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83] 수송동에 자리했던 옛 '수송高'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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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83] 수송동에 자리했던 옛 '수송高' 아시나요?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08.18 15:00
  • 기사수정 2022-08-22 1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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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수송고의 교정… 제일건설, 군산에 첫 진출한 수송동 제일아파트
수송고의 운영자 수송동 탄생 기여 … 오늘날 ‘수송’동의 이름 연유
군사시가족센터… 구군산시건강가정· 다문화가족지원센터 통합업무

군산의 핵심 간선도로인 수송로는 군산발전의 현재진행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 도로는 다양한 간선도로와 작은 길 등을 담아내는 거대한 물줄기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인의 거리 건너편에 수송근린공원이 위치하고 있고 그 주변에는 시립도서관과 인근에 OCI직원들의 생활관이 존재한다.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공원의 명칭은 29호 공원.

여름밤이면 건강과 휴식을 위해 이곳을 거닐고 있는 시민들로 가득하다.

이곳에서 조금가면 ‘군산 최대의 동(洞)’ 수송동의 민낯을 만나게 되는데 군산의 도심 속 빈민가로 전락한 ‘수송 6통’이다. 오래된 판자촌과 같은 곳으로 약 100세대가 덕지 덕지 붙어 있어 슬럼가를 연상케 하고 있다.

이곳은 한때 수송동사무소가 존재했을 뿐 아니라 ‘수송(秀松)’이라는 명칭의 시원(始原)과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이 건물과 한몸이었을 공간이 수송동 제일아파트가 건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군산수송동 제일아파트 인근의 골목길에는 맛집들이 즐비하다. / 사진=투데이군산
군산수송동 제일아파트 인근의 골목길에는 맛집들이 즐비하다. / 사진=투데이군산

이곳과 작은 도로 사이에 수송주차장이 들어서 있고 친구들의 단골 음식점이 있는데 ‘장어랑 흑돼지’다. 이 음식점이 조현숙 사장은 경찰 중 진짜사나이로 통한 유만오 정보계장의 중학교 동창이다. 물론 유 계장은 필자의 절친이기도 하다.

이곳의 조사장은 친절과 미소로 무장한 미인으로 이 거리의 대표 맛집의 하나로 성장하고 있다.

# 수송동의 유래와 탄생… ‘수(秀)’ + 소나무 ‘송(松)’의 조합

- 옛 계성학원의 수송고등학교에서 유래

ㆍ1973년 7월 1일 옥구군 미면 둔율리를 수송동 편입

ㆍ1973년 7월 1일 옥구군 옥산면 지곡리를 지곡동 편입

ㆍ1973년 7월 1일 옥구군 미면 경장리를 미장동 편입

ㆍ1973년 행정동 수송동사무소 탄생

ㆍ2009년 11월 25일 현 행정주민센터 준공

당시 애육원, 학교 등을 운영하던 사회사업가 김영천씨가 1964년 옥구군 4개면 6개리를 군산시로 편입하기 위한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돼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던 계성학원은 1972년 수송고등학교(현 수송제일아파트 부지)에 설립됐다.

학교 이름이 된 ‘수송’이라는 명칭은 당시 동(洞) 중심에 있던 소나무동산의 빼어난 소나무의 형상과 나라의 동량인 인재를 많이 배출하라는 의미에서 빼어날 ‘수(秀)’와 소나무 ‘송(松)’을 사용해 오늘날 수송동의 이름으로 자리잡게 된 것.

1973년 옥구군 6개리가 군산시로 편입되어 경장리, 둔율리, 지곡리를 관할하는 동사무소를 개소하면서 당시 다방면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해왔던 계성학원(서중, 수송고 재단)의 영향으로 동 명칭을 ‘수송동’으로 정했단다.

첫 수송동사무소는 수송고등학교 교실의 일부를 사용하다 수송동 33-18번지(현 군산시가족센터)에 동사무소를 신축한 후 노후화되자 2009년 11월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수송고등학교(계성학원)는 1974년 1월 19일 중앙고등학교(광동학원)로 인수되어 발전적인 통합절차로 역사 속에 사라졌다. 이때 중앙상고와 통합, 오늘의 중앙고 초석을 다진 것이다.

군산시의회 의장을 지낸 강태창 도의원이 최근 수송고 2학년 때 광동학원에 통합됐다고 증언해 수송고의 존재는 분명해보인다.

한편 에덴사회복지원은 1958년 설립된 사회복지법인으로 아동복지시설 ‘군산애육원’을 설립·운영해왔다. 사회복지법인 이전에 만들어진 군산애육원은 1947년에 설립됐다.

시설이 들어선 땅이 수송택지개발사업지구에 편입되게 되자, 에덴 측은 2003년 이사회를 열고 군산시에 기본재산 처분허가를 신청하며 현금보상금은 투명한 관리를 위해 법인과 군산시 공동명의로 은행에 예치하기로 결의해 조건부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시와 오랜 관련 소송을 벌이다 승소했지만 2008년 관련 건물을 마련하지 못해 스스로 문을 닫았다.(실질적인으로 휴원상태다).

다만 아쉬운 것은 김천배 에덴사회복지원 설립자와 옛 수송고 이사장인 김영천씨와의 관계가 깊어 보이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점이다.

