 시암), 월명산 아래 상정리(上井里: 윗시암), 구영리(영화동), 내영리(월명공원 아래), 강변리(중앙로1가 부근), 거석리(擧石里: 들돌마을), 동령고개(장미동), 서낭당 고개(형무소 고개) 등이 대표적이다.

군산에는 령(嶺)으로 불리는 고개가 두 개 있었다. 해망령과 동령고개이다. 

같은 고개라도 치(峙)는 자그만 언덕을 뜻하고, 현(峴)은 일반 고개(재)를 말하는 접미사이다. '령'은 대관령, 추풍령, 노령 등에서 알 수 있듯 높은 산, 높은 산맥 등에 주로 많이 쓰인다.

그밖에 서울로 보낼 쌀(나락)을 말리는 건조장으로 활용했던 미장동(米場洞). 일을 돕고 조력하는 일꾼들이 모여 살아 '덤 벌', '도움 멀'로 불리다가 한자 '조촌'(助村)을 붙인 조촌동, 공납미와 물화를 건조하고 포장하는 장소였던 경장동(京場洞), 쌀창고가 많았던 동네 장미동(藏米洞), 3천 마리 학이 춤추는 지형이라 해서 붙여진 삼학동(三鶴洞), 비만 조금 내려도 진흙탕이 되는 동네라서 불린 '흙 구더기', 달구지가 쌀을 싣고 가면 덜커덕 소리가 요란하다고 해서 붙여진 '덜컥다리' 등 조상들의 삶이 느껴지는 지명도 많다.

<조종안 기자의 군산학 강좌 안내>

▲1강(08/23) 군산의 도시 형성과정①-일본인 거리를 중심으로

▲2강(08/25) 군산의 도시 형성과정②-조선인 거리를 중심으로

▲3강(08/30) 우리 동네 톺아보기-궁멀에서 철길마을까지(구암동, 조촌동, 경암동 일대)

▲4강(09/01) 우리 동네 톺아보기-경포에서 째보선창까지(중동, 금암동 일대)

▲5강(09/06)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군산역에서 중앙로 2가까지①(죽성동, 신영동, 영화동, 평화동, 영동, 중앙로2가)

▲6강(09/15)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군산역에서 중앙로 2가까지②(죽성동, 신영동, 영화동, 평화동, 영동, 중앙로2가)

▲7강(09/17) 군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①(현장탐방)

▲8강(09/20)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구복동에서 창성동까지(개복동, 창성동 일대)

▲9강(09/22) 우리 동네 톺아보기-선양동에서 둔배미까지(선양동, 오룡동, 둔율동 일대)

▲10강(09/27) 우리 동네 톺아보기-흙구데기에서 미원동까지(삼학동, 미원동 일대)

▲11강(09/29)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경성고무 주식회사에서 팔마재까지(흥남동, 문화동, 경장동, 미장동 일대)

▲12강(10/08) 군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②(현장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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