# ‘군산가족센터’ 명칭 변경… 옛 다문화가정지원센터 등의 다른 이름

군산시가족센터는 군산시가 여성가족부로부터 지정받아 호원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수탁운영(2021~2025년)하는 가족 통합서비스 제공 기관이다.

군산시가족센터는 백가백색(百家百色)의 비전으로 군산시 가정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균형잡힌 가족 성장을 위해 지역 여건 및 이용자 특성에 적합한 맞춤형 가족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더불어 가정의 아이돌봄을 지원하여 아이의 복지 증진 및 보호자의 일·가정 양립을 통한 가족구성원의 삶의 질 향상과 양육 친화적인 사회환경 조성을 지원하고 있다.

‘군산시가족센터’는 올해 여성가족부 가족사업 지침에 따라 가족의 유형별로 이원화돼있는 가족지원서비스를 통합, 옛 군산시건강가정· 다문화가족지원센터란 이름 대신 새롭게 명칭을 바꿨다.

앞서 군산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2009년 3월 도비 사업으로 보건 복지 가족부에 의해 지정·개소한데 이어 2011년 7월 군산시 직영 센터로 변경되었다.

2012년 2월부터 다문화 가족 및 개인 상담사업도 실시하고 있다.

# 제일건설, 수송동서 군산 첫 대단위 아파트 건축

전북대표 주택건설업체인 제일건설이 군산 아파트 시장에 처음으로 뛰어든 수송동제일아파트 전경. / 사진=투데이군산
전북대표 주택건설업체인 제일건설이 군산 아파트 시장에 처음으로 뛰어든 수송동제일아파트 전경. / 사진=투데이군산

군산 수송동제일아파트는 익산소재 제일건설이 군산공동주택시장에 처음으로 뛰어든 현장이다.

제일건설은 2002년 3월 수송동 제일임대아파트(941세대) 완공이후 두번째로 군산주택시장에 진출했다. 이곳이 2003년 11월 한국토지공사로 부터 군산수송택지내 공동주택용지 1만900평규모의 1필지를 낙찰받았다.

이어 1필지(1만2,700평)를 매입, 수송동을 ‘익산의 영등동’처럼 대표적인 ‘군산의 제일아파트촌’으로 건설했다. 이렇게 조성된 일종의 제일타운은 한때 오투그란데란 이름으로 중앙건설업체와 경쟁하며 군산주택문화를 선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에도 제일건설은 호원대 옛 캠퍼스(소룡동)를 매입, 소룡동 제일아파트(2006년 6월 준공)를 건설한 바 있다.

최근엔 은파호수공원 주변에 레이크원이란 이름으로 멋진 아파트단지를 건설 중이다.

도내 대표적인 건설업체인 제일건설은 80년대 후반 주택건설사업에 뛰어든 이래 도내는 물론 전국을 무대로 수만세대의 아파트를 건립,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 수송근린공원 속 어린이맘껏광장

수송동 근린공원은 1999년 6월 9일 조성됐다. 면적은 2만4,066㎡에 달한다.

시는 2018년 11월 1일 어린이들이 맘껏 뛰놀며 스스로의 권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어린이 맘껏광장’을 조성,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군산수송동 근린공원 속에 어린이맘껏광장이 있다. 이곳은 도심 속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
군산수송동 근린공원 속에 어린이맘껏광장이 있다. 이곳은 도심 속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

어린이 맘껏광장은 어린이· 청소년들이 워크숍과 세미나 등 다양한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 수송근린공원에 6억5,000만원(유니세프 2억원, 군산시 4억5,000만원)이 투입돼 리모델링 형태로 조성됐다.

맘껏광장에는 △아동이 생각하는 군산의 주요역사의 길 △미래의 주인공은 ‘나’라는 자아실현의 상징성을 부각한 거울 △토론과 프리마켓 등 청소년 교류를 위한 카페 형식의 시설물 △휴식과 놀이가 가능한 다양한 조경시설과 쉼터 등으로 꾸며져 있다.

<후기>

정영욱 '투데이 군산' 대표
정영욱 '투데이 군산' 대표

수송동은 오늘날 군산을 대표하는 도심이지만 과거는 지금의 모습과 전혀 다른 곳이었다.

필자는 1982년 겨울 어느날, 대학생 시절에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다.

그 땐 시골집과 같은 풍경에다 길도 질척이었던 풍경을 간직한 도심 속 농촌동을 연상할 정도였다.

이곳에 갔던 이유는 고교 시절(3년) 같은 반의 실장이었던 P군을 만나기 위해 익산에서 물어물어 이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 친구의 남자다움과 의리 등이 뇌리에 남아 집전화를 통해 물어 물어 그를 만났던 곳이 수송동에 대한 기억이다.

고교시절 정의의 주먹을 자랑하던 친구였다. 축구부의 부원이 친구를 괴롭히자 이를 참지 않고 한방으로 그를 제압했던 그다. 그 친구는 고교 졸업 후 한때 몸이 좋지 않아 직업을 전전하다 신앙에 귀의, 최근엔 목사 안수와 함께 개척교회를 시무하고 있다.

물론 고교 시절 대입체력장을 했던 곳이 중앙여고의 운동장이어서 이곳과 인접한 곳에 다녀간 기억은 있다. 이곳에 처음왔던 필자는 호기심 속에 대입체력단련시험을 봤던 때 낡은 교사에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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